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6:40

법은 무엇인가 - 法尙應捨 何況非法

 

법은 산스끄리뜨 dharma(빠알리 dhamma)의 역어이다. 다르마(법)는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불교 문헌에서도 예외 없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우리 불교에서도 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와 이론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제자는 여기서 법에 대한[對法=abhi-dhamma] 이해를 그 존재이유로 삼는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설명하여 법의 개념을 이해하는 기초를 다듬어 볼까한다.

법(다르마, 담마)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빠알리 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앗타살리니』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ṇ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īvatā, 개념이 아닌 것) nissatta-nijjīvatā의 문자적인 뜻은 ‘삿따(중생, satta)도 아니고 영혼(jīva)도 아님’이다. 즉 중생이라는 개념(빤냣띠, paññatti)이나 영혼이라는 개념이 붙을 수 없는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paramattha)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념이 아닌 것’으로 옮겼다.
<<주: 궁극적 실재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2의 해설을, 개념은 8장 §29를 참조할 것.>>
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⑴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⑵ 물․심의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기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은 ‘다르마빠리야야(dharma-paryāya)’로 부르는데 ‘법문(法門)’이라 한역하였다.

⑴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법문(法門)을 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에서 法門이라 번역한 원어는 빠알리어로 담마 빠리야야(dhamma-pariyāya) V.i.40; D1/i.46; M5/i.32 등.
인데 빠리야야는 다른 말로 ‘방편’이라고도 번역되었듯이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설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초기경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나는 것[施․戒․生天]<<dānakatham sīlakatham saggakatham.(D1/i.3; M1/i.56 등)>>
을 설하셨고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이거나 높거나 낮은 단계의 수많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거나 오해하고 호도할 우려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제자들 사이에서 아주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있어왔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아비담마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이해정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붙이지 않고 설한 가르침이 아비담마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빠리야야(방편)가 아닌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비방편설)’라고 논장의 주석서들에서는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abhidhammakathā pana nippariyāyadesanā.(DhsA.222)>>

그래서 붓다고사 스님은 ‘뛰어난 법과 특별한 법’으로 아비담마를 정의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승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부처님께서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제일 먼저 천상의 신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라고 신화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⑵ 물․심의 여러 현상을 법이라 한다고 했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더욱더 정확하게 정의한다. 가장 잘 알려진 법에 대한 정의가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에 나타난다. 붓다고사 스님은 ‘자신의 본성(사바와, sabhāva, 고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이라 한다(attano pana sabhāvam dhārentī ti dhammā.--DhsA.39)'고 정의하고 있는데 법에 대한 정의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에 대해서 아난다 스님은 ‘전도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본성이다’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sabhāvo ti aviparītatā vijjamānatā, saha bhāvena sabhāvo.(DhsMT.25)>>

이것을 종합하면 본성(sabhāva)이란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성질’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법(dhamma)은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최소 단위로 하나의 마음(citta), 52가지 마음부수(cetasika), 18가지 물질(rūpa), 하나의 열반으로 모두 72가지를 들고 있다.<<28가지 물질 가운데서 10가지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은 최소단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72가지 구경법에 대해서는 6장 §4 해설 참조.>>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은 개념(빤냣띠, paññatti)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닌 것이다.

물론 법(dhamma)이란 의미를 광의로 해석하면 이런 모든 개념(paññatti)들도 모두 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최소단위로서의 법은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paramattha, 빠라맛타)’으로 강조해서 부른다. 그러나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구경법을 뜻한다.

아비담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런 궁극적 실재들이야말로 이 모든 세상 즉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부터 출세간의 경지에까지 항상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이다. 존재를 이런 최소의 단위, 구극의 단위로 분해하고 분석하고 해체하여(vibhajja)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고 설하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는 빤냣띠(개념)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 궁극적 실재인 법(dhamma)들의 특징과 역할 등을 분석하여 규명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인연취산(因緣聚散)을 거듭하고 있는지에 더 중점을 둔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근본적인 관심이다.

 

법을 궁극적 실재라고 하면 혹자는 “그것은 제법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사상과 상치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 아비담마에서는 고유한 특징(sabhāva-lakkhan*a)과 보편적 특징(sāma~n~na-lakkhan*a) 두 가지 측면으로 법을 고찰한다.

