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12. 17:03

사성제(네가지 성스러운 진리)

 

<순서>

(한 움큼의 나뭇잎)

 

 머리말

 서문

 첫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과 자아라는 견해

   괴로움의 부정

   윤리와 동정

   괴로움의 조사

   즐거움과 즐겁지 않음

   현 상황의 통찰

 

 두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

   3가지 욕망

   집착이 괴로움이다

   놓음

   성취

 

 세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

   무상의 진리

   피할수 없는 죽음과 소멸

   대상이 일어나는 대로 놓아둠

   깨달음

 

 네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

   올바른 이해

   올바른 욕구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마음챙김, 올바른 마음집중

 집중

 수행의 여러국면

 이성과 감성

 있는 그대로의 대상들

 조화

 실상을 바라보는 가르침으로써 팔정도

 

한 움큼의 나뭇잎

부처님께서 심사파나무숲에 둘러싸인 코삼비에 머물러 계실 때 어느날,

부처님께서 나뭇잎 몇잎을 집어들고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이여, 나의 손에 올려져 있는 나뭇잎이 많은가?

아니면 숲속의 나뭇잎이 많은가?”

‘부처님이 들고계신 나뭇잎보다 숲속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많습니다. 부처님’

‘역시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알고있는 직관적 지혜는 매우 많으나 비구들에게 설한 지혜는 훨씬 적다.

내가 왜 그들에게 모두 설하지 않았는가?

모두 설하는 것이 이익을 주지 않고, 성스러운 삶이 향상되도록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 설하는 것이 욕망의 소멸로, 사라짐으로, 멈춤으로, 없어짐으로, 직관적 지혜로,

깨달음으로, 닙바나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리고, 내가 무었을 설하였는가?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다.

이것들이 내가 설한 전부이다

왜 내가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이익을 주고, 성스러운 삶이 향상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욕망의 소멸로, 사라짐으로, 멈춤으로, 없어짐으로,

직관적 지혜로, 깨달음으로, 닙바나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할 일은 이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다.’

[Samyutta Nikaya, LVI, 31]

 

 

 

머리말

이 글은 아잔 수메도께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인류의 불행은 정신적 계발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에 대해 법문한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법문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에 관한 것입이다.

사성제는 BC 528년에 바라나시 근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처음 설하여졌고,

이 사성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교계에 생생하게 살아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잔 수메도는 테라와다 불교의 비구입니다.

그는 1966년에 태국 왓 파뽕에서 아잔 차 스님으로 부터 비구계를 받고

그곳에서 10년간 수행을 했고, 현재는 영국 '마라바티 불교 수행처'를 이끌고 있으며,

많은 비구, 넌(여자 출가자) 그리고 일반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서문

나와 비구들이 긴여정의 걸음을 같이 걸어 온 이유는,

네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이하 사성제라 함)를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고 꿰뚫어 통찰하려는 것이다.

무엇이 네가지인가?

그것은 바로 “사성제” 즉,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 이다,

[Digha Nikaya, Sutta 16]

 

부처님의 사성제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는 초전법륜경은

제가 오랬동안 사용해온 중심적인 경전입니다.

타일랜드에 있는 내가 있던 수행처(왓 나나차)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經 입니다.

테라와다 계통에서는 이 경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로 간주합니다.

이 경 하나에 법(Dhamma)을 이해하는데에 또한 깨달음을 얻는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나서 처음 설하신 법으로 간주되지만,

가끔씩 저는 부처님이 바라나시로 가던 중 만났던 한 고행자에게 설하신 것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 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 법은 너무나 미묘하고 심오한 법이다.

내가 깨달은 것을 말로써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침을 펴기보다,

그냥 남은 생을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보낼 것이다”.

 

나에게는 이러한 부처님의 생각이 매우 유혹적이라 생각됩니다.

어딘가로 떠나서 혼자 지내며 속세의 여러 문제들과 대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때

힌두교의 창조주인 브라흐마 사함빠띠(Brahma Sahampati)가 부처님에게 다가가,

그래도 세속에 가서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브라흐마 사함빠띠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즉 눈에 약간의 먼지만이 묻어있는 그래도 청정한 사람이 있다고 부처님을 설득하였습니다.

