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6:34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이 정말 수승한가?

 

먼저 공덕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공덕은 산스끄리뜨 pun*ya(빠알리 pu~n~na)의 번역어이다. 사전에서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미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토대나 조건’, 혹은 ‘좋은 일을 행한 덕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공덕은 세 가지에 의해서 쌓인다고 한다. 그것은 보시(daana), 지계(siila), 수행(bhaavanaa=자기개발)이다. 그래서 본 경에서도 공덕은 항상 보시와 지계(유지계수복자)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공덕은 본경에서 항상 쌓는다(prasunoti)는 동사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공덕은 누가 주는 것이 아나고 스스로 보시 지계 자기개발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구경의 해탈에는 이르지 못한다할지라도 이 세 가지를 쌓음으로써 미래의 행복을 닦을 것을 특히 재가불자들의 신행의 중요한 덕목으로 초기불교부터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그리고 초기경에서는 이런 공덕을 닦는 복밭(福田, pun*ya-ksetra)으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사쌍팔배를 들고 있다. 이런 승가를 우리는 복전승이라 부른다. 승가는 세간의 복밭이 될 때 공양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불제자들의 신행의 출발은 이런 복을 닦는 행위 즉 보시와 지계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불교의 핵심인 육바라밀의 출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최상승을 표방하는 금강경의 산냐의 척파를 논의하는 것은 이런 보시와 지계와 자기개발의 탄탄한 기초위해서 행해져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은 자명하다하겠다.

본 경에서는 산냐를 초탈하라는 이 금강경의 구절을 수지독송하고 이해하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고 남에게 설해줄때 이를 法施(dhamma-daana)라고 하며 법구경 등의 초기경에서도 모든 보시가운데서 법보시가 최상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 공덕이 저 물질적인 보시[財施]의 공덕보다도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럼 문맥을 따라 살펴보자.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6장에서 이런 법문을 듣고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는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라고 부처님은 지혜로서 그들을 아시고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신다고 금강경의 공덕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신다. 이제 8장과 11장에서는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런 법문을 이해해서 남에게 설하는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께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가르치신다.


다시 12장과 15-3장에서는 천 인 아수라를 포함한 세계가 이 금강경을 설하는 지방을 탑묘처럼 여길 것이라고 하신다. 13장에서는 매일 매일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이 [많은] 몸들을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은 겁들 동안 바친다 하더라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설하는 공덕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다. 14-9에서는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라고 모든 부처님들이 수지독송하는 자들을 다 알아보신다고 한다.


이제 비유는 그 강도가 엄청나게 세어진다. 15-1에서는 이 금강경 법문을 듣고 비방하지만 않아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그와 같이 낮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저녁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며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백천만억 겁 동안 몸들을 바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하면, 참으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중생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영혼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개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의 서원을 가지지 않은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음에] 간직하거나 독송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다시 16-1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설명해주더라도 오히려 그들은 수모를 당하게 되고 아주 심한 모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 중생들은 전생에서 지은 나쁜 업들로 악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현금(現今)에서 그런 모욕을 받음으로 해서 전생에 지은 나쁜 업들이 소멸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한편 15-2장에서는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고, 최고로 수승한 승[最殊勝乘]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래는 이런 법문을 설했다.”고 했고 참으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으며 보살의 서원을 가지지 않은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음에] 간직하거나 독송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고서 다시 16-3에서는 내가 그 선남자나 선여인들이 그 때에 쌓고 얻게 될 그들의 공덕의 무더기를 모두 말한다면 중생들은 미치거나 마음이 광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참으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다고 여래는 설하였지만 이 [법문의]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공덕의 설명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저 인도 사상계를 보라. 무아를 설하고 자아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고 가르치는 불교를 두고 2천 5백여 년간 광기에 어린 비방과 비난을 얼마나 많이 퍼부어 왔는가. 예를 들면 후대로 오면서 불교가 인도를 떠나게 되자 뿌라나(Purān*a) 문헌들에서 부처님은 그들 비슈누 신의 9번째 화신이라고 적당히 받아들여 찬사를 보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말세인 깔리유가를 빨리 망하게 하고 정법시대를 빨리 실현시키기 위한 파멸의 가르침이니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고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참으로 마음이 광란한 소치이리라.

