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6. 9. 14:54

각묵스님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이 글은 초기불전연구원(http://cafe.daum.net/chobul)의 아비담마 게시판에 각묵스님께서

2002년 12월 24일부터 2003년 1월 21일까지 기간동안 올리신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_()_()_()_

  

--- 목차 ---

 

Δ 7. 아비담마 소개글들을 올리면서

Δ 8. 준비운동

Δ 9. 아비담마와 아비달마

Δ 10.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1)

Δ 12.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2)

Δ 13. 아비담마와 위빳사나는 어떤 관계가 있나?

Δ 14. 아비담마란 무슨 뜻인가?

Δ 15.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1)

Δ 16.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2)

Δ 17. 속제에 대해서

Δ 18. 속제와 빤냣띠(개념)

Δ 19.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1)

Δ 20.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2)

Δ 21. 네 가지 승의제(빠라맛타삿짜) - 아비담마의 네 가지 주제

Δ 22. 마음(citta, 心)

Δ 23.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다

Δ 24. 찰라생 찰라멸과 설일체유부

Δ 25. 삼세실유,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Δ 26. 마음은 하나뿐인데 왜 89 혹은 121 가지 마음을 설하나?

Δ 27.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1)

Δ 28.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2)

Δ 29. 순간 순간의 아비담마 사진을 연결한 것이 인식과정(viithicitta)이다

Δ 30. 순간 순간의 사진끼리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24가지 빳짜야(paccaya, 조건)이다

Δ 31. 마음은 대상없이 일어나지 못한다.

Δ 32. 잠재의식(바왕가)도 대상이 있다

Δ 33. 마음부수=心所=쩨따시까(cetasikaa)

Δ 34. 마음부수는 모두 52가지이다

Δ 35.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떤 마음부수들이 함께하는 지를 아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기본이다

Δ 36.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는 분리할 수 없다

Δ 37. 아비담마의 관심은 현상[法]의 강약이 아니고 현상의 있음과 없음이다

Δ 38. 아비담마로 자기 심리현상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하라

Δ 39. 아비담마의 냉철한 분석 위에 위빠사나는 바른 길을 가게된다

Δ 40. 물질(色, 루빠, ruupa)

Δ 41. 마음과 인식기관을 떠난 물질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Δ 42. 물질은 깔라빠(kalaapa, 무리)로 존재한다

Δ 43. 깔라빠=분해할 수 없는 것(아위닙보가)= 영양소를 여덟번째로 한 것(오잣타마까)

Δ 44. 사과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해보면?!

Δ 45. 열반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Δ 46. 오온과 마음-마음부수-물질

Δ 47.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1 - 힌두는 초월적(transcendental)이다

Δ 48.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2 - 간화선은 직관적(intuitive)이다

Δ 49.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3 - 아비담마는 분석적(analytic)이다

Δ 50. 대승은 아비담마의 토양위에 핀 꽃이다 1

Δ 51. 대승은 아비담마의 토양위에 핀 꽃이다 2

Δ 52. 아비담마 공부의 중요성

Δ 53. 감사합니다

Δ 54.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연재를 마치며 ...

 

 

 

--- 본문 ---

 

 

 

Δ 7. 아비담마 소개글들을 올리면서  ...

 

어떻게하면 아비담마를 조금더 쉽게 설명해볼 수 있을까 고심하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전에 미얀마에 있을 때 아비담마 입문서를 만들어보자면서 몇 십쪽 글을 써둔 것이 떠올라 노트북의 파일들을 확인해보았는데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지금 부터 하나하나 올려보려합니다. 거칠기도하고 잘못 적은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읽다가 잘 못된 부분을 발견하시면 알려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까페 법우님들의 아비담마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묵 합장

 

 

Δ 8. 준비운동

 

아비담마는 차디찬 얼음물과 같다. 여기서 차다는 말은 냉냉하다, 냉정하다, 감정이 없는 냉혈인간?과 같다, 그래서 재미없고 무미건조하다는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차다찬 얼음물을 건너가야만 한다. 다른 경치 좋고 따땃하고 사람을 끄는 물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물에는 반드시 악어나 상어나 뱀들이 또아리고 있어서 산천경계에 속고 따뜻함을 즐기는 사이에 저 언덕은 고사하고 그 물에서 죽임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니 이 차디찬 물을 건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쉬운?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미얀마 사야도께서는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이 최신형 보잉777 비행기의 수퍼퍼스트 클라스 자리에 열반행 티켓??을 예매해 두는 것이라고 침을 튀기며 말씀하시고 나서 이것은 농담 같지만 진담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 차디찬 얼음물에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발가락정도 담그고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차디차고 냉엄한 맛?을 즐기기란 도저히 어려울 것이다. 아니 마음으로는 뭐 이런게 있나, 아이 골치야, 아이 재미없어, 차라리 어려운 의학서적을 읽는게 낫겠어, 옛날 남방 스님들이 날은 더워 밖에 나가기는 싫고 절간에서 밥먹고 할 일이 없어서 이런 골치 아픈 것을 만들어 사람을 괴롭히네, 이게 불교 수행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머리로 알음알이를 굴리는 짓거리지, … 등등 온갖 불선법을 다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사전 준비운동이 아주 필요하다 하겠다. 그 준비운동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여기서 꼭 하고 싶은 말은 아비담마 공부를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이 통밥을 굴려보라는 것이다. 한참 통밥을 굴리다가 조금 지나면 이제 통밥도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처음 아비담마를 접하며 수 없는 알음알이가 일어나 무수한 통밥을 굴리면서 대림스님을 괴롭혔다. 대림스님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잘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통밥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통밥으로는 도저히 아비담마의 냉엄함은 해결이 되지 않음을 마침내 절감했다. 나로서는 아주 중대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좌정하고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기로 들며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적용시켜 보았다. 길이 보였다.

 

법우님들도 좌정하고 앉아서 차근차근 아비담마의 가르침대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시라. 그러면 거기서 길이 보일 것이다. 일단 이해하고 나면 아비담마보다 쉬운 게 없다 싶을 것이다. 진리란 알고 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란 것을 나는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감상(監)하고 나 자신을 닦으면서(修) 재삼 느꼈다. 어쨋던 준비운동은 많으면 많을수록 얼음장과 같은 이바담마의 차가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급적 감정?(=온기, 열기)을 많이 담은 준비운동을 도와주는 글을 써야겠다고 고심하다가 대화체로 적는 것이 제일 읽기 쉽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이 법우님들께 조그마한 길잡이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준비운동이 필요 없는 분은 곧바로 저 얼음물로 들어가서 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시기를!

 

 

Δ 9. 아비담마와 아비달마

 

문: 스님, 요즘 초기불교니 근본 불교니 남방 불교니 아비담마니 위빠사나니 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알던 불교 즉 대승불교나

선불교를 위시한 북방 불교 전통과는 다른 불교 체계를 알게되면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과연 북방에는 이때까지 전혀 소개되지 않은 것인가요?

 

답: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이런 가르침은 중국불교를 통해서 이미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는 아함경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것이고 아비담마는 설일체유부라던지

특히 구사론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것이고 위빠사나는 觀이란 말로 즉 사마타-위빠사나는 止觀이란 말로

잘 알려진 것들입니다.

 

증도가로 유명한 영가 현각스님의 영가집에서 이런 사마타와 비파사나와 우필차(upekkhaa, 捨)라는 말이 4장과 5장과 6장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와 고려를 지나서 조선조 오 백년간 엄청난 탄압을

받으며 선불교만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 보니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천년 이상을 깊이 사유해오던 이런 불교 용어들이

그만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슬픈 현상이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아직 살아있는 남방에서 생생하게 전승되어오다보니 남방불교라 이름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우리 선조들께서는 천년이상을 심도 깊게 사유하고 생활 속에서 실현하려하시던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문: 그렇군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줄곧 아비담마란 용어를 쓰시는데 한문권인 우리 나라에서는 아비달마(阿毗達摩)란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까. 또 아비다르마란 용어도 쓰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남방 불교 국가에서 수행하신 분들은 스님처럼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하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들 단어들이 차이가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한문 아비달마(阿毗達摩)는 산스끄리뜨 Abhidharma(아비다르마)를 음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아비담마는 빠알리 Abhidhamma를 한글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 원 의미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굳이 아비담마란 빠알리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제가 지금 설명하고자하는 체계가 남방불교

즉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서 특히 미얀마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구사론을 번역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비다르마 꼬샤(Abhidharmakos#a)나 아비다르마 구사론 혹은

아비달마 구사론이라 표기하겠지요.