대 자애심과 연민심으로 부처님은 눈에 약간의 먼지만이 묻어 있는 사람을 위해서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이 모든 중생들을 구제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생각하셨음을 저는 확신 합니다.

 

브라흐마 사함빠띠의 방문 후에 부처님이 붓다 가야에서 바라나시로 가실 때

부처님의 눈부신 외모에 감명을 받은 한 고행자를 만났을때,

“당신이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그 고행자가 묻자, 부처님은

“나는 완벽하게 깨달은 자이며, 아라한이며, 부처님이다”라고 하셨읍니다.

 

나는 이것이 부처님의 첫번째 설법이라고 간주합니다.

그 설법은 성공하지 못했지요.

이유는 그 수행자는 부처님이 너무 힘들게 수행을 하여서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면 우리도 비슷하게 반응할 것 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내가 “나는 완벽하게 깨달은 자이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실제로는, 부처님의 설법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합니다.

완전한 가르침입니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잘못 이해하는 습성이 있고, 그러한 가르침이 자아(ego)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항상 모든 것을 자신의 자아를 통해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완벽하게 깨달은 자이다”라는 말은 자아도취적(egotistical)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매우 순수하고도 탁월한 말이 아닙니까? 

“나는 붓다이다. 나는 완벽하게 깨달은 자이다”라는 선언을 잘 생각해보면 흥미롭습니다.

왜냐면 “나는”이라는 말이 최상의 도달 또는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쨓든 부처님의 첫번째 가르침은 듣는자가 이해를 못했고 가버린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   **   **

후에 부처님은 바라나시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전에 함께 고행하던 다섯 동료를 만났습니다.

다섯 명 모두는 전심으로 엄격한 고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전에 부처님께서 수행이 해이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처님에게 환멸을 느꼈었습니다.

깨닫기 전 시절에 부처님은 엄격한 고행으로는 결코 깨달음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고행을 통한 수행을 중단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다섯명은 부처님이 편해지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부처님이 우유죽을 드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우유죽은 요즈음의 아이스크림을 먹는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당신이 고행자인데 어떤 스님이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 스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것 입니다.

왜냐면 당신은 스님들은 쐐기풀 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고행생활을 사랑하는데, 제가 아이스크림 한 접시를 먹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더 이상 아잔 수메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인상적인 고행 행위에 대해 존경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나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을 기회와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다섯 수행자가 바라나시에 있는 사슴동산에 계신 부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처음에는 ‘우리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안다.

그에 대해 신경쓰지 말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가오자 그들은 부처님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부처님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고, 부처님은 사성제에 대해 설법하셨습니다.

 

이번에는‘나는 깨달은 자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대신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부처님의 예리한 설법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식의 행위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나는 깨달은 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부정이나 긍정 중 택일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 있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해서

곰곰이 생각할 무엇인가를 제공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성찰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깨달은 자이다’, 우리는 논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말로 깨달았을까?’…’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논쟁만 합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가르침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확실히 부처님은 눈에 먼지가 많이 낀 사람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셨으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두번 째에야 부처님은 사성제라는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   **   **

사성제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근원이 있다

괴로움의 멈춤이 있다 괴로움의 멈춤으로  가는 길이 있다 - 이길은 팔정도입니다.

각 진리는 3가지의 국면이 있어 모두 12가지의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아라한, 깨달은 자’는 이들 3가지 국면과 12가지 통찰로서

사성제를 명백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아라한’은 진리를 이해하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진리’라는 것은 주로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사성제에서 ‘괴로움이 있다’는 첫 번째 통찰입니다.

'통찰'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굉장한 그 무엇으로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통찰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괴롭다. 나는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수행도 하고, 그리고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처로 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 괴롭고,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괴로움을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첫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나//는 괴롭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끝내고 싶다.’ 

통찰은 이것입니다, ‘괴로움이 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느끼고 있는 아픔과 번민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것’이라는 견지에서가 아니고,

‘이 괴로움이 있다, 이 //괴로운 느낌(dukkha)//’이라고 실상을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려면 ‘부처님께서 법(Dhamma)을 보고 계시는’것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실상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통찰이라는 것은 괴로움을 개인화하지 않고,

‘이 괴로움이 있다’라고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중요한 통찰입니다.

