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말씀

Panna Vamsa 2009. 9. 25. 16:37

십사무기(十事無記)와 독화살의 비유 - 작은 말륭끼야뿟따 경(Cūlamāluṅyaputta sutta, M63)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철학자들은 난해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삶과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인다. 철학자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부질없는 문제에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상가, 종교가, 철학자들이 서로 논쟁에 열을 올렸다. 그들이 주로 논쟁을 벌이는 10가지 주제가 있다.

 

① 세상은 영원한가?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

③ 세상은 유한한가?

④ 세상은 무한한가?

 

세상이 시간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끝없이 과거로 미래로 달려가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세상이 공간적으로 얼마나 넓은지 최고배율의 천체망원경이나 전파망원경을 들여다보거나 우주선을 발사하여 그 끝을 알려고 해보아도 알 수 없다. 우주는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세상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대우주뿐만이 아니라 소우주라고 하는 개체들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가? 개체와 전체는 어떤 상호 연관성이 있는가?

 

⑤ 몸과 마음은 같은가?

⑥ 몸과 마음은 다른가?

 

몸과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몸과 마음은 실재하는 것인가? 몸과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몸을 떠나서 마음만이 존재할 수 있는가?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주석서에서 여래(tathāgata)는 붓다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유정(satta)을 말한다. 그럼 유정중생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선(禪)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구(四句)이며 선문답의 핵심문제이다. 유(有), 무(無), 비유비무(非有非無), 역유역무(亦有亦無)의 사구는 선(禪)에서 기상천외한 언어로 대답을 시도하는 선어(禪語)이다.

 

말륭끼야뿟따는 명상 중에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수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에게 가서 이 10가지 문제를 여쭈었다. 만약에 붓다께서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면 환속(還俗)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붓다께서는 그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지 물으셨다. 이런 쓸모없는 철학을 배우기 위해 출가했는지 물으시고 독화살의 비유를 들으셨다.

 

독화살을 맞았으면 빨리 독화살을 빼고 해독제 주사를 맞아야만 생명을 건질 수 있다. 그런데 독화살을 빼고 치료할 생각은 않고, 독화살을 쏜 사람이 어떤 계급이며 키는 얼마이며 어떤 인종이며 어디에 사는지, 화살이 어떤 종류인지 활줄이 어떤 종류인지, 화살대는 어떤 종류인지, 화살 테가 어떤 종류인지 알아야겠다고 생떼를 쓰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더라도 생노병사의 괴로움과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철학자, 사상가, 이론가, 논리주의자, 학자가 아니다. 붓다는 리얼리스트(realist)이다. 붓다는 그런 부질없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괴로움의 소멸, 도(道)와 과(果),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만 설명하셨다.

 

붓다께서 언급하지 않은 문제가 나중에 정말 문제를 일으켰다. 붓다께서 대열반에 드신 후 100년이 지나자 학자적인 성향을 지닌 불교도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학파, 중관학파 등 많은 학파가 생겨나고 구사론 기신론 공사상 등이 <몸과 마음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며 말라식, 아뢰야식이라는 새로운 단어도 만들어냈다. 화엄학파는 붓다께서 설명하지 않으신 <우주의 구조>에 대해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중무진법계라는 단어로 현대의 우주천문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이런 학문들이 과연 깨달음에 도움이 될까? 인간들은 왜 수행하지 않고 이런 철학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경전의 문구를 해석하거나 논쟁을 벌이고 토론하기를 좋아할까? 어째서 명상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자들은 드물고, 불교대학에는 사람들이 몰리는가? 미얀마나 한국이나 왜 수행하는 스님들은 적은가? 카페의 글에도 명상수행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에는 조회수가 적고 왜 토론에는 조회수가 많은가?

 

수행이 그렇게 어려운가? 탐욕ㆍ 분노ㆍ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진 줄 알아차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왜 사람들은 수행은 어렵게 느끼고 교리공부에는 많은 흥미를 갖는 것일까? 지식욕이 정말 무섭다. 얼마나 무서우면 교단을 분열시키고 파벌을 형성할까? 지식이란 기초적인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닌가? 수행이 중요하지 않는가? 수행을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