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6:39

불교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1. 신뢰/청정신/확신

 

한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eka-citta-prasādam, 6장): eka는 하나, citta는 마음 혹은 마음의 생각을 뜻한다. prasāda는 pra(앞으로)+√sad(to sit)의 명사로서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 청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구마라즙과 현장은 淨信으로 옮기고 있다. 빠알리어로는 pasāda인데 그 뜻은 산스끄리뜨와 같다 하겠다. 그런데 pasāda의 동사가 pasīdati(Sk. prasīdati)인데 일차적인 의미가 ‘가라앉다’, 그래서 ‘분명하게 되다’, ‘밝아지다’라는 의미가 있듯이 실제로 빠알리어에서는 얼굴 색깔이 환해지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이나 대상을 알아서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지고 차분하게 되고 하는 그런 의미가 pasāda에는 있다 하겠고 그래서 청정한 믿음이라는 뜻으로 불교경전들에서는 쓰이고 있다.

초기경에서는 믿음이라는 술어가 어떻게 나타나며 초기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는 것이 불교 신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초기경에서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⑴ saddhā(삿다, Sk. śraddhā, 슈랏다) ⑵ pasāda(빠사다, Sk. prasāda, 쁘라사다) ⑶ adhimokkha(아디목카, Sk. adhimokṣa, 아디목샤)의 세 가지가 있다 하겠다.

⑴ 먼저 일반적으로 한글로 믿음이라 할 수 있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śraddhā(Pāli. saddhā)이다. 이 단어는 전통적으로 śrad+√dhā(to put)로 분석한다. 서양의 범어 학자들에 의하면 슈라드는 심장, 가슴(heart)을 나타내는 명사로서 희랍이나 로마의 heart를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기원을 가진 단어로 보고 있다. 그래서 슈랏다는 ‘마음을, 자기 가슴을 무엇에다가 놓는 것’이라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인도에서도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슈랏다라는 단어는 우리말 믿음[信]이 여러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듯이 믿음에 관계되는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벌써 브라흐마나 문헌(제의서)에는 이 슈랏다가 공물의 신으로 인격화되어 나타나서 공물을 바치는 만큼 축복을 준다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기도 한다. 이렇듯이 인도 문헌에서는 슈랏다는 믿음에 관계된 모든 의미 즉 영어의 belief, faith, confidence, trust 등의 의미로 광범하게 쓰이고 있다고 하겠다.

초기불교에서도 이 용어가 받아들여져서 빠알리어에서는 삿다(saddhā)로 발음이 되고 있는데 이 삿다가 뜻하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술어가 빠알리 경전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불교의 거의 대부분의 술어들은 산스끄리뜨를 위시한 동시대의 언어를 차용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술어들은 동시대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통용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불교 특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용어는 그냥 전통적인 산스끄리뜨의 의미로서만 받아들여서는 아주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 발제자가 인도에서 공부할 때 베다나 클래식 산스끄리뜨에 정통한 바라문 선생님들이 불교용어를 그들 식으로 해석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불교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술어들이 불교 경전의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고 나타나는가 하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이 삿다라는 용어가 초기경에서는 “세존이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을 설하면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여래에 믿음을 가진다(tathāgate saddham pat*ilabhati)”라는 콘텍스트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의 삿다를 발제자는 우리말의 신뢰라는 용어에 해당된다고 보는데 서양의 학자들도 요즘은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하고 있다. 발제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생기는 신뢰감 그것이 초기불교에서 나타나는 삿다의 근본의미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이 신뢰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이 되는 덕목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할 때 신뢰가 없으면 단 몇 미터도 가지 못할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신뢰, 메이커에 대한 신뢰, 교통법규에 대한 신뢰, 그리해서 내가 빨간 신호등에서 정지했을 때 뒷사람과 충돌하지 않게 되리라는 신뢰, 파란 불이 켜져서 가면 옆의 차가 와서 충돌하지 않는다는 신뢰 등등 … 자동차가 한 순간 순간 움직이는 데는 이런 신뢰가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그러할 것이다. 좀 심한 말이 될 지도 모르지만 아내를 신뢰하지 못하면 매일 해주는 아내의 밥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독약을 넣었을지도 모르고(너무 심한 비유이지만) 등등 … 실로 이런 신뢰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제일 기본덕목이라 할 수 있다. 발제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삿다의 의미를 이런 신뢰라고 받아들인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모 아내 남편 자식에 대한 신뢰를 가지듯이 편안한 신뢰를 가지게 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첫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⑵ 두 번째로 초기경에 많이 나타나는 믿음에 관계된 술어가 바로 이 주에서 다루고 있는 빠사다(pasāda, Sk: prasāda)이다. 경에 나타나는 부처님과 관계된 용례를 한 번 들어보면 “우리는 스승에 대한 빠사다가 있다. 법에 대한 빠사다가 있다(satthari pasādo atthi, dhamme pasādo atthi).”라 든가 세존에 대한 빠사다가 있으면 굳이 [종교적인 의례의식으로] 목욕해야 할 때에 목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S55.30)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 역시 믿음을 나타내는 술어인데, 삿다와 구분해서 생각해본다면 신뢰를 가지거나 법(가르침)을 이해하고 사물을 바르게 판단해서 오는 마음의 편안함, 환희로움, 밝음, 분명함 그리고 이런 분명함에서 오는 의심이 없음, 마음의 편안함 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본 경의 이 부분에서도 이런 엄청난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여서 마음이 밝아지고 기뻐지고 편안해지고 환희심을 내는 그런 사람들의 내면의 상태를 이 쁘라사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고 구마라즙과 현장은 淨信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학자들은 淸淨信으로 번역하고 있다.