즉, 정신적 번뇌 또는 육체적 아픔으로 보고,

그리고 그것을 개인적인 불행으로서가 아니고 단지 //괴로운 느낌//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 즉, 그것을 //괴로운 느낌//으로만 보아야지,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두 번째 통찰은

 ‘괴로움을 이해하여야 한다.’

두 번째 통찰 또는 성스러운 진리의 각 국면들은 단어 ’하여야 한다(should)’가 들어갑니다.

‘그것은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 통찰은 //괴로운 느낌(dukkha)//은 이해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괴로운 느낌(dukkha)//을 이해하여야지, 단지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해(understanding)’라는 단어는 ‘참다(standing under)’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상식적인 단어이지만, 빨리語에서의 ‘이해’는 진실로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괴로움을 참고, 괴로움을 껴안는다는 뜻이지, 괴로움에 단지 반응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떠한 형태의 괴로움이 있을 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는 항상 그 괴로움에 즉각 반응합니다.

그러나 이해를 하게 되면 실제의 괴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받아들이고, 붙잡아, 껴안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국면은 ‘괴로움을 이해하여야 한다’ 입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진리에 대한 세 번째 국면은‘괴로움을 이해했다’입니다.

당신이 괴로움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알고, 있는 그대로의 성품대로 놓아둡니다.

그때 세 번째 국면이 ‘괴로움을 이해했다’또는‘괴로운 느낌(Dukkha)을 이해했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세가지 국면입니다.

즉,‘괴로움이 있다’‘괴로움을 이해하여야 한다’‘괴로움을 이해했다’

 

**   **   **

이것이 각 성스러운 진리들에 대한 3가지 국면의 패턴입니다.

‘선언’, '처방' 그리고 ‘수행의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語로 본다면, //pariyatti//, //patipatti// 그리고 //pativedha// 입니다.

  //pariyatti//는 이론이나 선언입니다 - 즉, ‘괴로움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Patipatti/는 실제의 수행입니다.

  //pativedha//는 수행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실상을 반영한 형태(reflective pattern) 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실제로 실상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마음을 계발합니다.

부처님의 마음도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성제를 우리의 마음 계발에 이용합니다.

우리의 일상사에, 통상의 집착에, 강박관념에 사성제를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통찰력을 얻기 위해 이러한 진리를 사용하여 우리의 집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소멸, 즉 괴로움의 끝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팔정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팔정도가 완전히 성숙 되었을 때, 그는 아라한이고, 그는 해낸 것 입니다.

네가지 진리, 세가지 국면, 12가지 통찰 등 이러한 말이 복잡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순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괴로움과 괴롭지 않은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도구’입니다.

 

불교계에서 사성제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승려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 아..! 사성제..! - 초보자용!’

그리고 그들은 모든 종류의 위빠싸나 방법을 총동원하여,

성스러운 진리에 이르기도 전에 16단계에 완전히 빠져 헤어나오지도 못하게 됩니다.

진실로 심오한 이 가르침이 불교계에서도 초기불교라고 무시하는 것을 볼 때 꽤 혼란스럽게 보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용, 초보자용이다. 보다 발전된 방법은 이러 이러 .…하다....’

그들은 복잡한 이론과 사상에 빠져들어가게 되어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잊어버립니다.

 

사성제는 일생동안 내내 실상을 여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단지 사성제, 3가지 국면, 12단계를 알고, 단 한번의 수행처에서 아라한이 되어,

//그리고 나서// 좀더 더 나아갈 무엇인가로 계속 추구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성제는 이렇듯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성제는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하고, 일생동안을 따라다니는 시험인 것입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인가? 태어남이 괴로움이요,

늙음이 괴로움이요, 병듦이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이 괴로움이요, 원하는 것을 얻지못함도 괴로움이다.

요약하면 집착으로 인한 이 몸(오온)자체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이것은 내가 전에 듣지 못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 안에서 일어난 견해, 통찰, 지혜, 앎 그리고 밝은 식견이다.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서 이 성스러운 진리를 꿰뚫어 알아야한다.

이것은 내가 전에 듣지 못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 안에서 일어난 견해, 통찰, 지혜, 앎 그리고 밝은 식견이다.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서 이 성스러운 진리를 꿰뚫어 알았다.