구사론은 북방에 전승된 부파 불교 소전의 산스끄리뜨로 표기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방 소전의 아비담마를 소개할때는 아비담마라는 용어를 사용해야하고 북방소전의 아비다르마를 소개할때는

아비다르마란 용어를 사용해야만 오해의 소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다르마가 큰 줄거리는 같지만

용어의 정의나 제법(諸法, dhammaa)을 분류하고 그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데는 견해의 차이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하는 체계는 남방 아비담마(Abhidhamma)이기 대문에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Δ 10.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1)

 

문: 그러면 아비담마 불교가 초기불교나 근본불교입니까? 요즘 남방불교를 근본불교라 소개하고 위빠사나 수행법을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고 아주 강한 톤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요.

 

답: 너무 중요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자면 ‘아니다’입니다.

우리가 초기불교나 근본불교 혹은 원시불교 기본불교 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는 현존해 있는 남방의 4부 니까야 즉

디가니까야

(장부), 맛지마니까야(중부) 상윳따니까야(상응부) 앙굿따라니까야(증지부), 숫따니빠따, 담마빠다, 우다나, 이띠웃따까와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북전의 4 아함 즉 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과 의족경, 법구경 등과 남북전 율장중

초기 전승 등에 제한되어야 합니다.

 

아비담마는 분명 불멸후에 발전되어 오다가 남방불교 국가에서 전승 발전되어온 체계입니다.

그러니 남방불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방 상좌부 불교의 이론적이 토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이론체계를 갈고 닦아서 이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전승해온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분명히 후대에 발달한 기법입니다. 물론 위빠사나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빠알리어 이고 그 용어들은 대부분 초기 경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법 자체를 부처님의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큽니다.

 

부처님 당시를 포함해서 B.C. 3 세기경에 불교가 스리랑카로 전래되어 남방에서 역사적으로 전해내려 오던 수행 기법은 청정도론의 정품에서 40가지 명상주제로 체계화되고 혜품에서 10가지 혹은 14/16가지 위빳사나냐나로 철저하게 이론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남방에서 위빳사나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는 몇 가지 기법들 즉 마하시 사야도께서 주창하신 기법이나 레디 사야도께서 체계화한 기법이 우바킨 거사님에게로 전해지고 그것을 인도의 고엥카 거사님이 전 세계적으로 유통시킨 수행기법 등은 모두 청정도론에는 나타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해서 더 후대에 미얀마에서 완성된 기법입니다.

 

청정도론이야말로 아비담마 교학체계에 입각해서 경장을, 그 중에서도 4부니까야를 중점적으로 주석한 주석서이니 남방불교의 실체가 아닙니까. 여기에 뿌리를 두고 더 후대에 발전되어온 수행 기법을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 한다면 너무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Δ 12.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2)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수행기법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출입식념(아나빠나사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격찬을 하고 있고 이 출입식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 당시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출입식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도와 과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수행 방법과 명상주제는 벌써 그 사람의 기틀에 따라서 부처님 당시부터도 다양하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방의 간화선이나 묵조선 나아가서는 염불선까지 아니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까지도 그리고 남방의 위빠사나와 사마타 기법은 물론이고 이 모든 수행법들이 불교의 가르침 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이라면 자기에 맞는 방법을 택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고 봅니다. 거기서 오는 문제점은 여러 경들이나 논서들을 보면서 점검하고 널리 다른 수행하는 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탁마하면 된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도 벌써 40가지로 명상주제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절에서 일상으로 행하는 염불, 기도, 간경, 축원 보시 등의 모든 실천이나 수행이나 의식이 이 40가지 안에 다 포함된다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남방의 의식이 있는 스님들은 결코 아비담마를 부처님 직설이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비담마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집대성한 가르침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담마를 몇 천년 전승해온 자기 전통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불교역사에서 남방 아비담마보다 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수행을 염두에 두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노력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간화선이야말로 불교의 최상승 수행이라고 주장하려면 튼튼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승되어오는 간화선이야말로 부처님 수행법의 골수 중의 골수라고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감사합니다, 스님. 제가 너무 외람되이 주제넘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 한편이 시원하기도 하고 뭔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 그러니까 스님께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시는 게 남방에서 전승되어 발전되어온 아비담마 교학체계라는 것이지요?

 

답: 그러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비다르마나 아비달마란 용어대신에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Δ 13. 아비담마와 위빳사나는 어떤 관계가 있나?

 

문: 또 주제넘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궁금한게 많거든요.

답: 좋습니다. 무엇이던 질문해보세요. 단 아비담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 스님, 남방에서 발전되고 지금까지 잘 전승되어온 이 두 체계 즉 아비담마와 위빠사나는 서로 연관이 있습니까? 아비담마는 남방의 교학체계고 위빠사나는 그런 남방 교학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일거라는 생각이 스님과 대화하면서 강하게 드는데요?

 

답: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아비담마 없는 위빠사나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즘 상당수의 한국 분들이 아비담마에 대해서 전혀 사유해보지도 않고 위빠사나를 체험위주의 신비주의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 천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비담마를 배울 기회가 없어서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위빠사나는 극단의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법에서는 인터뷰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절대 비방이 아님)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분들 가운데서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분이 몇분이나 되는지 걱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온 몸에 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든지 몸 속이 보인다든지 힘을 몸의 특정부분으로 모을 수 있다든지 하는 경계에 빠져 그런 유희를 즐기는 것쯤으로 위빠사나를 호도하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해대는 분들이 많거든요. 또 잘 못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삐띠(희열)이라느니 행복(수카)라느니 평온(우뻬카)이라느니 초선의 경지라느니 이선 ... 사선 ... 무소유처라느니 하면서 인터뷰하는 분들이 오히려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요. 경계는 대부분 위빳사나를 하지 않고 집중(선정)에 맛들이려는데서 생깁니다. 이것은 사마타의 경지에도 못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런 것 쯤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9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열가지 위빳사나의 경계 축에도 들지 못하는 참으로 가소로운 경계입니다.

 

남방의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한 스님들은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요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고 거듭 설하고 계십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길라잡이를 제일 먼저 출판한 이유도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튼튼한 이론 체계인 아비담마를 평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거듭 강조하면서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시는 몇 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 불자님들은 아비담마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위빳사나 수행은 진전이 없다면서 격려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이 없는 아비담마는 그야말로 매마른 고담준론일 뿐입니다. 수행을 통한 확인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어려운 빠알리어나 그것을 그냥 한문으로 옮긴 무슨 뜻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기호들의 나열인 듯한 무미건조한 것이 될 소지가 너무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뒷받침 될 때 아비담마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자신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에 대입하여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비담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비담마길라잡이를 공동번역하면서 제가 절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도 아비담마를 Philosophical Psychology(철학적 심리학)라고 소개하는데 이런 지적 탐구를 자신의 심리상태를 돌이켜보는데 적용시키는 가르침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Δ 14. 아비담마란 무슨 뜻인가?

 

문: 그럼 이제 하나하나 아비담마에 대해서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비담마란 문자적인 뜻부터 말씀해주십시요.

