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6:31

12. 조사는 최상승이고 아라한은 소승인가

 

1. 4쌍8배

 

[문맥] 9-1.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성자의] 흐름에 든 자[預流]’가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9-2.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가 ‘나는 일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9-3.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不還]’가 ‘나는 불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9-4.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10-1.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얻은 그 어떤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얻은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먼저 사쌍팔배(四雙八輩)에 대해서『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인용한다.

출세간 마음(lokuttara-citta)은 세상(loka)을 넘어서는(uttara) 과정으로 구성된 마음이다. 이런 유형의 마음은 생사의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증득하도록 인도한다. 출세간의 마음에는 모두 8가지가 있다. 네 단계의 깨달음인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이 그들이다. 각각의 단계는 다시 도의 마음(magga-citta)과 과의 마음(phala-citta)의 두 가지 유형의 마음으로 나뉘어진다. 모든 출세간의 마음은 열반이 대상이 되며 道와 果로서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 도의 마음은 정신적 오염원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예류도의 경우는 영원히 약화시키는 역할을 함) 과의 마음은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는 역할을 한다. 도의 마음은 유익한 마음이고 과의 마음은 결실로 나타난 마음이다.

여기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은 각각의 도의 마음은 오직 한 번 일어나고 오직 하나의 심찰나(cittakkhan*a)만 지속된다는 것이다.<<maggacittassa ekacittakkhan*ikattāti.(PṬ.I.34)>>

이것은 그것을 증득한 사람의 마음의 흐름(상속) 중에 결코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 상응하는 과의 마음은 도의 마음 바로 다음에 일어나며 두 개 혹은 세 개의 심찰나동안 지속한다. 그 다음에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으며 과의 증득(phala-samāpatti, 4장 §22-4와 9장 §42참조)이라 불리는 출세간의 禪의 수행으로 많은 심찰나동안 지속되도록 할 수 있다.

도와 과는 위빳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을 통해서 얻어진다. 이런 수행은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을 강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정신[名, nāma]과 물질[色, rūpa]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주시함으로써 수행자는 이들의 특상(lakkhan*a)인 무상하고[無常, anicca], 괴롭고[苦, dukkha], 자아가 없음[無我, anatta]을 식별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내관(vipassanā)을 완전히 익히게 되면 출세간의 도와 과가 생겨나는 것이다.(9장 §§22-44를 참조할 것)

1. 예류도(預流道)의 마음(sotāpatti-magga-citta): sotāpatti는 sota와 āpatti의 합성어이다. 그 중에서 sota는 √sru(to flow)의 명사로 ‘흐름’의 뜻이고 āpatti는 ā(향하여)+√pad(to go)에서 파생된 명사로 ‘~에 들어감’, ‘~를 가짐’의 뜻이다. 그래서 ‘흐름에 듬’의 뜻이며 預流者라 한역한다. 수다원(須陀洹)이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이 단어에 도를 뜻하는 magga를 붙이면 sotāpatti-māga가 되고 ‘예류도(道)’로 옮기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일래, 불환, 아라한까지 도(道, magga)와 과(果, phala) 두 가지씩을 더하여 아비담마에서는 4가지와 8가지를 설하는데 이를 사쌍팔배(四雙八輩)라 옮기기도 했다.

여기서 보듯이 거스를 수 없이 해탈로 흘러드는 것이 예류이며 이런 증득을 경험하는 마음이 예류도의 마음이다. 여기서 흐름(sota)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이다.<<nibbānam patisavanato upagamanato, nibbānamahāsamuddaninnatāya sotasadisattā vā soto ti vuccati ariyo at*t*hangikomaggo.(VT)>>
마치 강가 강이 끊임없이 히말라야산에서 바다로 흘러들 듯 출세간의 성스러운 팔정도도 정견이 일어남으로 열반의 증득으로 끊이지 않고 흘러든다.