⑶ 아디목카(adhimokkha)를 살펴보면, 사전에는 ‘firm resolve, deter mination, decision’이라고 나타나고 있는데 ‘확신, 결단, 결심’을 뜻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신뢰(삿다)와 분명함(빠사다)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본 경에서도 이 아디목샤(adhimokṣa)라는 단어가 몇 번 나타나고 있고 구마라즙과 현장은 信解라고 옮기고 있다. 요즘 일본학자들도 그래서 신해라 옮기고 있다.(14-2장의 3번 주해와 15-2장 6번 주해 참조). 어원적인 의미에서 아디목카를 분석해보면 adhi(향하여)+√muc(to release)인데 목카는 산스끄리뜨 목샤(mokṣa)로서 다름 아닌 해탈을 뜻한다. 그래서 ‘해탈을 향함’이 그 기본의미가 되겠는데 불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불법승에 확신을 가짐은 다름이 아닌 해탈을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하겠다. 경에는 중부 제 111경에 단 한 번 나타나는데 초선(初禪)의 [善]법들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듯이 해탈 열반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반이라 하겠다.

이처럼 초기경에서는 믿음이 이런 세 가지 술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생기는 신뢰(삿다)와 법을 사유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생기는 편안함 즐거움 밝음 환희심 그래서 그런 법을 가르쳐주신 분에 대한 깨끗한 믿음(빠사다), 그래서 생기게 되는 확신, 흔들리지 않음, 확고부동함(아디목카)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겠다. 이런 믿음이 확립된 경지를 예류향 내지는 예류과(9-1장 주해 참조)라 하여 성자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우리가 꼭 음미해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서양종교 일반에서 말하는 절대자를 가설한 믿음은 불교 특히 초기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2. 비유

 

여러 불교 경전이나 논서에 등장하는 비유가 있다. 좀 각색해서 적어보자면,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주먹을 쥐고 신도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지금 내 주먹 속에는 엄청나게 값비싼 마니 보배구슬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제일 처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은 의심일 것이다. 정말 저 속에 엄청나게 비싼 보배가 있을까 하는 의심, 그러다가 몇몇 사람은 곧 ‘그래 저 분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으니까 정말일 거야’ 하는 소위 말하는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의심을 할 것인데 내가, 아니 내가 만든 무시무시한 폭력조직이 만일 칼이나 총을 들이대고 이것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목숨을 구하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을 표할 것이다. 무조건 믿~씁니다 할 것이다.

사실 일반 종교에서 절대자를 가설하고 제시하는 믿음은 이런 수준이라고 발제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이 없다. 그리고 설혹 신을 봤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아니고 내 육근(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대상일 뿐이고 육근이 변함에 따라 그 인식도 변하고 이 세상에 있는 대상이라는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니 그 신은 무상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폭력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신물나도록 보아온 것이 아닌가. 인간이, 내가, 혹은 우리 집단이 믿는 절대자나 신념이나 가치체계의 우월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남보다 우월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지에서 나온 소치이겠지만) 불행히도 폭력뿐인 것 같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성전(聖戰)을 빙자한 수많은 종교전쟁을 우리 인류는 목격해온 것이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런 유의 믿음을 서양에서는 belief라고 하는 것 같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절규가 바로 belief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주먹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그냥 믿을 수밖에 없는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belief의 문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본 자는 ‘본다, 보았다’고 말하지 ‘믿는다, 믿~씁니다’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총칼을 들이대고 믿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을 때 생기는 믿음을 발제자는 faith의 측면으로 보고 싶다. faith란 충성에 가까운 개념일텐데 군신이나 주종관계를 성립시키는 바탕이 faith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진심에서 나온 것이 faith이겠지만 좀 의문스러운 시각으로 그 심리현상을 관찰해본다면 아무래도 죽임이나 보복, 해코지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배경이 된 것이 이 faith일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신내린 무당이 강림한 신에 대해서 가지는 심리상태라고 말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그러니 절대자를 설정하는 모든 종교는 어쩌면 이런 faith가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구조를 갖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래서 절대자를 가설하는 종교는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be- lief와 모든 파워와 생사여탈권을 가졌다고 믿는 그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에 기인한 faith가 시작이요, 끝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반면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주먹을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고 그 주먹을 열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如實知見]’이다. 주먹을 펴 보이게 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명명백백히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belief나 faith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는 ‘와서 믿으라’는 가르침이 아니고 ‘와서 보라(ehipassika)’<<주: ehi는 ā([이곳을] 향하여)+√i(to go)의 명령형으로 ‘오라’는 뜻이요, passika는 √dr*ś(to see)의 명사형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는 가르침이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속지 않게 된다. 보아서 알게 되어 생기는 편안함, 즐거움, 가벼움, 밝음, 고요함, 그래서 생기는 확신, 이런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자나띠(jānāti, 안다)와 빳사띠(passati, 본다)라는 두 단어가 함께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이 두 단어가 합성해서 생긴 명사 냐나닷사나(~nān*a-dassana, 知見)라는 용어도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하겠다.

그러니 불자는 먼저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신뢰가 생기고(삿다), 내 삶에 적용시키면 편안함과 밝음이 생기고(빠사다), 그러면 태산부동의 확신(아디목카)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불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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