 

답: 아비담마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아비담마란 무엇인가(1-4)에서 설명했으니 그것을 참조하시고요. 여기서는 거듭 다음의 측면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비담마는 첫째 부처님 가르침(Dhamma)에 대한(abhi) 것입니다. 이 45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방편(pariyaaya)으로 세간적이고 출세간이며 높고 낮은 수많은 부처님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뛰어난법[승법]이라고 아비담마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고 오해하고 호도할 우려가 있으며 자칫 금구성언을 윤리도덕만을 중시한 가르침으로 평가절하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비담마는 물.심의 여러 현상(dhmma)을 대면하여(abhi) 그것을 잘 분석하여 그것이 선인지 불선인지 그런 현상들은 어떤 조건하에게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 지를 철저하게 알아서 저 고귀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 밖에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은 아비담마에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강조해서 말하는 법의 핵심입니다. 이 제일 중요한 측면을 놓쳐버리면 법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법을 이렇게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부처님 가르침(Dhamma)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

 

우리 불교를 보십시오, 교학은 문자놀음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강원에서 비구/비구니계 받기 위해서 싫어도 억지로? 공부해야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렇게 된 가장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법을 나와 상관없는 지금여기서 숨쉬고 고뇌하고 하는 이 나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나 외에 저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법은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법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내 밖에서 벌어지는 것은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 일단 내 안의 문제가 정리되고 이해되고 극복되면 자연스럽게 그 빛은 내 밖으로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자비고 그것이 참다운 보시이고 보살행입니다. 그런 것이 출가자로서 가지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어야 합니다.

 

나를 떠난 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섯불리 남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정치(나쁜 의미의)라 할 수 있습니다. 출가자가 정치꾼이 되어야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정치로서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풀려고 드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Δ 15.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1)

 

문: 잘 알겠습니다. 스님, 그런데 현장스님께서 구사론에서 아비담마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고 들었는데요?

 

답: 참으로 그렇습니다. 현장 스님께서 구사론을 옮기면서 아비다르마를 승법이 아닌 대법(對法), 즉 법에 대한 것으로 옮겼는데 참 고결한 안목이라 생각합니다. 아비담마를 승법으로 말해버리면 물론 구극의 단위라는 뜻이 전달되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 삶의 현장을 넘어서서 있는 고고한 무슨 법,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이라는 쪽으로 이해될 소지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법으로, 법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 내 속에서, 이 인식과 목숨을 가진 한길 몸뚱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법)을 대면하고 직시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해해서 보는 것이란 의미가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담마는 바로 지금 여기 내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모든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 분해해서 가르쳐주는 수행의 길잡이입니다. 내 몸뚱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현상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심리현상은 참으로 미로중의 미로입니다. 이 미로속을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지도나 안내서나 길잡이가 없이 들어갔다가는 백 퍼센트 모두 길을 잃고 헤매다 죽기 마련이고 아니면 다른 이상 한 곳에 떨어져 그것이 궁극의 이상향인양 떠들고 다니다가 귀중한 한 평생을 다 보내기 십상입니다.

 

물심의 모든 현상을 물질 28 가지 단위와 정신 53가지로 분석해서 이들이 어떤 조건과 과정을 통해서 생기고 멸하고를 거듭하면서 흘러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이렇게 분석해서 관찰하면 모든 현상은 무상 고 무아일 뿐이지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게됩니다. 이것을 절감하고 이것에 투철해야 그 사람이 참다운 수행자고 불자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이야말로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가장 강한 멧시지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이런 태도가 없는 아바담마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승법이라기보다는 대법이라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가 위빳사나(內觀)요 위빳나사나 아비담마라고 남방의 훌륭하신 스님들은 역설하신다고 봅니다. 나를 관찰하는 것을 떠난 아비담마는 이미 아비담마가 아니고 그런 위빳사나는 위빳사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Δ 16.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2)

 

이런의미에서 인식과 알음알이(식)를 더불은 이 한길 몸뚱이에서 세계의 고집멸도를 본다는 상응부의 부처님 말씀이야말로 아비담마의 시작이요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남방 스님들은 상응부의 이 말씀으로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의 설명을 시작합니다.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분명히 해야할 점은 이 ‘나’를 떠나서는 아비담마의 여러 가지 법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물질도 내가 내 몸안에서 파악하는 물질입니다. 이 파악은 눈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마노)으로 파악하고 생생히 느끼고 그래서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체계입니다. 심(마음)과 심소(마음부수)도 물론 그러하고요.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심과 심소와 물질을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매순간 자기 몸에서 찾고 확인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아비담마 공부 자체가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빳사나입니다.

 

이렇게 아비담마에 대한 튼튼한 기초를 다지면서 위빳사나 센터에 들어가서 기법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산길을 가는데는 역시 지침서도 있어야하지만 처음 가는 길은 반드시 인도자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산길을 가는 기법(테크닉)을 터득해야만 시간낭비하지 않고 바르게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동무가 있으면 나태하지 않고 더 힘차게 갈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결코 곁길에 속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되고 수행에 큰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문: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아비담마는 바로 지금 여기 내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모든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 분해해서 가르쳐주는 수행의 길잡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깊히 새기겠습니다. 그럼 일체 모든 물심의 현상이 아비담마의 주제이겠습니다.

 

답: 넓게 본다면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닙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 dhamma를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물심의 현상이든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우리도 잘 아는 진제(眞諦, paramattha-sacca)와 속제(俗諦, sammuti-sacca)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다루는 주제는 거의 대부분 이 진제입니다. 속제는 다른 말로 빤냣띠(pan$n$atti)라하는데 명칭이나 개념이란 말입니다. 명칭/개념과 그에 해당하는 물심의 현상은 밑도 끝도 없이 많고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일단 아비담마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Δ 17. 속제에 대해서

 

문: 그런데 스님, 진제와 속제는 대승불교에서도 익히 알려진 개념이죠. 아비담마에서는 진제와 속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속제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답: 속제를 빠알리로는 삼무띠 삿짜(sammuti-sacca)라 합니다. 먼저 諦로 한역되고 있는 삿짜(sacca)란 단어부터 살펴보면, 삿짜란 √as(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입니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쓰이는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동사원형입니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빠알리 형태가 sacca입니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있어야하는, 존재해야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진실한, 사실인’ 등의 형용사로 쓰이기도 하며 중성명사로 쓰여 ‘진실, 진리, 사실, 실제’란 의미로 쓰이지요. 불교에서는 고.집.멸.도를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여 사성제라 부르지요. 아무튼 이런 측면에서 sacca는 진행되어 가는 의미의 진리가 아닌 불변의 진리라는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이 너무 길어지니 이만 줄입니다.

 

그리고 sammuti란 단어는 sam*(함께)+√man(to think, to consider)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로서 ‘함께 생각된 것, 서로 통용되는 의견’ 등의 의미에서 ‘세간에 널리 통용되는 이치나 견해’ 등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을 8월 30일이라 하는 것이나 음력 7월 13일이라 하는 것, 자동차, 사람, 꽃 등등 세간에서 널리 사용되고 쓰이는 여러 개념, 규정, 약속, 법률, 관습, 등을 삼무띠 삿짜라 합니다.

 

분명히 해야할 점은 불교에서는 결코 속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법규나 규정 약속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세속제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위들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세간적 인습 등에 함몰되어버리면 진정한 해탈과 진정한 자유는 없게 됩니다.

 

 

Δ 18. 속제와 빤냣띠(개념)

 

문: 속제를 빤냣띠라 즉 명칭이라 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답: 빤냣띠(pan$n$atti)는 지혜(pan$n$aa)라는 용어가 파생된 동사 pra(앞으로)+√jn$aa(to know)의 사역형 동사 pan$n$aapeti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입니다. pan$n$aapeti는 사역형이니까 ‘[남들이] 잘 알게 하다’는 의미에서 ‘선언하다, 선포하다, 알리다, 지적하다, 지목하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빤냣띠는 ‘알게 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중국에서는 ‘施設’로 번역되었는데 ‘假說, 方便設’이란 의미가 강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두 가지 빤냣띠(개념)를 말하는데 세간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sadda-pan$n$atti, 삿다 빤냣띠)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들(attha-pan$n$atti, 앗타 빤냣띠) 즉 사람, 나무, 돌, 컴퓨터 ... 등등을 말합니다. 이 들은 모두 아비담마에서는 개념(빤냣띠)의 카테고리에 포함되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아비담마의 주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것은 실재가 아니고 모두 방편일 뿐이니까요. 아비담마에서 다루는 주제는 진제 혹은 승의제이고 그래서 아비담마를 빼어난(아비) 법(담마), 수승한 법이라 해석하고 그래서 중국에서 승법(勝法)이라 뜻풀이를 했다고 봅니다.

 

문: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자아(aatman, Paali. attaa)는 진제일까요 아니면 이 속제에 속할까요?

