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6:36

업이란 무엇인가

 

업(業)이라는 말은 잘 알다시피 산스끄리뜨어 까르마(karma, Pāli. kamma)의 번역어로서 √kr*(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영어에서 do 동사의 의미가 아주 광범위하게 행위 일반을 나타내듯이 산스끄리뜨 등 인도어 일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까르마는 따라서 광범한 행위 일반을 나타낸다 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불교에서 전문 술어로 쓰이면 ‘의도적인 행위(cetana)’를 뜻한다.

증지부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하고서 업을 짓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써(cetanāham, bhikkhave, kammam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6. 63)
"라고 나타나는데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진 구문이다. 그래서 옛 중국의 역경사들이 보통의 행위 일반과 구분하기 위해서 業이라고 번역한 것 같기도 하다(이런 의미에서 사업 기업 학업 창업 업무 업종 작업 등등의 단어를 음미해보면 그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 같다. 물론 초기경에서 깜마라는 말 자체가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도하여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위하는 그 모두도 다 업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말로는 그냥 ‘의도적인 행위(cetana)’라고 간단히 추상적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이 의도라는 말 속에는 수없이 많은 깊거나 얕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조대하거나 미세한 우리의 모든 심적인 성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나는 몸과 말과 뜻의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겠다.

이 업의 특징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업은 강한 힘을 가진다 하겠다. 그래서 업력(kamma-vega)이라는 표현이 주석서에서부터 널리 쓰인다. 이 업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간단히 나의 존재나 삶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나 삶 혹은 생명은 바와(bhava, 有, becoming)로 표현되는데 이미 많이 설명한 대로 연기법에서 보면 애(愛, tan*hā), 취(取, upādāna), 즉 갈애와 취착의 소산이다.(연기의 앞의 과정은 생략함) 이 애와 취, 즉 갈애와 취착이야말로 우리가 순간순간 짓고 있는 의도적 행위, 즉 업의 가장 강력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리고 영어에서 바와[有]를 becoming 이라고 옮기고 있듯이 바와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갈애와 취착을 통해서 ‘되어가는’ 과정이고 이것이 우리 존재의 참 모습이다. 금생의 나의 모습만 봐도 40여 년 살아온 나의 모습은 매 찰나찰나 좋으면 갈구하여 취하고, 싫으면 혐오하여 물리치는 그런 성향을 무한히 되풀이한 결과가 아닌가.

탐욕, 욕심, 욕망, 갈구, 관능, 애욕, 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성취욕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엄청난 갈애의 에너지, 그리고 이런 것을 조장하는 사업(대기업 등에서 기업운영을 해나가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와 맞물려 소위 말하는 부가가치 등을 창출하려고 온갖 부추김의 수단을 다 발휘하는 현대 매스미디어 등등을 통한 엄청난 자극의 에너지, 그리고 분노, 증오, 격분, 저주, 파괴, 질투, 시샘, 폭력, 전쟁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혐오의 에너지, 이런 것이 바로 업이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엄청난 힘이라 하겠다. 물론 관용, 자비, 평화, 평온, 고요, 침착 등의 성향도 있다. 이러함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는 소위 말하는 나만의 개성, 인격, 습관, 성향을 쌓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업이나 유는 엄청난 되어감의 가속도를 가진 그런 존재인 것이다. 사실 업력(kamma-vega)이라 할 때 그 힘을 뜻하는 vega는 속력을 뜻하는 단어이다.(vega에 대해서는 14-1장 1번 주해 참조할 것) 힘은 엄청난 가속력을 가진 것이니까. 그래서 업이란 좀처럼 방향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성향과 가속도를 가져 탁류처럼 찰나찰나에 용틀임치며 흘러가는 그런 것이라 하겠다.

둘째, 이런 강력한 힘과 가속력을 가진 업은 당연히 그 결과를 수반한다. 이 결과가 소위 말하는 업보(業報, 業異熟, kamma-vipāka)이다. 이처럼 우리가 매 순간 순간에 짓는 엄청난 에너지 덩어리인 의도적 행위인 업은 당연히 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작용은 필히 반작용을 수반하는 것이지 않은가. 물론 그 업보가 다시 의도적 행위가 되면 그것은 또다시 업이 되고 업력이 되어서 다른 업보를 일으킨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엄청난 크기의 인도 반얀 나무의 씨앗은 조그만하다. 이 조그마한 씨앗이 엄청난 크기의 나무가 되고 그 나무는 다시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다시 엄청난 반얀 나무로 자라고…이렇게 업과 업보는 의도가 쉬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거듭 거듭 증가하는(multiply) 것이다.

셋째, 금생에만 봐도 매 순간순간에 행하는 의도적인 행위가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이 몇 천만억 가지나 되고 그래서 그 결과인 과보도 역시 몇 천만억 가지로 얽혀서 나타나고 그 결과는 역시 다시 하나의 인이 되어서 업력으로 작용하고…이렇게 앞뒤 서로서로 역동적으로 얽혀 있고 이 얽힘은 또 나 혼자만이 아니고 내 가족 친구 사회 국가 지구 우주 등등으로 얽혀 있고, 내 가족 친구 등등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 각각은 또 다시 서로 서로 얽혀드니 실로 이 우주가 다 관련되어 있다 하겠다. 참으로 중중무진인 것이다. 참으로 그래서 이 업은 불가설불가설이요, 우리의 헤아림으로는 도저히 다 측량할 수가 없다.

넷째, 우리의 의도는 크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는 선업(kusala-kamma)과 불선업(akusala-kamma)으로 부른다. 초기경 곳곳에 세존은 10선업을 권장하시고 10불선업을 금할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강조하고 계신다.(꾸살라아·꾸살라에 대해서는 6장 11번 주해 참조)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불선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지혜로운 주의(요니소 마나시까라)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요니소 마나시까라에 대해서는 위 쟁점3 참조)

다섯째,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사건을 두고 단세포적으로 그냥 과거의 업이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지혜로운 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정말 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챙겨서 참 지혜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업사상이 후대에서처럼 일종의 운명론으로 오해되어서 자포자기와 자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소지가 있다. 실제로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소지가 아주 많다 하겠다.

여섯째, 업에서 헤어나고 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정견을 확립하는 게 선결조건이고 이 정견을 바탕으로 한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4성제를 근본으로 하는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고 본 경에서 말하는 산냐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항상 지혜로운 주의(요니소 마나시까라)를 기울여 나가야 [악]업에서 헤어나고 마침내는 저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하겠다.

참고로 남방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업의 분류를 나열해본다.


업의 개요

I. 기능에 따라
⑴ 생산(janaka)업
⑵ 돕는(upatthambhaka)업
⑶ 방해(upapīḷka)업
⑷ 파괴(upaghātaka)업
II.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
⑴ 무거운(garuka) 업
⑵ [임종에] 다다라(āsanna) [지은] 업
⑶ 습관적인(ācin*n*a) 업
⑷ 이미 지은(kat*attā) 업
III.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⑴ 금생에 받는(dit*t*hadhammavedanīya) 업
⑵ 다음 생에 받는(upapajjavedanīya) 업
⑶ [세 번째 생부터] 끊임없이 받는(aparāpariyavedanīya) 업
⑷ 효력이 없는 업(ahosikamma)
IV.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따라
⑴ 해로운(akusala) 업
⑵ 욕계 유익한(kusala) 업
⑶ 색계 유익한 업
⑷ 무색계 유익한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