물론 팔정도의 각지들은 덕이 높은 범부들의 세간적인 유익한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각지들은 그들의 목적지인 열반에 고착되지는 않는다. 범부는 인품이 바뀌어서 법(Dhamma)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류를 증득한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도의 각지는 그 목적지가 고착되어 도도한 강물처럼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다.
예류도의 마음은 첫 번째 세 가지 족쇄들 ― 즉 유신견과 의심과 계율과 의식(儀式)이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잘라 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악처로 인도할 만큼 강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잘라버린다. 이 마음은 다른 다섯 가지 마음, 즉 사견과 함께 하는 탐욕에 뿌리박은 네 가지 마음, 그리고 의심과 함께 하는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을 영원히 제거해버린다. 예류를 증득한 자는 구경의 열반에 도달하는데 까지 최대 일곱 생이 더 남아 있으며 악처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2. 일래도(一來道)의 마음(sakadāgāmi-magga-citta): sakadāgāmi는 sakad+āgāmi로 분해되는데 sakad(Sk. sakr*d)는 saki나 sakid로도 나타나는데 ‘한 번(once)’의 뜻이다. āgāmin은 ā(향하여)+√gam(to go)의 명사로 접미어 ‘-in’이 붙으면 ‘~하는 사람’이 되며 그래서 ‘한 번만 더 돌아 올 사람’의 뜻이 된다. 이 경지를 증득한 사람은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돌아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현장스님은 一來者로 한역했으며 사다함(斯陀含)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이 마음은 일래자의 경지에 들게 하는 성스러운 팔정도와 연결된 마음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족쇄 이외의 다른 족쇄들을 더 제거하지는 않지만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희박하게 만든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해탈하기 전에 오직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태어난다.

3. 불환도(不還道)의 마음(anāgāmi-magga-citta): anāgāmi는 an(부정 접두어)+ā(향하여)+√gam(to go)의 명사로 접미어 ‘-in’을 붙이면 ‘~하는 사람’의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의미다. 不還者로 한역되고 아나함(阿那含)으로 음역되기도 한다. 이 세 번째 도를 얻은 자는 욕계세상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성자가 그 생에서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면 색계세상에 태어나며 거기서 반열반을 성취한다. 불환자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과 악의의 족쇄를 잘라 버리며 성냄에 뿌리 한 두 가지 마음을 영원히 제거해버린다.

4. 아라한도(阿羅漢道)의 마음(arahatta-magga-citta): arahatta는 동사 √arh(to deserve)의 현재분사형을 취해서 만든 arahat(주격명사형은 arahan이다)에다 추상명사형 어미 ‘-tva’를 붙여서 다시 추상명사화 했다. 그래서 ‘아라한 됨’이란 의미이다. 아라한의 문자적인 의미는 ‘대접과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고대인도어 일반에서 쓰이던 용어인데 불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불교적 해석을 하게 된다. 즉 모든 번뇌를 멸한 자야말로 참으로 대접과 존경을 받아야 할 자라고 정의하며 4쌍8배의 마지막 단계로서 수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아라한이라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아라한을 정신적인 오염원들로 이루어진 적(ari)을 부수어 버린(hata) 자<<kilesasankhātā arayo, sam*sāracakkassa vā arā kilesā hatā anenā ti arahā.(VT)>> 등으로 설명한다. 아라한도의 마음은 아라한의 완전한 해탈을 직접 나타나게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들, 즉 색의 세계에 대한 집착, 무색의 세계에 대한 집착, 아만, 들뜸, 무명을 파괴해버린다. 이것은 나머지 유형의 해로운 마음들도 제거한다. 그것은 사견과 함께 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 한 마음 네 가지와 들뜸과 함께 한 어리석음에 뿌리 한 마음이다.

 

 

 2 - 정형구

 

여기서 초기경에 나타나는 이들 네 가지 출세간의 경지에 대한 정형구를 살펴보자.