 

답: 거창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본다면 분명 자아는 빤냣띠일 뿐입니다. 그런 기본 단위(dhamma)는 존재하지 않고 아비담마에서 설하고 있는 여러 기본 단위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이고 존재일 뿐이라 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독립된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냐일뿐이고 상카라일뿐이라고 위숫디막가[淸淨道論]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문: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아뜨만을 그들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에서 최고 우위에 두는 힌두 제파에서 불교를 맹공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럼 진제를 설명해 주시지요.

 

 

Δ 19.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1)

 

답: 진제는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라 합니다. paramattha는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됩니다. ‘최고의 이치’라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勝義’라고 직역해서 勝義諦라고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비담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단위들이야말로 이 온갖 세상 즉 이 욕계에서부터 출세간의 경지에까지 항상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입니다. 존재를 이런 최소의 단위, 궁극의 단위로 분해하고 해체하여(vibhajja)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고 설하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빤냣띠 즉 속제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에서 하는 여러 학문은 사실 대부분 이 빤냣띠를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들을 분석하여 제시하고 이들이 여러 다른 조건들 속에서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고 연연취산(因緣聚散)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관심입니다.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를 아비담마의 담마에서는 4가지 영역을 정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카테고리 안에 모든 것(dhamma)을 포함시켜 체계화하고 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궁극입장인 무아를 분석적으로 증명하고 보여주려는 학문이 아비담마입니다. 무아의 최초요 최고의 변론자인 셈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개념(빤냣띠)과 법(진제, 빠라맛타)을 정확히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존재와 인식의 구극의 단위인 이 법들을 빤냣띠와 구분하지 못하면 아비담마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니 아비담마 학도는 이 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사유해 봐야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최소단위인 법들은 인식하고 인식되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요.

 

 

Δ 20.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2)

 

문: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아비담마는 자칫 아주 무미 건조하고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답: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승원에서 스님들이 하던 공부입니다. 신도들은 어렵다고 머리부터 저어버리지요. 지금도 아비담마의 나라라는 미얀마에 가보면 신도들은 거의 대부분 아비담마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아비담마란 말만 들어도 합장하고 공경하려하지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에게는 아비담마를 외우고 배우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의 법수를 계속 외고 익히다보면 ‘나’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힘을 자연스럽게 기르게 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위빠사나로 연결되고 그래서 어떤 수행의 경계가 와도 그기에 속지 않고 그 경계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하고 분해하여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분석하고 분해하지 못하면 마음 경계에 속습니다. 철저하게 분해해서 그 뿌리를 보아야하지요.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사미때부터 그 분량이 엄청나고 최고로 어렵다는 빠타나(Pathaana)를 우리가 천수경 외듯이 줄줄 욉니다. 그 자체가 큰 수행인 셈이지요. 그렇게 외서 나중에 커서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미세한 심리현상을 더욱더 정밀하게 관찰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아마 미얀마에서는 소위 말하는 큰스님들이 많이 나오시는 가 봐요.

 

 

Δ 21. 네 가지 승의제(빠라맛타삿짜) - 아비담마의 네 가지 주제

 

문: 이제 다시 승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네 가지로 카테고리를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특별한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아비담마란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쏟아난 게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수승한 안목으로 체계화하고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겠는데 그러면 당연히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뿌리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답: 물론입니다. 먼저 네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찟따(citta), 쩨따시까(cetasika), 루빠(ruupa), 닙바나(nibbaana)입니다. 한글과 한자로 옮기자면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물질(色), 열반(涅槃)입니다.

 

 

Δ 22. 마음(citta, 心)

 

문: 스님, 그럼 이제 하나하나 그 뜻을 설명해 주십시오. 먼저 마음이라 하셨고 한문으로는 心이라 하셨는데요. 사실 한글로는 마음이란 단어하나로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이나 기능을 나타내어 버리고 마는데 범어에서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많이 거론되는 것이 한역 경전들에서도 심, 의, 식(心意識)의 문제가 아닙니까. 이 아비담마에서 스님께서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한역 경들에 나오는 심의식 중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이 심의식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 궁금한 게 많습니다.

 

답: 참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먼저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心意識)의 범어 원어를 말씀드리자면 심(心)은 citta(Sk. citta)를 의(意)는 mano(Sk. manas)를 식(識)은 vin$n$aan*a(Sk. vijn$aan*a)입니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 경들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根, indriya, 혹은 處나 入, aa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합니다. 識으로 옮긴 vin$n$aan*a(vi분리하여+√jn$aa, to know)는 여섯 감각 기관과 여섯 대상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알음알이의 개념으로서 나타납니다. 초기경들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용처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심.의.식(心意識)으로 옮기고 다시 이것을 현대 한국에 사는 우리가 우리의 한문에 대한 개념 규정으로 대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다른 한글이나 한문으로 옮기는 것도 여간 어렵지가 않고요. 아니 아직 그런 시도 자체도 없지요.

 

그리고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이 셋이 같은 것이라 정의합니다. 물론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자세히 보면 citta와 mano는 그 용처가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citta와 vijn$aan*a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때 찟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마음이라 옮기면 citta를 뜻하는 것이고 알음알이라 옮기면 vijn$aan*a를 뜻하며 마노나 意로 옮기면 일단 mano를 뜻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Δ 23.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다

 

문: 분명하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일단 찟따와 윈냐나는 같은 의미로 마음이라는 넒은 의미로 사용되고 마노는 정신영역을 관장하는 기관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답: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제시를 못한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에 한정하여 말하면 찟따와 윈냐나 즉 마음으로 옮기고 있는 것은 매 찰라(khan*a)에 생겼다가 멸하는 그 한 생각을 말합니다. 마음이라하니 뭐 불변하는 우리에게 내재된 실재, 영원히 나고 죽음을 초월한 그 자리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한 순간에 생겼다가 다음 순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입니다.

 

문: 그렇습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조금 알송달송합니다. 스님께서는 앞서 승의제란 구극의 단위나 실재라고 하신 것 같은데요?

 

답: 구극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 구극의 실재는 찰라생이고 찰라멸입니다. 찰라 생과 찰라 멸을 하는 단위로서의 구극의 단위입니다. 구극의 단위라 하여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면 안됩니다. 마음은 이전의 여러 수억조의 마음이나 마음부수등의 현상(법)에 조건지워져서 생겨서 변화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시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그 다음 마음이 즉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이 생멸합니다.

 

마음은 생겨서 대상을 인지하는 본래 기능을 다하고 소멸합니다. 이렇게 매찰나찰나 마음은 수억조번 일어납니다.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기간을 심찰나(citta-kkhana)라 부릅니다. 북방 논서에도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에 마음은 960번 일어났다가 소멸한다는 문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너무 빨리 생멸하기 때문에 생멸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라는 것이 아비담마의 제일 전제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아비담마가 오리무중이 됩니다. 반드시 숙지해야하고 자기 자신 속에서 확인하고 뼈시리게 느껴야합니다.

 

 

Δ 24. 찰라생 찰라멸과 설일체유부

 

문: 그러면 그것은 없는 것 아닙니까. 한 순간에 생겼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니까요.

 

답: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에 생겼다가 다음 순간에 다른 조건으로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런 생멸하는 구극의 마음이나 생각의 단위를 찟따라합니다. 이것은 나머지 쩨따시까와 루빠 즉 심소와 물질에도 다 적용됩니다. 아비담마의 모든 구극의 단위들은 모두 찰라생 찰라멸입니다. 찰라생 찰라멸로서의 단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 sarvaastivaadin)의 견해도 이해해야합니다.