각각의 법들은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무상․고․무아라는 보편적인 특징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열반은 형성된 것(san#khata)이 아니므로 무상과 고를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아는 그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라고 표현하며 “모든 법들은 자아가 없다[諸法無我]”라고 무아를 가르치고 있다.<<sabbe san#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M35/i.228)>>
이 諸法(sabbe dhammā)에는 열반도 포함된다.<<Rahula, Walpola, 57-58 참조할 것.>>

열반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된 경지라서 이런 모든 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라고 한다 하여 불변하는 어떤 존재론적인 특정한 것을 상정하려든다면 이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빠라맛타(paramattha)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나’ 밖에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에서부터 부처님께서는 dhamma를 제 육근인 마노(mano, 意)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계신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능[前五根]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현상일지라도 사실 마노(mano, 意)가 없으면 판독불능이고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겠다.

일단 전오식(前五識)에 의해서 파악된 외부의 세계도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즉시에 마노의 대상인 dhamma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외부세계도 일단 나의 대상이 되어 내 안에 받아들여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외부물질을 다섯 감각기능[根]들의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름도 고짜라(gocara)라고 붙이고 있는 것이다. 고짜라는 소(go)가 풀을 뜯기 위해서 다니는(cara) 영역이나 구역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알음알이[前五識]가 움직이고 다니고 의지하는 영역이라는 말이다. 대상이란 보는 것 등의 기능[根]이나 그런 알음알이[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술어라 하겠다.

이처럼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강조해서 말하는 법(dhamma)이다. 발제자는 이렇게 법을 내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불교를 이해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런 제일 중요한 측면을 놓쳐 버리면 법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인 법에 대해서 배우고 사유하고 고뇌하고 찾아내어 이를 바탕으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튼튼한 기초를 다져야 하거늘 오히려 법은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저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래서 밖으로만 신심을 내어서 무언가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가 잘 안되면 법은 그냥 불교지식이나 불교상식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매찰나를 법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법을 내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비법에 온갖 관심을 쏟아 붓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법(dhamma)을 이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부처님 가르침(Dhamma) 역시 의미를 잃고 만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Dhamma)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으로 법은 오직 하나의 의미뿐이다.

이런 부처님 말씀을 골수에 새기고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dhamma)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사유하여 무상․고․무아인 법의 특상을 여실히 알아서 괴로움을 끝내고 不死(열반)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그리고 초기경에 담마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중요한 술어가 dit*t*he vā dhamme(딧테 와 담메)이다. 직역하면 ‘보여진 현상(법)에서’이고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의역된다. 본 금강경에서도 dr*s*t*e eva dharme(16-1장)로 나타나고 현장은 以現法中으로 옮기고 있다. 부처님의 관심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심의 현상임을 이 술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 금강경 6장에는 “법문이란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깊게 아는 자들은 법들도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들이 아닌 것임에랴(kolopamam dharma-paryāyam ājānadbhir dharmā eva prahātavyāh* prāg eva adharmā, 法尙應捨 何況非法)”라는 구문이 나타난다. 이와 동일한 빠알리어 구문이 중부 제 22경(Alagaddūpama-sutta)에 다음과 같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 비구들이여, 설해진 법은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깊게 아는 자들은, 법들도 역시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들이 아닌 것임에랴.”<<kullūpamam vo bhikkhave dhammam desitam ājānantehi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여기서 본 경의 산스끄리뜨본과 빠알리어본의 주 차이점은 산스끄리뜨 본에서는 ‘다르마빠리야야(dharma-paryāya)’로 ‘부처님의 법문’으로 표현되었고 빠알리어본에서는 ‘담맘 데시땀’으로 ‘설해진 법’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이 중부 제 22 Alagaddūpamasutta(M22, 뱀의 비유경)는 아주 중요한 경 중의 하나이다. 독수리 사냥꾼의 아들이었던 아랏타라는 비구가 삿된 견해를 주장하자 세존께서 이를 책망하시면서 뱀의 비유와 이 뗏목의 비유를 설하시고서 6가지 잘못 된 견해를 척파하고 계신다.

어쨌든 비법을 이미 버렸고 법을 따라 수행을 했으면 법에도 집착을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하신 말씀이다. 아·인·중생·수자의 네 가지 산냐에 집착하지 말 것을 거듭 설하고 법상(法相, 다르마산냐)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잘 설해진 부처님의 법이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하나의 산냐 즉 관념, 이념, 인식으로 이해되고 있어서 부처님께서 직접 이런 산냐를 가지지 말고 버리라고 고구정녕히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26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법에 대한 거창한 산냐를 세우고 집착하여 서로 다투고 비난하고 매도하고 싸우는 것은 그 뿌리가 참으로 깊다고 하겠다.