⑴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서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tin*n*am sam*yojanānam parikkhayā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ti. - M6/i.34 등)

⑵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者]가 되어서 한 번만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tin*n*am sam*yojanānam parikkhayā rāgadosamohānam tanuttā sakadāgāmī, sakideva imam lokam āgantvā dukkhassantam karissatī ti. - Ibid.)

⑶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不來] 법을 얻었다. (pa~ncannam orambhāgiyānam sam*yojanānam parikkhayā opapātiko tattha-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ti. - Ibid.)

⑷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하였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가 멸진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했다.(araham khīn*āsavo vusitavā katakaran*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n*abhavasam*yojano sammada~n~nā vimutto. - M1/i.4 등)


이처럼 전통적으로 이 4가지 성인의 반열을 열 가지 족쇄(saṁ-yojana)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열 가지 족쇄는 다음과 같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자아가 있다는 견해. 인간을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오온의 각각을 4가지로 자아 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7장 §7 해설을 참조할 것)
②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
③ 의심[疑, vicikicchā]: 불․법․승,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2장 §4의 해설 참조)
④ 감각적 욕망(kāmarāga):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⑤ 적의(paṭigha):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의 뜻. 성내는 마음[嗔心]과 동의어이다.(1장 §5의 3번 해설 참조)
⑥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감각적 욕망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물질의 세계와 그 느낌에 대한 집착.
⑦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정신세계나 그런 산냐(인식)에 대한 집착.
⑧ 자만[慢, māna]: 내가 남보다 낫다, 못하다, 동등하다 하는 마음.(2장 §4 해설 참조)
⑨ 들뜸(掉擧, uddhacca): 들뜨고 불안한 마음.(2장 §4 해설 참조)
⑩ 무명(無明, avijjā): 모든 해로움과 괴로움의 근본뿌리. 사성제를 모르는 것.

이 가운데서 처음의 세 가지를 극복한 경지를 예류라고 한다. 그리고 초기경에 의하면 불·법·승·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확립된 경우(aveccappasādo)를 들기도 하고 1. 선지식을 섬김(sappurisa-sam*sevā) 2. 정법을 따름(saddhamma-savana) 3. 지혜로운 주의(yoniso manasikāra) 4. 법을 잘 실천하는 것(dhammānudhamma-patipatti)을 갖춘 경우를 들기도 한다.

이상을 종합해서 어떻게 해서 예류과를 얻게 되는가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첫째, 불·법·승을 굳게 믿고 계율을 잘 호지하는 것이다. 즉 불·법·승과 계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 어떤 경계에서도 이 네 가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는 바른 사람(선지식)을 의지하고, 정법을 따르고, 지혜로운 주의를 항상 기울이고, 법을 잘 분별해서 실천하는 것을 들고 있다. 이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다르지 않다 하겠는데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행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중점으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덕목은 지혜로운 주의라 할 수 있다. 매 순간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서 꾸살라담마[善法]를 증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3 - 예류의 세가지 특징

 

그리고 아주 중요한 측면은 위에서 열거한 예류과를 증득한 사람의 특징을 들 수 있겠다.

첫째, 유신견(有身見, 개아가 있다는 믿음, sakkāya-dit*t*hi)을 극복한 경지이다. 즉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20가지 견해를 초월한 경지가 예류과의 특징이라 하겠다. 자아니 본성이니 불성이니 대아니 마음이니 자성이니 성품이니 영혼이니 생명이니 아뜨만이니 뿌루샤니 지와니 브라흐만이니 하여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품고있는 모든 본질론적, 존재론적인 발상을 뛰어 넘어야 비로소 예류과에 들게 된다는 가르침이라 하겠다.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몰라도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과연 한국 불교에 예류향이라도 되는 사람은 몇 사람쯤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둘째, 회의적 의심(vicikicchā: 불·법·승·수행의 필요성·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을 극복해야만 예류과의 경지가 된다는 말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특히 연기법을 철견하여 세상의 어느 경우 어느 경지·어느 가르침·어느 학문·어느 사상·어느 종교를 대하여도 지혜(반야)로써 걸림과 막힘이 없이 본질을 꿰뚫어 봐야만 참다운 불자의 반열에 든다고나 할 수 있겠다.