 

설일체유부라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 부파에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가르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불교의 일파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부파 불교중에서 가장 왕성했던 파이고 불교가 인도에서 힘을 잃을 때까지 끝까지 대승불교와 교리논쟁을 벌여왔던 파인데 어떻게 이런 모든 것이 있다라는 파가 그렇게 불교 내에서 힘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가집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결코 모든 것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세속제로서의 모든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원히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찰라 생과 찰라멸을 거듭하는 구극의 단위들을 상정하여 그런 구극의 단위들은 존재한다[有]라고 설하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라 불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설일체유부와 남방 상좌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물론 어떻게든 구극의 단위로서의 법들(dhaamaa)을 인정하고 있기에 대승불교 특히 중관파(공관파)와 교리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에 속하던 스님들이 유식을 크게 일으켜 세웠음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만큼 아비담마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후대 불교교리의 발전과 변천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Δ 25. 삼세실유,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문: 아하,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구극의 단위라 깊이 새겨보겠습니다. 아뭇던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아비담마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무슨 가르침이나 학문이든 기본적인 명제라 할까요 그런 직관에 바탕한 전제 조건들을 제대로 음미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말장난에 빠지기 쉽다고 봅니다. 일단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이 citta뿐만 아니라 모든 단위들(dhammaa)이 모두 찰라생 찰라멸을 한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직관은 모두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행에서 직접 체득한 것입니다.

 

지금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매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현상들이 생기고 멸하고 생기고 멸하고를 거듭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순간 찰의 전도 아니고 찰라의 후도 아닌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오직 실재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형성된 것(san#khaata, 行)에 속합니다만. 순간이 존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말로서는 여러 가지로 다른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얼마든지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금의 찰라는 존재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수행의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즉금의 찰라는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단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 말을 유론이나 상견에 빠진 말이라고 하시는 분들은 말에 떨어진 것입니다. 말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이런 바탕을 잃어버리면 수행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의 출발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극의 실재로서의 심 심소 물질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런 확장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의 법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문: 스님, 현재는 존재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도 존재합니까? 아비다르마에서는 삼세실유를 주장한다고 들었는데요?

 

답: 남방 아비담마에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실재한다고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학문을 위한 주의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 과거와 미래가 실재한다는 것이 참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좌정하고 앉아있으면 몇 십년 전이나 몇 년전이나 몇일전의 일이 아무런 차이 없이 즉시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만일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금에 일어나는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성인의 경지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만일 미래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지, 그런 의미에서 미래는 실재한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매순간의 연속으로서의 현재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사유해야하고 옛 선지식들의 견해를 찾아서 음미해봐야겠지요. 성급하게 한 번에 다 알려는 태도는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더 사유하고 궁구해볼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반조를 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으며 무엇을 모르고 있나. 모르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며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나 자주자주 점검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수행이아닐까요?

 

 

Δ 26. 마음은 하나뿐인데 왜 89 혹은 121 가지 마음을 설하나?

 

문: 감사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중요한 포인트들은 이렇게 강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이해가 그냥 용어들을 나열하여 전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남방불교에서는 89가지 마음 즉 찟따를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말씀에 따르면 찟따는 오직 하나 뿐이다 이런 말씀이 되는데 좀 혼란스럽습니다.

 

답: 찟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뿐이라하면 수백억겁이 지나도 불생불멸인 영원한 하나인가라고 생각하시면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나 초기불교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구극의 단위로서 하나 뿐이란 말입니다. 사실 찰라생과 찰라멸을 거듭하니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단위로 본다면 불가설 불가설전이지요. 그렇지만 구극의 단위로서는 하나다, 다시 말하면 ‘안다’는 하나의 기능만 한다라고 말해야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했지만 찰라생 찰라멸을 하면서 불가설 불가설전의 수많은 태어남과 사라짐을 거듭하는데 그런 생과 멸은 그 찟따가 일어나는 장소(bhuumi), 다양한 관련된 다른 단위(dhamma)들 등의 조건에 따라서 분류하는데 이렇게 분류해보면 89가지나 121가지 경우가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쉽게들 찟따는 89가지이다 이렇게 말해버리지요. 그러나 구극의 단위로서는 하나입니다.

 

 

Δ 27.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1)

 

문: 알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미진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스님, 좋은 비유가 없을까요?

 

답: 저는 아비담마를 사진이나 영화 필름에 비유해서 이해합니다. 그러면 분명하게 포인트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항공사진반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항공 사진을 찍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첩보자료를 만드는 작전반이었습니다. 그들은 첩보용 비행기나 위성등으로 찍어서 보내온 수많은 사진들을 분류하고 판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여기에 비유해서 보면 사진 필름 한 장 한 장은 모두 매 찰라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찍은 사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수 억장의 사진들은 그러나 사진이라는 것에서는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에 따라서 몇 십가지로 분류해서 대용량의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다양한 사진들이 수 억 장이 있다하더라도 대상을 찍었다는 작용으로는 모두 하나의 ‘사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수 억 장의 사진을 분류해 보면 동해상의 사진, 서해상의 사진, 황해도의 사진, 평안도의 사진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겠지요. 같은 동해상의 사진이라도 낮에 찍은 사진, 밤에 찍은 사진 등으로 분류해 볼 수도 있고, 같은 동해상의 사진이라도 그 안에 탱크가 들은 사진, 곡사포가 들은 사진, 등으로도 분류해 볼 수 있고 ... 이렇게 어떤 조건에 따라서 분류해보면 수 억장의 사진일지라도 몇 십가지나 몇 백가지로 줄여서 나타낼 수가 있겠지요. 그럴려면 분류하는 기준을 찾아야겠고 그 기준으로서 지역이 제일 좋은 기준이 되겠지요.

 

찟따도 그와 같습니다. 정신-물리적인 현상을 찍은 수억장의 사진을 분류하는 기준은 많겠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찟따를 주목합니다. 그래서 분류의 기준으로 알음알이인 찟따가 일어나는 곳에 따라,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의 넷으로 나누고 욕계는 다시 不善(akusala)과 원인 없이 생긴 것(ahetuka)과 아름다운 것(sobhana)으로 나누고, 다시 불선은 탐욕에 뿌리박은 것, 성냄에 뿌리박은 것, 미혹에 뿌리박은 것으로 나누고 .... 이렇게 계통을 만들어 분류해보면 불가설 불가설전으로 수 없이 생겼다가 멸하는 찟따를 89가지나 혹은 121가지로 줄여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Δ 28.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2)

 

문: 참 좋은 비유입니다. 뭔가 감이 많이 잡힙니다.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아비담마를 연구한 분들은 사진 판독가들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물질만 찍는게 아니고 정신현상까지도 찍는다. 일단 아비담마의 주 관심은 이런 수백억조 개 이상으로 순간 순간 생멸을 하는 우리의 정신-물리적 현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분류하는 작업이군요.

 

아비담마을 가르치시는 분들은 이렇게 찟따를 분류의 기준으로 삼아서 분류해가지고 이 부류의 사진에는 어떤 심리현상들(cetasika)들이 있고 어떤 물질(ruupa)들이 있고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떤 상호 작용을 하고 ... 뭐 이런 연구를 하는 아비담마연구소의 공학박사님들 내지는 싸이코피직스?를 전공한 박사님들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답: 하 하 하 ... 그런 셈이지요. 그리고 이 아비담마 사진기로 찍힌 사진은 우리가 보통으로 대하는 사진기와는 아주 다르지요. 우선 정신현상까지도 찍는게 다르고 물질적 대상도 산, 물, 꽃, 사람 등으로 찍는게 아니라 물질은 28가지의 최소단위로 환원하여 그중에 어느 찰나에 나타나는 찟따에는 어떤 환원물질들이 나타나는 가를 찍고 우리 마음의 여러 복잡한 현상들도 모두 52가지 단위로 환원하여 나타나게 하는 그런 사진이지요.

 

그리고 그 사진을 연구하는 분들은 단지 사진만 연구 분석하는 분들이 아니고 이런 사진들이 순간 순간에 어떤 필름으로 돌아가서 어떤 미세한 심리-물질적인 현상을 벌이는가 까지 연구하는 분들이지요.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위티찟따(viithicitta)라 부르는데 인식과정이라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순간 순간의 찟따들이 모여서 최소의 사고과정 단위를 구성하는데 이를 일컷는 말이지요.

 

 

Δ 29. 순간 순간의 아비담마 사진을 연결한 것이 인식과정(viithicitta)이다

 

문: 인식과정이라면 ... 아, 스님, 그 자다가 망고 먹는 것 말씀이지요.