이것은 내가 전에 듣지 못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 안에서 일어난 견해, 통찰, 지혜, 앎 그리고 밝은 식견이다.

[Samyutta Nikaya LVI, 11]

 

3가지 국면과 함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dukkha)이 있다.

  //dukkha//를 이해하여야 한다.

  //dukkha//를 이해하였다.” 

 

기억하기 용이하게 간단한 공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솜씨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과거, 현재, 미래와 그리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에 적용됩니다.

 

괴로움(dukkda)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굴레입니다.

모든 사람들 어디에서나 괴롭습니다.

인간은 먼 옛날에도, 인도에서도 괴롭습니다.

현대 영국에서도 괴롭습니다. 미래에도 인간은 또한 괴로울 것입니다.

우리와 엘리자베스여왕과 공통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 우리는 괴롭습니다. 체어링 크로스(런던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우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은 가장 큰 특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부터,

가장 절망적이고 특권이 없는 인간들까지 모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사이의 모든 범주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괴롭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 모두가 가지고 있는 굴레이고,

우리 모두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에게 처한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땐,

동정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이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리고 정치와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면 싸움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십년 전 런던에서 필름을 본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 국민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필름이었습니다.

아기와 함께 있는 러시아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소풍 나가는 러시아 남자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사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보여준 것은 여느 때와는 달랐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서방의 선전이 러시아 사람을 커다란 괴물이나,

냉혈한, 파충류 인간인양 조작하여서

- 그래서 당신은 결코 그들을 인간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들을 죽이길 원한다면, 그런 방법으로 조작하여야 합니다.

그들도 당신과 같이 괴로움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느 누구도 쉽게 죽이질 못합니다.

당신은 그들이 냉혈한이고, 부도덕하고, 가치 없고, 사악하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낫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악이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게 된다면,

당신이 그들을 향해 폭격을 한다든지 기관총 사격을 해도

정당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괴로움이라는 우리의 공통의 굴레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러한 행위를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음울한 형이상학적 발언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형이상학적 사조와 실상이 반영된

신성한 진리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주목 하십시오.

신성한 진리는 실상이 여실히 반영된 진리입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인들이 불교의 형이상학적 진리의 한 종류로서

이 성스러운 진리를 해석하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워진 이유입니다.

- 그러나,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당신은 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괴로움이 소멸되는 길)

때문에 절대적인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적 괴로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집어 들고서

‘부처님께서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빨리語 //dukkha//는

“만족할 수 없는’ 또는 “어떤 것을 참거나 견딜 수 없는” 을 의미 합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여,

우리를 진실로 충족시킬 수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감각적 세계는 이와 같습니다.

즉, 본래 성질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감각기관이 닿아있는 세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다면 비참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계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dukkha//에 눈을 뜨게 되면,

빠져나갈 길을 찾기 시작하게 되어,

결국 우리는 감각적 인식 안에 더 이상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괴로움과 자아라는 견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의 경구를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주 명쾌한 문구입니다. ‘괴로움이 있다’입니다.

‘내가 괴롭다’가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그와 같은 실상을 여실하게 안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괴로움’을

‘나는 진짜로 괴롭다. 매우 괴롭다. 나는 괴롭고 싶지 않다.”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이 조건 지워져 있는 방식입니다.

 

“나는 괴롭다”는

“나는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는 한 개체이며, 이 괴로움은 나의 것이다,

나는 일생동안 많은 괴로움을 당해왔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나서 한사람의 자아와 기억으로 점철된 일생의 전 과정은 끝납니다.

당신은 기억합니다.

당신이 아기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었고, 또한 어떤 일이….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괴로움이 있다’로 볼 때,

더 이상 개인적 괴로움이 아닙니다.

“아! 불쌍한 나,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워야하는가?

내가 이렇게 괴로움을 받아야 할 무슨 짓을 했는가?

왜 나는 늙어야만 하는가?

왜 나는 슬프고, 아프고, 우울하고, 낙담하여야 하는가?

이것은 불공평하다!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행복과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지는 사물을 복잡하게 만들고 개인적인 문제로 만듭니다.

