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말씀

Panna Vamsa 2009. 9. 25. 16:40

붓다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 악기왓차곳따 경(Aggivacchagotta sutta M72)

 

유행승 왓차곳따가 붓다에게 가서 십사무기(十事無記)에 대해 질문했다.

 

① 세상은 영원한가?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

③ 세상은 유한한가?

④ 세상은 무한한가?

⑤ 몸과 마음은 같은가?

⑥ 몸과 마음은 다른가?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붓다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왓차곳따가 왜 견해가 없는지 묻자 붓다께서 대답하셨다.

 

“이런 추론적 견해들은 욕망에서 벗어나 고요와 평화가 있는 열반을 성취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고따마 존자께서는 사변적인 견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까?”

“왓차여, 여래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봄으로써 모든 추론들(all conceivings), 모든 사고들(all excogitations), 나라는 것(all I-making), 내 것이라는 것(mine-making), 자만의 잠재성향(the underlying tendency to conceit)을 부수어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해탈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럼 해탈한 비구는 어디에 태어나게 됩니까?"

"왓차여, '태어난다' 라는 말은 맞지 않다.

 

완성자(붓다, 벽지불, 아라한)는 새로운 존재를 받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소멸해버린다는 단멸론으로 오해하게 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습니까?"

"왓차여, '태어나지 않는다'해도 맞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렇다면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까?"

"왓차여,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것도 맞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까?"

"왓차여, '태어나지 않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도 맞지 않다."

 

왓차는 여기서 혼란이 생겼다. 그는 이제 붓다에 대한 조그마한 믿음조차도 날아가 버렸다고 말한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모든 종교 신도들은 이런 최상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불교는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종교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항상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거나 아니면 죽으면 끝이라는 유물론자들이다.

 

붓다께서는 이런 심오한 가르침에 혼란을 느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특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며 불에 대한 비유를 들으셨다.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불이 타고 있다면 '내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고 알 수 있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알 수 있습니다."

"왓차여,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고 있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타고 있습니다."

"왓차여, 불이 꺼진다면 '불이 꺼졌다'라고 알 수 있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알 수 있습니다."

"왓차여, 그 불이 꺼진 후에 어떤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 질문은 맞지 않습니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하여 타올랐던 불은 연료를 다 써버리고 다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불에 대한 비유는 붓다께서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에서 첫해 안거를 마치고 우루웰라로 가서 깟사빠 삼형제와 1000명의 결발행자들을 가야시사(Gayāsīsa) 정상에 앉히고 했던 불의 설법(S35.28)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

존재라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연료가 있음으로써 타고 있는 것이고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연료가 다하여 불이 꺼진 상태이다. 그래서 ‘죽은 후에 어디로 갔느냐?’라는 질문은 맞지 않는 것이다. 불이 꺼진 것이지 어디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왓차여, 그렇다. 여래를 물질(느낌, 인식, 상카라, 식)로 설명하려 하지만, 여래는 물질(느낌, 인식, 상카라, 식)의 뿌리를 잘라 미래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제거하였다. 왓차여, 여래는 물질(느낌, 인식, 상카라, 식)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났다. 그는 바다처럼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그에게는 '태어난다' 라는 말이 맞지 않다.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도 맞지 않다.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하다'라는 말도 맞지 않다. '태어나지 않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맞지 않다.

 

오온으로 여래를 설명할 수 없다. 오온이란 물질, 느낌, 인식, 상카라. 식이며, 줄이면 정신과 물질이며,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이다. 몸과 마음으로 붓다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붓다는 오온을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오온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사후에 有, 無, 非有非無, 亦有亦無의 네 가지 언어(四句)로 존재여부를 설명할 수 없다. 四句뿐만아니라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열반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있다. 유여열반은 나머지가 있는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했으나 아직 수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오온(정신과 물질)이 남아있다. 오온이 남아있기 때문에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에는 오온마저도 소멸한다. 이것이 무여열반이다.

 

어떤 학자들은 오온(五蘊)의 소멸이 아니라 오취온(五取蘊)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온이 소멸한다고 하면 단멸론이라는 것이다. 오온은 존재하며 집착하는 오온(오취온)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온의 소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완전히 소멸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상좌불교를 아공(我空)에 집착하는 자들이며 소승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경에서 붓다는 <오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오취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상좌부 전통에서 <닙바나>라는 단어는 열반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나 유여열반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빠리닙바나>라는 단어는 아라한(붓다, 벽지불)의 죽음으로 한정되어 사용한다. 빠리닙바나는 오온마저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상태를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가 극명하게 갈린다. 대승불교는 <상주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대승의 열반경에서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아마 <오온의 소멸>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 <두려움>이 대승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대승은 해탈이라는 단어보다 <영원한 자유>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성철 스님께서도 <영원한 대자유>라는 책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면 자기 원하는 데로 자유롭게 어느 세계든지 태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깨달으면 생사가 자유로운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솔깃하고 매혹적인 말이다. 붓다의 말이 맞는가 아니면 성철 스님의 말이 맞는가? 둘 중 하나는 틀린 말인가? 아니면 한 가지의 두 측면인가? 그래서 둘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법(不二法)이 등장하는가???

 

대승의 불자들은 붓다는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다고 생각한다. 모든 세계마다 붓다가 상주하며 중생이 원하면 몸을 나투어 구제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구제론>이 등장한다. 붓다에게 공양올리면 큰 공덕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에 가서 불공을 올리는 것을 큰 공덕으로 여긴다. 스님들은 붓다와 신도들을 연결해주는 사제(司祭)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로 전락한다. 신도들이 주로 행하는 신행활동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머물고 계시는 붓다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상좌부불교는 붓다는 빠리닙바나(대열반)에 들어가셨다고 생각한다. 붓다는 더 이상 몸을 나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붓다에게 불공을 올리지 않는다. 대신 붓다의 10가지 공덕을 회상하며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공덕을 짓고자 하는 사람은 승가에 직접 공양을 올린다. 승가는 신도들의 복밭이 되기 위해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청정범행을 닦는다. 스님들은 사제가 아니고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며 실천하는 수행자이다. 교리가 달라지니 신행생활도 이렇게 달라진다. 어느 쪽이 옳은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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