 

답: (웃음) 아세네요. 그래요 자다가 망고 먹는 데 비유한 17의 찟따 사진들로서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는 어떤 작용을 하고 없어져 가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과정은 아주 미세하고 복잡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분명한 법칙(niyama)속에서 전개되어가는 과정이라는게 이 인식과정(위티찟따)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인식과정을 통찰하는 아비담마의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길라잡이 4장에서 나름대로 깊이 해설을 해보았습니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사실 이 위티찟따(인식과정)를 자세히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찟따는 89측면에서 분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위티찟따로서 윤회하는 원리와 과정 등을 아비담마는 논리적이고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자와나(속행)야말로 선업 불선업을 짓는 순간이고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지혜로운 주의)로서 선을 행하여 향상의 길로 갈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와나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3장과 4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Δ 30. 순간 순간의 사진끼리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24가지 빳짜야(paccaya, 조건)이다

 

문: 감이 옵니다. 그러니까 아비담마에서 제일 어렵다는 24가지 빳짜야(조건)도 이렇게 수백억 장의 사진을 가지고 이 사진과 저 사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어떤 조건때문에 이 다음에는 이 마음이 일어나는 가를 밝힌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답: 바로 그렇습니다. 나의 인식과정속에 흘러가는 불가설 불가설전의 수백 수천 억 조의 심 찰라에 찍은 마음 사진은 그것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조건을 가지고 분류해보면 모두 24가지 조건 하에 들어오게 된다고 아비담마에서는 가르칩니다. 이런 조건들을 깊이 음미해보면 우리의 심리현상과 사고과정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며 요술쟁이와 같은 우리의 알음알이가 벌이는 여러 삼리현상에 속지 않게 되지요.

 

이 빳짜야(조건)의 가르침은 어렵긴 하지만 옛 큰 스님들의 예지가 깊이 배여있는 너무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빳짜야를 살펴 통찰하는 그 자체가 큰 수행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지금 생긴 한 생각은 어떤 조건에서 생겼으며 이것은 또 다음 생각에 어떤 조건이 되는가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심으로 24가지 빳짜야들을 음미해보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음의 달인이 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이런 측면에서 중국에서 옛날이 불교를 심학이라 부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심(마음)과 심소(마음부수)들 특히 52가지 심소법들을 또 함께 관련된 것끼리 묶어서 번뇌다, 폭류다, 족쇄다, 장애다라는 등의 불선법이나, 사념처 오근 오력 등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이다 등등으로 사진을 분석하고 판독해보기도 하지요.

 

그 모든 판독은 사실은 이런 현상은 열반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북 양 전통의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근본은 뭐라 해도 해탈과 열반 아니겠습니까?

 

 

Δ 31. 마음은 대상없이 일어나지 못한다.

 

문: 스님, 그럼 이 외에도 마음에 관한 중요한 측면을 더 말씀해주실 것이 있는지요.

 

답: 있습니다. 아비담마 전체를 통틀어서 제일 중요한 측면이라 여겨지기도 한데요. 아비담마에서는 물론 초기경에서도 그렇고요, 마음(알음알이)은 대상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알음알이는 모두 대상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전5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부의 대상일 수도 있고 내 마음에서 일어났던 현상들이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파악하는 마음 즉 알음알이의 본성입니다.

 

문: 뭔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폭탄선언을 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그렇다면 소위말하는 잠재의식이나 깊은 잠이 들어서 꿈이 없는 상태에서도 알음알이는 대상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말인지요?

 

답: 물론입니다. 모든 알음알이 즉 마음은 그것이 거칠던 미세하던 수승하던 저열하던 모두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이 없이 마음 즉 알음알이는 생기지 못한다는 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가르침이며 불교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음미하고 나에게서 확인하여 확신을 가지는 것이 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것에 확고하면 아비담마의 어렵게 보이는 가르침도 모두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행의 첫 출발은 바로 내게서 일어나는 이 마음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고 일어나는가를 파악해서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Δ 32. 잠재의식(바왕가)도 대상이 있다

 

문: 뭔가 뒷통수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떨떨합니다. 그럼 잠재의식의 대상은 뭘까요?

 

답: 잠재의식 즉 바왕가의 대상은 이 몸 받기 바로 전생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났던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의 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이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4장 인식과정과 특히 제5장 과정을 벗어난 마음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달은 분들이 규명해 내신 지혜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경지라고 봅니다. 이런 바왕가들의 생멸에 의해서 존재로서의 개체는 영속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문: 스님, 좀 멍합니다. 과연 그럴까 싶기도하고요. 어쨋던 아비담마의 중요한 측면인 것만은 틀림없다 싶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해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습니다. 그냥 잘 마음에 새겨두고 넘어가시라고 미리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4장의 사고과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때 풀리게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대상과 함께 일어난다는 이 전제조건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 저의 입장에서 보면 아비담마를 공부하면서 가졌던 제일 큰 환희였습니다. 나름대로 이 문제가 해결되자 아비담마의 체계가 가슴깊이 닦아왔으며 남.북방의 여러 수행체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눈이 조금 열리는 것 같은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초기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눈을 반연하고 형상(색)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는 일어난다'고 분명히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수행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우리가 무엇을 내 마음의 대상으로 가지는가는 그래서 엄청나게 중요하고 그런 대상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도 내생도 형성되어간다는 게 아비담마가 제시해 주고 있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Δ 33. 마음부수=心所=쩨따시까(cetasikaa)

 

문: 감사합니다. 찟따는 작용으로는 하나이다. 그러나 일어나는 여러 주위 조건에 따라 89가지나 121가지 경우로 분류된다.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고 빨리 마음부수(쩨따시까)로 넘어 가겠습니다. 우선 쩨따시까란 용어부터 설명해주시지요.

 

답: cetasika는 우선 cetas+ika로 분리해 볼 수 있습니다. cetas란 산스끄리뜨 형태인데 빠알리에서는 ceto로 나타납니다. ‘-ika'는 ‘~에 속하는, ~하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형 어미입니다. 그래서 cetasika는 ‘쩨따스 즉 쩨또에 속하는’의 의미입니다. 빠알리로 설명하면 ‘cetasi bhaavam* cetasikam*(쩨또에 있는 상태가 쩨따시까이다)’입니다. 여기서 ceto는 √cit(to think)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앞의 찟따(citta)의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쩨따시까란 말은 ‘찌따에 속하는 것, 찌따와 함께 존재하는 것' 등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즉 찟따가 일어날 때 따라서 일어나는 여러 정신작용이나 심리현상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마음부수[心附隨] 즉 마음에 따라붙는 것이라고 표현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낮선 말이 되겠지요. 한편 중국에서는 심소(心所)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찟따는 심(마음)으로 쩨따시까는 심소(마음부수)라 옮긴 것입니다.

 

문: 잘 알겠습니다. 쩨따시까가 단수로 나타나고 찟따도 하나이니 쩨따시까도 하나이다. 비록 기능에 따라서 여러 작용을 하겠지만 ... 뭐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답: 아닙니다. 쩨따시까란 단어가 단수로 쓰이기는 하지만 쩨따시까는 하나가 아닙니다. 찟따는 하나이지만 쩨따시까는 그 종류가 많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52가지를 설합니다.

 

 

Δ 34. 마음부수는 모두 52가지이다

 

문: 어, 그렇군요. 제가 너무 오버했습니다. 벌써 오온이라하면 색수상행식이고 그중 식을 찟따라하니 쩨따시까가 나머지 심리현상을 뜻한다면 적어도 네 가지이겠고 행은 항상 sankhaaraa로 복수로 나타나니 여러 가지이겠고 ... 그러니 쩨따시까는 많겠습니다. 그만 제가 찟따를 89가지라 들었는데 스님께서 한가지라고 해서 그만 잘 못 넘겨짚었습니다.

 

답: (웃음) 쩨따시까에는 경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마음에 관한 술어들이 계통적으로 분류되어서 나타납니다. 모두 52가지인데 찟따가 일어날 때 항상 같이 일어나는 7가지(반드시들), 거의대부분 같이 일어나는 6가지(때때로들) ― 이들 13 가지를 a~n~na-samaana(다른 것과 공통된 것)라 부릅니다.