 

괴로움을 놓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교수행에서 ‘허용’은

“내가 괴롭다”가 아니고 “괴로움이 현재 있다”라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와 동일시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낸다.

어떻게 화를 제거할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잠재적으로 있는 자아의식을 촉발시켜

어떤 문제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매우 혼란스럽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문제 혹은 나의 생각이라고 하게 되면,

우리들은 매우 쉽게 자신을 억압한다거나,

문제에 대해 판단한다거나,

스스로를 비판하게 됩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관찰하고, 바라보고, 이해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고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이 ‘혼란스러운 느낌이 있다’,

‘탐욕과 분노가 있다’라고 단순하게 인정할 때,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품성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잠재의식적인 억측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 적어도, 그러한 억측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개인적인 결함이라고 집착하지 말고,

이러한 조건들은 영원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고,

자아가 없음을 성찰하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대상이 있는 그대로를 투영하고,  바라보십시오. 

‘나의 문제이다’라고 삶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 경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하고 그대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그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와 같이 잘못된 억측을 가지고 계속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영원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고, 자아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있다”라는 표현은

“요즈음 행복하지 않는 어떤 느낌이 있다”를

매우 명쾌하고, 정확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심한 정신적 고통과 절망부터 약간 화내는 상태 사이의 모든 상태를 포괄합니다.

dukkha는 반드시 극심한 괴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처참한 생활을 한다든지,

아우쉬비츠나 벨셀에서 살아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여왕도 “괴로움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왕이 커다란 정신적 고통의 순간과 낙담 또는

적어도 짜증스런 순간이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감각의 세계에 있으면 민감하게 됩니다.

이 말은 당신이 즐거움과 고통,

그리고 윤회의 이중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어떤 것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고,

그리고 몸과 감각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집어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각의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고, 생겨남의 결과입니다.

 

괴로움을 부정함

 

괴로움에 대해 우리는 항상 알고자 원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바로 제거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불편하거나 성가시게 되면,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바로 제거하려거나 억압하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가 왜 쾌락과 즐거움을

- 새롭고, 자극적이고, 낭만적인 것- 추구하는데 빠져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과 젊음의 즐거움만을 강조하고, 인생의 추한 측면

-노령, 병, 지루함, 낙심, 우울- 은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쳐서 좋아하는 것으로 향하려 합니다.

따분하게 되면 흥미 있는 대상을 찾아갑니다.

위협을 느끼면 안전한 어떤 것을 찾으려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순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집착하고 쫒아버리게 되는 쾌락/고통의 법칙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충만하지 못하고 수용적이 아닐 때, 마음은 선택적이 됩니다.

즉, 좋아하는 것은 선택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억압하려 합니다.

우리의 경험 중 대부분은 억압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관련된 많은 부분은

어떤 점에서는 즐겁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즐겁지 않은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도망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있으면 “죽여버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정부에서 취하는 조치를 보면 명백해집니다.

우리나라로 도망쳐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 … 두려움, 아닙니까?

- 왜냐면 그들은 매우 무지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마음은 몰살을 생각 합니다.

‘모기가 있네 죽여!’,

온통 방이 개미들로 꽉 차있네 모기킬러를 뿌려!’

영국에 Rent-o-Kil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나는 그 회사가 영국 마피아인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회사는 해충을 전문적으로 죽입니다.

- 그러나, 당신은 단어 ‘해충’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길 원합니다.

 

 

윤리와 동정

 

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의도적인 살생을 삼가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본성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게 방해가 되면, 그것을 죽여!

당신은 동물의 세계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꽤나 약탈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끊임없는 대량 살륙과 자기와 다른 인종에 대한

온갖 종류의 불법행위에 대한 정당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동물들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근본적인 무지’,

즉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은 모두 죽여 버리려는 인간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을 바라봄으로써, 그러한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바로 우리의 본능적인 동물적 행동 패턴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벌이 무서워 살인을 두려워해서,

법을 지키는 사회의 꼭두각시는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진실로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의 삶에 대해 존경합니다.

심지어 벌레나 우리가 싫어하는 생명체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누구도 모기나 개미를 좋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실상에 대한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은 ‘살충제가 어디에 있나?’라는 반응이 아닙니다.