산냐가 있으면 그것을 국집하고(grāha) 그것을 법으로 진리로 세우게 된다(dr*s*t*i, 見). 다시 말하면 산냐가 자리잡게 되면 그것은 강한 의도(sankhāra, 상카라, 行)를 수반하게 된다. 그래서 그 진리, 그 신(神)을 수호하기 위해서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인류는 얼마나 많은 폭력을 휘둘러 왔으며 지금도 얼마나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우리 불교에서는 법은 사라져버리고 비법이 난무하는 것 같아서 이제 정말 법이 무엇인지, 정말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설하셨는지 초기 부처님의 생생하신 가르침을 찾아서 온갖 힘을 다 모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법을 법상(산냐)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법을 법 그 자체로 내 삶의 현장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겠다.

발제자가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법이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이든 물심의 현상(dhamma)이든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내 삶 속에서 매순간 확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면 법은 모두 법이라는 산냐가 되어버리고 만다. 발제자는 이렇게 ‘지금 여기(현법)’ 내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현상)을 관찰하고 확인 것이야말로 산냐를 척파하고 산냐를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부 143경 등에서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
atītam nānvāgameyya, nappat*ikankhe anāgatam
yad atītam pahīnan tam, appatta~n ca anāgatam
paccuppanna~n ca yo dhammam, tattha tattha vipassati.

고 강조하신다. 여기서 ‘통찰하라’로 옮긴 원문은 다름 아닌 위빳사띠(vipassati)인데 위빳사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면 산냐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매순간 통찰지가 현현하는 것이야말로 隨處作主 殺佛殺祖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초기경에 나타나는 법의 정형구를 소개한다.

“세존에 의해 ⑴ 법이 잘 설해졌고, ⑵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⑶ 시간을 넘어섰고, ⑷ 와서 보라는 것이고, ⑸ 향상으로 인도하고, ⑹ 지자들이 직접 알아야 하는 것이다(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t*t*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m veditabbo vi~n~nūhī ti. - M7/i.37 등)”

다음은 위 정형구에 대한 주석을 하고 있는『청정도론』VII장 68-88의 요약이다. 아래 인용은 청정도론의 번역작업을 진행중인 대림스님이 제공한 자료에 의거했음을 밝힌다. 자료를 제공해 준 대림스님께 감사드린다.

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고, 뜻과 문장을 가지며 완전히 원만하고 두루 청정한 범행을 설명하기 때문에 우선 교법이 잘 설해졌다.

⑵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는 것은 성스러운 도는 우선 자신의 상속(삶의 흐름)에서 탐욕 등을 없애는 성인에 의해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들었고, 압도되었고, 전도된 마음[을 가진 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둘 모두 괴롭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슬픔을 겪는다. 그러나 탐욕을 버렸을 때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으며, 둘 모두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는다. 정신적인 고통을 겪지도 않고 슬픔도 겪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법은 스스로 보아 알아야한다.”

⑶ 자신의 과보를 주는데 대해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넘어섰다. 5일이나 7일 등의 시간을 경과하지 않고 과보를 준다. 자신이 일어나는 즉시에 과위를 준다는 뜻을 설했다.

⑷ '와서 이 법을 보라'라고 이와 같이 ‘와서 보라’고 초대 할만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초대할 만한가? 실재하기 때문이고 청정하기 때문이다. (주석서: 궁극적인 뜻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전적으로 오염의 더러움이 없어 청정하기 때문이다) 빈주먹에 금화나 혹은 황금이 있다고 말하여도 ‘와서 이것을 보라’고 말할 수 없다. 무슨 이유인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변이나 대변이 설령 있다하더라도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면서 마음을 흡족케 하기 위해 ‘와서 이것을 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풀이나 나뭇잎으로 가려져야만 할 것이다. 무슨 이유인가? 더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본성에 따라 존재하고 구름 없는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보름달처럼, 황색의 장식용의 돌 위에 놓인 보석처럼 청정하다. 그러므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청정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초대할 만하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것이다.

⑸ 인도할 만하기 때문에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자기의 옷이나 혹은 머리가 불타는 것도 상관치 않고 오직 수행으로서 자기의 마음에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서 증득할만하다는 뜻이다.

⑹ 지자들이 직접 알 수 있다. 예리한 지자 등 모든 지자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나는 도를 닦았고, 과를 얻었고, 열반을 증득했다’라고. 스승이 도를 닦을 때 제자의 오염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스승이 과를 증득했다해서 제자가 편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 증득한 열반을 그가 증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인의 머리에 놓여 있는 장식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경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