 

그리고 해로운 것(아꾸살라, 不善)에 속하는 것으로 14가지를 들고 아름다운 것(sobhana= 유익한 것)에 속하는 것으로 25 가지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총 52가지가 되는데 사실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이 52 가지 쩨따시까를 음미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도 아비담마를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Abhidhamma in daily life 와 같은 책에서는 이 쩨따시까를 음미해서 아꾸살라는 없애려 노력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더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게 가르치고 있지요.

 

한편 북방아비담마에서는 쩨따시까를 깊이 있게 계통분류하고 있지 않는데 남방에서는 계통을 세워 분류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Δ 35.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떤 마음부수들이 함께하는 지를 아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기본이다

 

한편 특정한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떤 마음부수들이 함께 일어나는지, 어떤 마음부수는 어떤 마음과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를 꿰뚫어 알아서 그것에 속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그의 수행이 바른 길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통찰지가 없다면 우리는 수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경계에 속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삼거나 그것을 공부가 다 된 것으로 착각하여 구경의 해탈을 등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아비담마의 통찰지가 없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들은 신비적인 현상(경계)에 속아 바른 길을 놓쳐버릴 우려가 다분히 있다고 봅니다.

 

위빳사나는 신비가 아닙니다. 냉철하게 과학자적인 태도로 내 몸과 마음을 분석하여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꿰뚫어 보아 모든 번뇌를 뿌리뽑아 버리는 것이지요. 위빳사나[內觀, 洞察]란 단순한 수행의 기법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Δ 36.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는 분리할 수 없다

 

문: 잘 알겠습니다. 일단 오온 중에서 수(느낌).상(인식).행(의도들)을 아비담마에서는 52가지로 정리해서 설한다라고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찟따)과 마음부수(쩨따시까)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나요 아니면 어떤 관계속에서 서로 조건지워진 것인지요. 물론 서로 관계가 있겠지요. 불교는 이런 관계, 조건을 중시하고 그래서 연기법을 중시하는 것 아닙니까. 그 관계가 어떤 걸까요?

 

답: 찟따와 쩨따시까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심리현상 즉 정신작용을 분석하고 분해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찟따와 쩨따시까로 분리해서 설명을 시도하지만 이 들은 분리될 수가 없다고 아비담마에서는 설명합니다.

 

이 찟따와 쩨따시까에 대한 잘 알려진 기본 전제 4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는

마음과 결합된 52가지 법을 마음부수들이라 한다

 

이렇게 찟따와 쩨따시까들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찟따의 기능을 ‘아는 것’이라 했는데 이 아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7가지마음작용(마음부수)가 같이 해야합니다. 그것들은 phassa(촉), vedanaa(느낌), san$n$aa(인식), cetanaa(의도), ekaggataa(하나로 모음), jiivitindriya(命根), manasikaara(마음에 잡도리함[作意]=주의)입니다. 이 일곱 가지가 다 있어야 비로소 찟따는 기본적인 ‘아는’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머지들은 어떤 상황에 따라 몇 가지 씩이 더 작용하여 전체적으로 어느 특정 상황의 심리현상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문: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심리 현상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제가 살아 있는한 이런 작용들은 기본 적으로 매 찰라찰라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본 위에서 제가 화를 내면 몇 가지의 해로움(아꾸살라)에 해당하는 마음부수들이 더 작용을 해서 전체적으로 분노라는 사진으로 판독이 되겠지요. 그때의 찟따(마음)를 욕계의 해로움(아꾸살라)에 해당하는 성냄에 뿌리한 마음이라고 분류하여 부를 수 있겠습니다.

 

답: 예 그렇습니다. 벌써 아비담마에 대해 기본 적인 이해는 바르게 하고 계시네요.

 

 

Δ 37. 아비담마의 관심은 현상[法]의 강약이 아니고 현상의 있음과 없음이다

 

문: 그런데 스님, 이런 7가지 마음부수(마음작용)는 잠재의식 --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라 하는 것 같은데 -- 그런 상태에서도 항상 같이 하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마음이 있는한, 그것이 욕계든 성인의 경지인 출세간이든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든 깊은 잠속에 있던 항상 같이 합니다.

 

문: 스님, 그러면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을때의 촉 느낌 인식 의도 등등은 아주 강력하고 거칠 것이며 깊은 잠에 들었을때의 느낌 등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이런 극단적인 두 경우에도 7가지 중요한 심부수들은 항상 심과 같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면 모순이라 생각되는데요?

 

답: 드러난 현상을 가지고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아비담마의 관심은 드러난 현상 그자체만은 아닙니다. 어떤 법들이 어떤 순간의 마음에 존재하는가가 아비담마의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강도의 차이는 아비담마의 일차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미세하게 존재하는 것과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거듭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인식의 대상을 구극의 단위로 환원해서 그런 물심의 현상을 분석하고 분해해서 파악하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오히려 아비담마는 미세한 현상에 더 조심합니다. 강한 현상에는 절대 속지 않지만 미세한 현상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무시해버리고 넘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미세한 생각, 특히 미세한 불선법(해탈열반과 고의 소멸에 해로운 마음상태)의 존재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알아서 그것에 속지 않고 그런 현상들은 어떤 기본이 되는 불선법들로 구성된 것인가를 바르게 알아서 그런 것을 꿰뚫는게 아비담마의 관심이고 그게 바로 위빳사나이기도 하지요.

 

모르는 것이 무명(avijjaa)이고 어리석음(moha)입니다. 모르면 속습니다. 알고{jaanaati) 보게 되면(passati) 속지 않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보라는 것(ehipassika)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Δ 38. 아비담마로 자기 심리현상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하라

 

문: 잘 알겠습니다. 그럼, 스님.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경우만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여기서 성을 내었다라고 한다면 그때 찍은 아비담마 사진에 나타나는 쩨따시까를 좀 판독해주십시오. 궁금합니다.

 

답: 그렇게 해봅시다. 일단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곱 가지 반드시들(삽바찟따 사다라나)에 속하는 마음부수(쩨따시까)가 일어나고요. 대부분의 경우에 일어나는 여섯가지 빠낀나(pakinna) 중에서 삐띠(희열)를 제외하고 다섯가지 그리고 어리석음(모하)의 그룹에 속하는 네가지 그리고 성냄(도사)의 그룹에 속하는 네가지 하여 모두 스무가지가 되겟습니다.

 

이 중에서도 그 성냄이 자극을 받지 않고 멍한 가운데? 그냥 생긴 것이라면 해태(티나)와 혼침(밋다)가 첨가 되어 스물 두가지가 되겠습니다. 물론 누가 약을 올리는 등의 자극을 받아서 성을 냈다면 해태와 혼침을 뜻하는 티나와 밋다는 작용을 않은 것이고요.

 

문: 아이고 좀 복잡하네요. 그러나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재미는 있을 것 같고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서 화가 치밀 때 이런 식으로 그 심리 현상을 분석해보고 분류해본다면 화는 벌써 없어져버렸겠습니다. 설혹 불쑥 화를 냈더라도 재빨리 자신에서 일어난 이런 여러 가지 심리 현상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화는 이미 사라져버리겠지요.

 

참 좋은 공부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나하나 분류하고 이름 붙여 습득하기가 보통사람들로서는 쉽지는 않지만 책으로라도 들여다보고 하나하나 분류하여 따라가다 보면 탐내고 성내고 미혹한 마음현상들을 잘 알아채고 극복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답: 그러합니다. 우리 한국불자들은 체계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에게 특히 자신의 심리현상에 적용하는 훈련이 전혀되어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이런식으로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자신의 심리현상에 적용시켜 이해하면 그런 적용 그자체가 엄청나게 중요한 수행이 됩니다.