셋째, 계금취(戒禁取, 계율·의식에 대한 집착, silabbata parāmāsa,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 특히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례․의식(rites and rituals)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따르는 의식, 내가 따르는 스승, 내가 따르고 지키는 서원이나 계율을 통해서만 청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극복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참 같은 불교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 너무도 다른 전통·체계·의식·수행법 등등을 보고 있다. 이런 모양에만 착(着)하여 너는 소승 나는 대승, 너는 이단 나는 정통이라는 식의 엄청난 고정관념의 늪에서 헤어나는 것이 참된 불자의 도리라 하겠다.

금강경의 주제가 산냐이니 덧붙여 사족을 붙이자면, 우리는 무엇이 대승이고 무엇이 소승인지 그 출발점은 어디에 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 개념이 정착되고 발전되어왔는지 깊이 고뇌해보지도 않고 그냥 대승․소승이라는 산냐에 빠져서 장님 줄서기 식으로 관념을 전승해온 측면이 강한 것 같다. 불교가 역사를 인정하는 이상 분명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있고 그것이 2500여 년을 남방·북방에서 발전, 변천하면서 대승·소승 내지는 상좌부·대승으로 변천되어 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이제 남북을 논하고 대·소승을 논하는 역사의 소음에서 벗어날 시절이 온 것이 아닐까. 세계의 뜻있는 스님들이나 신도들, 불교학자들이 지금 이런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혜로운 주의를 항상 기울이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그를 실천하며, 무엇보다도 편견 없는 태도를 갖추어야 역사의 소음을 헤치고 부처님의 원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의 소음에 길들여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이 세 가지를 참된 불자의 도리로서 설하셨다는 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나는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엄청난 산냐놀음을 극복했는가, 나는 회의적인 의심을 극복했는가, 나는 나의 전통에 속하는 법요와 의식과 가르침에만 집착하여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가 참으로 진지하게 돌이켜보고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다시 사족을 하나 더 붙이자면 다른 가치체계,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세계의 여러 불교현상을 접할 기회를 가진 역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보다는 이러한 자기 나라의 불교[문화]전통만을 국집하여 근본을 놓치는 여러 경우들을 보고서 안타까운 마음이 참 많다. 영가 현각 스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직절근원(直切根源)은 불소인(佛所印)이요 적엽심지(積葉尋枝)는 아불능(我不能)”이라고. 근본을 바로 자름은 부처님이 인치신 바이요, 이파리 모으고 가지 찾음에 나는 능하지 못하다는 스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깊이 와 닿는다.