또한 나는 개미가 나의 마루바닥을 기어올라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의 첫 번 째 반응은 ‘살충제가 어디에 있나?’입니다.

그러나 그때 실상을 여실히 아는 마음은

‘이 생명체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자기들 갈 데로 가게 두자,

이것들은 생존할 권리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상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마음이 입니다.

 

똑같은 예를 불쾌한 마음의 상태에 적용합니다.

당신이 화를 경험할 때,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아, 지금 화가 다시 난다!” 우리는 실상을 바라봅니다.

“화가 있다”.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 이 두려움을 어머니의 두려움, 아버지의 두려움, 개의 두려움,

나의 두려움으로 보게 된다면,

이 모든 괴로움은 여러 생명체를 옭아매는 끈적끈적한 거미줄로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든, 관련이 없든지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더러운 개의 두려움은 동일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다’.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경험했던 두려움과 다른 사람이 경험했던 두려움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더럽고 늙은 개에게도 동정심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두려움이 더러운 개에게 끔찍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끔찍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어떤 개가 발에 세게 채였을 때나, 당신도 그렇게 채였을 때,

아픔의 느낌은 동일합니다.

아픔은 단지 아픔이고, 추운 것은 단지 추운 것이고, 화는 단지 화입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단지, ‘아픔이 있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자아적 견해를 강화시켜주질 않고,

대신에 대상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줍니다.

-괴로움이 있다- 라는 괴로움의 상태를 인식함으로써,

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의 두 번째 통찰력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해하여야 한다’. 이 괴로움을 조사하여야 합니다.

 

 

괴로움을 조사함

 

나는 당신이 고통(dukka)을 이해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즉, 당신의 고통을 실제로 바라보고 그 아래에 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이 육체적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낙담하고 있을 때,

번민하고 있을 때, 미움과 혐오감이 들고 있을 때 등,

이럴 때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든, 그것이 극심하던 경미한 것이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신이 처절하게 불행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거나

고문대에서 고문을 당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가르침은 가볍게 불만족스럽게 느끼더라도,

괴로움을 바라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속죄양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진실로 나를 사랑한다면,

혹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현명하다면,

그때 현재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문제는 없었을 텐데.’

 이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외부 대상과 공정하게 거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편의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혼란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 따르면,

우리가 꽤 불행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깥 대상에서 온 고통이 아니라,

그 대상의 주위에 맴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 인간이 깨어나는 것이고,

바로 ‘괴로움의 진실’에 대해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성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은 괴로움을 더 이상 나무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교의 접근 방식은

타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꽤 독창적인 것입니다.

왜냐면 불교의 관점은 지혜를 통하여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과

전도된 모든 생각으로 부터의 벗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은총이 넘치는 어떤 상태를 획득한다든지,

궁극적 존재와 일체가 된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부 대상들이 좌절과 성냄의 원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가르침을 가지고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응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귀챃게 하고,

혹은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당신을 괴롭게 만들려고 하고 있고,

또한 당신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당신의 손톱을 뽑는다든지, 어떤 지독한 짓을 당신에게 가했을 때,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이 괴롭다’라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괴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이란 손톱을 뽑는 사람에 대한  반응이다,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명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손톱을 뽑는 것은 아픕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이런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수행해 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당신의 손톱을 뽑을 때 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사소한 것으로 시작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의 기분을 잘 몰라주던지, 무례하다던지,

무시한다든지 할 때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얕보거나 어떻게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해서,

당신이 괴로웠다면, 바로 그것으로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걷거나 쳐다보는 방식에 따라서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습니다.

때때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 걷는 방식 때문에,

또는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감을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선 그와 같은 것에 기분이  끓어올라 화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손톱을 뽑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해도 끼치지도 않고,

아무런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괴롭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간단한 경우에서도 괴로움을 바라볼 수 없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당신의 손톱을 뽑아버릴 때에

영웅처럼 그 괴로움 바라볼 수는 절대 없을 것 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불만족으로부터 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기분이 상하고, 짜증나거나, 화가 나는 그 방식을 바라 봅니다.

이웃에 의해,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 의해,

대처수상에 의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품성에 의해,

우리 스스로에 의해 야기되는 괴로움을 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괴로움을 하나의 대상으로써 바라보며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에 대해 통찰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