그들의 논지가 조금이라도 법답고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는 소리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모두가 무상의 법칙이 너무나도 잘 적용이 되는 육근과 육경에 바탕한 세간적인 지식과 판단 위에서 불교는 허무를 말하는 종교라는 대중의 무지를 선동하여 퍼붓고 있는 비방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겠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이처럼 큰 것은 8장에도 나타나듯이 부처님 세존들도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하기때문이다. 14-3은 불세존들께서는 일체의 산냐를 멀리 여읜 자들(이일체상 즉명제불)이라고 설하고 있다. 산냐가 산냐 아님을 알아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때 무상(無上)의 깨달음은 가능하며 그런 분들이야말로 부처님들이라는 말이다. 산냐를 여의라는 이 금강경의 말씀 때문에 제불세존들이 부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 금강경의 공덕은 한량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모든 부처님이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경에서 생겨났다고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교가 불교이고 부처님이 부처님인 것은 바로 이 산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인도 중원에서 당대에 최고의 경지라고 인정되던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까지 증득하시고도 이를 구경(究竟)이 아니라고 버리신 이유가 이들 경지는 아직 산냐에 걸려 있는 경지라고 지혜로써 간파하셨기 때문이다.

거듭 주장하지만 삼매=선정=사마타는 개념(빤냣띠=산냐)를 집중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 경지가 심심미묘하다 하더라도 미세한 개념(산냐)에 걸려 있는 것이어서 깨달음이 아니다.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까지버리신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6년간의 엄청난 고행을 하시는데 발제자는 그 고행을 하셨던 이유를 그런 엄청난 고행을 통해서 산냐를 극복해보려고 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행은 육체에 피로를 더할 뿐이고 마음을 혐오심 등에 머물게 할 뿐 결코 산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것까지 버리시고 이제 당신 스스로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김(sati)을 확립하셔서 초선에서 4선까지 새로운 선(禪)을 체험하시고 제4선에서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kha-sati-pārisuddhi, 捨念淸淨, 평온과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가 되어서 이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고 구경의 깨달음을, 저 고귀한 해탈열반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이니 그 독송의 공덕이 한없이 크다는 것이다.

위 인용에서 보았듯이 금강경은 금강경의 공덕이 많음을 다 설하면 중생은 미쳐버린다고 하지 않은가! 세상에 어떤 경문이 이보다 더 공덕의 수승함을 묘사한 구절이 있을까? 그러나 참으로 금강경을 수지독송만하는 것으로 공덕을 쌓게 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인중생수자로 대표되는 산냐를 척파하라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지혜로운 주의(여리작의)를 기울여서 실제로 산냐를 극복해낼 때 이와 같은 불가설불가설전의 무량공덕이 있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산냐를 극복하지는 못한다하더라 적어도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아인중생수자상을 없애라는 메시지 정도는 바르게 이해해야 그 공덕이 수승하다고 본다. 수지독송만해도 그 공덕이 무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구마라즙이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근원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하고[如理作意] 남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하는 구절을 전체 금강경에서 受持讀誦만으로 축약해서 옮겼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현장은 모두 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로 옮겼다.(아래 3번 쟁점의 문맥설명을 참조할 것)

자아가 있다, 우리 마음은 영원히 생사를 초월해있다, 생멸하는 현상계 배후에는 불생불멸의 진여자성이 있다라는 이런 산냐를 극복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이해해야 그 공덕이 실로 어마어마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공덕이 없다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엄청난 대사자후를 토하시는 경을 뜻은 모르더라도 독송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축자영감설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너희가 하면 축자영감설의 맹신자요 우리가 하면 무량공덕이라 한다면 억지스럽지 않은가.

이렇게 산냐를 극복할 것을 설한 이 경의 수승함을 금강경은 후반부로 오면서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이런 것을 강조하다 보니 산냐의 극복이라는 본뜻은 멀어지고 그냥 경을 독송하여 복덕을 모으는 데만 빠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현금(現今)의 한국불교에서의 금강경의 위치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후대불교 경전이나 논서들은 모두가 이념서적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인데 이런 의미에서 금강경의 이런 무량공덕에 대한 말씀은 신행생활을 관념화하고 이념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하겠다.

아무튼 16-3에서는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공덕의 무더기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일 공덕의 무더기가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설하시고 28에서는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공덕의 무더기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신다. 뜻은 모르고 독송만해도 공덕이 무량하든, 금강경의 근본 입장을 이해해야 공덕이 무량하든, 실제로 산냐를 척파해야 무량공덕이 되든 부처님께서는 경 전체에서 공덕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계신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