과학이라는 방법론을 개발한 현대인은 참으로 어느 시대보다 올바름[正]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은 어느 시대의 불자들보다 무엇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일까를 깊이 사유하고 실천궁행하는 기틀을 튼튼히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소승이라는 대롱을 치워버리고, 그리고 불교 역사를 통해서 무수히 입어온 법에 대한 산냐[法相]의 갑옷을 열어제치고 부처님이 고구정녕히 설하신 근본가르침을 사유하고 음미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발제자는 남북양전통의 수행의 출발을 팔정도에서 찾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다르침에서도 해탈을 말하지만 팔정도는 없다고 하셨다. 팔정도는 쉽다면 가장 쉽고 어렵다면 가장 어려운 것일 것이다. 팔정도는 매 찰나 찰나에 삶과 직면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지한 삶, 성숙된 삶, 치열한 삶을 구현하는 게 팔정도일 것이다. 대승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보살행을 팔정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살행이라는 산냐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고의 보살행이라면 보살행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선종도 최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대승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고 그 최상승이란 내용을 보면 보살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몇몇 남방 학자들은 중국 선종은 대승불교 속의 테라와다(Theravada, 상좌부)라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달마스님은 觀心一法이 總攝諸行이라 하여 이 마음을 통찰하는 것을 선종의 근본 모토로 제시하셨다. 본 금강경은 산냐를 척파하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수승승이며 최상승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다. 이것은 마음 하나를 다스리는 것이 전쟁에서 수천의 적과 싸워이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법구경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며 마음을 통찰하는 학문[心學]이라고 불리는 아비담마를 근본으로한 남방 위빳사나 수행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근거하여 우리는 조사는 최상승이고 아라한은 소승이라 하겠는가? 我空法有이므로 소승이다하면 남방 스님들은 웃는다. 어느 남방의 스님도 제법무아를 역설하지 않는 자는 없다. 이것은 그냥 대승에서 아비담마를 비하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 학자들이 불교는 무아니까 아무것도 없는 데서 유가 생겼다고 하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요 허무주의의 가르침이라고 선동하는 것과 같은 발상으로 남방불교를 폄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남방은 분석을 중시하고 북방은 직관을 중시한다. 분석은 직관으로 완성되지만 분석이 없는 직관은 설 자리가 없다. 직관만을 강조하다 보면 진아나 불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원각본성에 계합한다는 비불교적인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발상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한국불교는 性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것과 합일하거나 그것의 은총으로 살 것을 설하는 힌두교의 아류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너무 이런 것을 강조하다보면 한국불교 수행을 너무 비판하여 한국불교의 간화선법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이 수행법을 따르는 분들의 거부감이 강할 수 있음을 발제자는 안다. 발제자는 나름대로 화두에 의심이 발하여 모든 것 팽개치고 출가하였다. 위빳사나 수행도 나름대로 해보았지만 화두에 대한 인연이 치성?하여서인지 발제자는 구지 말하자면 간화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야한다. 호리유차에 천리현격이라 했다. 실재론적인 사고를 철저히 털어내지 못한다면 간화선은 우빠니샤드적이 될 소지가 많고 지금 많은 수좌들이 이렇게 수행하고 있음을 발제자는 지적하고 탁마하고 싶다.

제방에서 아주 많은 수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hi)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 ‘이뭣고’화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최고의 간화선의 지침서로 까지 거론하는 자들이 제법 많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힌두의 수행법과 간화선을 구분짓지 못하고 불교 수행의 이름으로 힌두수행을 하고 있다면 이 어찌 불조가 통탄할일이 아니겠는가? 힌두와 불교의 출발은 자아와 무아이다. 무아에 사무치지 않고서는 불교 수행이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선종의 소의경전인 우리의 금강경이 그것을 거듭 설하고 있지 않은가. 산냐는 극복해야하지만 性을 부정하면 허무주의가 된다고 한다면 저 힌두적 발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발제자는 금강경에서 4상․9상으로 정형화하여 척파하고 있는 이런 모든 존재론적인 발상을 깨끗이 쓸어버려야 비로소 간화선은 활발발하게 나아간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성 자성 법성 따위의 性이라는 산냐 하나 극복 못하면서 어찌 수처작주하고 살불살조한단 말인가?

생멸을 거듭하는 현상 뒤에 놓여있는 그 무엇을 사량하지말자. 그것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유(ayonoso manasikaara, 如理作意가 아님)요 사량분별의 실체이다. 그것을 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성이라는 이름으로 진아니 대아니 하는 이름으로 세우지 말자. 세우면 그것과 합일하려 몰입하게 되고 몰입하다가 지치면 그것에 대한 헌신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금강경은 이런 것을 척파하고 있다. 그러기에 최상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비불교적이고 비금강경적으로 불교를 가르치고 배우고 비불교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금강경결제에 임하면서 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