 

 

Δ 39. 아비담마의 냉철한 분석 위에 위빠사나는 바른 길을 가게된다

 

문: 참으로 그러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객관적이고 냉철한 분석이 없다면 위빠사나 수행도 곁길을 가기가 쉽상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답: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야말로 참다운 위빠사나라고 하는 거지요. 지금 테크닉으로 수행센터에 들어가서 테크닉을 배우고 집중적으로 관법공부를 짓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에서 일어나는 이런 여러 현상에 속지 않고 그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극복하여 해로운(不善) 마음부수는 없애려 노력하고 유익한 것(善)은 더욱더 증장 시키려 노력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궁극에는 모든 현상을 무아로 통찰하는 것이지요. 그 테크닉 자체를 위빠사나라 부르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아비담마의 법수를 잘 관찰하여 내안에 적용시키는 것도 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방편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비담마를 몰라도 선 불선을 잘 판단하여 선은 증장시키고 불선은 없애려는 참다운 정진[정정진, sammaa-viriya]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마음챙김을 개발하고[정념, sammaa-sati] 그래서 바른 삼매[정정, sammaa-samaadhi]를 실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정견[정견, sammaa-dit*t*hi]이 더욱 투철해지고 그래서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이 더욱 고결해지고 이렇게 해서 팔정도의 법바퀴는 항상 지금 여기 내 생활 속에서 굴러가는 것이겠지요.

 

사실 이렇게 되어야사 참다운 아비담마 공부를 짓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팔정도를 여법히 수행하는 자는 아비담마에 저절로 투철한 안목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위빠사나 공부도 마찬가지고요. 위빠사나 공부하는 사람이 매 순간에 지금 여기서 자신을 챙겨 관하지 않고 위빠사나 센터에 가야 위빠사나가 있고, 인터뷰 사야도 스님들과 위빠사나에 대한 인터뷰를 해야 위빠사나가 잘 되고, 위빠사나 수행 중에 나타난다는 여러 심리현상을 체험해야 그게 위빠사나 공부라고 생각하여 지금 여기 매 순간 자신의 심리현상을 들여다보아서 나쁜 것들은 없앨려 노력하고 선한 것들은 증장시킬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위빠사나입니까. 오히려 깨침을 얻을려는 엄청난 탐욕을 키우고 미혹을 증장시키는 역효과를 낳게 되겠지요.

 

 

Δ 40. 물질(色, 루빠, ruupa)

 

문: 스님 말씀 깊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쩨따시까는 이정도로 살펴보고 루빠 즉 물질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요.

 

답: 물질은 ruupa라 하는데 이 물질을 아비담마에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마하 부따(mahaa-bhuuta, 大種)인데 우리가 잘 아는 지.수.화.풍의 4大를 말하고 둘째는 이 4대가 조합하여 이루어진 물질들로 우빠다야 루빠(upadaya ruupa, 所造色)라 이름합니다.

 

이 소조색은 모두 24 가지인데 다시 열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것을 잠시 관찰해보면 pasaada(5 감각기관), gocaara(5 감각 대상), bhaava(2 가지 性 = 남성, 여성), hadaya(심장), jiivita(수명), aahaara(음식), pariccheda(제한), vin$n$atti(2가지 암시), vikaara(5가지 동작), lakkhan*a(4가지 특징)입니다. 이 가운데서 4대와 음식까지 18가지를 구체적인 물질이라하고 제한 암시 동작 특징의 열 가지를 추상적인 물질이라 합니다. 18가지 구체적인 물질은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고 10가지 추상적인 물질은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자세한 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한편 북방 아비다르마에서는 이 추상적인 물질을 무표색으로 분리하여서 설하고 있으며 그래서 물질, 무표색, 마음, 마음부수, 열반의 다섯 가지 카테고리를 정하여 5위(五位) 75법으로 설합니다. 이것이 유식에서는 다시 5위 100법으로 확장되어 정리되고 있지요. 남방 아비담마에서는 무표색(추상적 물질)을 물질에 포함시켜 구지 북방식으로 표현하자면 4위 82법으로 정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Δ 41. 마음과 인식기관을 떠난 물질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문: 그리고 보통으로 봐서 물질이라 할 수 없는 암시와 동작과 특징도 물질의 영역에 포함시키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답: 잘 보셨습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물질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이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내몸을 체험할 때 느껴지고 알아지는 물질의 성질을 모두 물질로 본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처럼 나의 인식과 관계없는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은 근본적으로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부의 세계란 그것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그것은 아비담마에서는 다섯가지 고짜라(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나머지는 모두 내게서 체험되어 분류되는 물질인 것입니다. 외부세계도 인식의 대상일때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불교에서 분류하여 설하는 물질은 근본적으로 요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 등에서 체계화시키는 물질과는 그래서 그 분류의 기준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인식기관을 통해서 체험하는 대상(법은 제외)을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예를 들면 4대도 땅이라는 불변의 물질적인 성질보다는 내가 느끼는 딱딱한 성질을 지대로 보는 입장입니다. 수대는 점착성으로 화대는 더운 기운이나 소화력으로 풍대는 유동성으로 이해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외부 대상에는 별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심심미묘해도 그것은 빤냣띠(개념)일 뿐이고 대상은 나의 알음알이가 없는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름 모르는 별들 속에 있는 물질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던 의미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 즉 나의 몸뚱이를 떠난 아비담마의 물질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내 몸뚱이를 깊이 분석하고 분해해서 이해해 들어가면 우리는 반드시 이런 28가지의 물질과 물질의 성질을 실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보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이지요.

 

마치 수레바퀴, 축, 널빤지 ... 등등이 모여서 수레라는 이름이 있듯이 이런 최소 물질의 이합집산, 생기고 사라짐 ... 이것이 내몸뚱이라고 나라거나 내것이라는 감정을 버리고 관찰하는 것이 아비담마고 위빳사니이지요. 이물질은 우리의 마음현상보다 느리고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물질보다 16배나 빨리 생기고 사라지고 한다고 설합니다) 관찰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에 위빳사나에서는 이 물질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의 열가지 위빳사나에서 이 물질을 관찰하는 것을 위빳사나의 시작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Δ 42. 물질은 깔라빠(kalaapa, 무리)로 존재한다

 

문: 그 외에 더 중요한 개념들이 있으면 설명해주시지요.

 

답: 사실 물질은 이렇게 기본 단위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최소의 단위들이 몇가지가 결합해서 하나의 물질 단위를 구성합니다. 그것을 깔라빠(kalaapa)라고 하지요.

 

문: 예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에서 물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라 하던데요. 경에서 부처님이 사용하시지 않은 단어인데 아비담마에서 발전시킨 그런 아비담마의 중요한 개념이라고요.

 

답: 그렀습니다. 위에서 말한 28가지 물질의 최소단위들은 따로 따로 독립해서는 존재할 수 없답니다. 최소로 8가지의 단위들이 뭉쳐서 하나의 소위 말하는 물질로 인정되는 것을 형성하는데 이것을 깔라빠라합니다.

 

화학에 비유해서 말하면 28가지 최소단위들은 원자인 셈이고 그래서 1번부터 28번까지의 원소기호로 표시할 수 있겠지요. 마치 화학에서 말하는 물질은 1번 수소에서 254번?(정확히 모르겠음) 우랴눔까지이듯이요. 그리고 깔라빠는 분자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현실적으로 모든 물질은 분자상태로 존재하지 원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28가지 물질은 원자에 비유할 수 있고 깔라빠는 분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비담마에서 물질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최소단위로 분석한 것이라서 자연과학에서 정리한 최소단위인 원자와는 기본 전제가 다릅니다. 단지 이렇게 비유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 귀 코 혀 ... 등 등으로 부르는 경에 나타나는 물질들은 모두 이 깔라빠(무리)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 등의 후대 주석서나 논서들을 보면 cakkhu-dasaka(눈의 십원소)니 jiivita-navaka(생명의 구원소)니 하는 말들이 종종 나타나고 영어로는 eye-decad니 vital-nonad니 하는 알송달송한 말들로 옮기는데 이 말은 열 가지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dasaka) 눈[이라는 깔라빠], 아홉이 모여서된 생명이라는 깔라빠라는 의미입니다.

 

 

Δ 43. 깔라빠=분해할 수 없는 것(아위닙보가)= 영양소를 여덟번째로 한 것(오잣타마까)

 

문: 그렇군요. 깔라빠는 참 중요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를 발전시켜온 스님들의 직관이 배어있는 그런 용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조금 감이 잘 안잡히네요. 조금더 설명해주시지요.

 

답: 깔라빠를 이해하는 제일 중요한 용어가 아위닙보가(avinibbhoga)입니다.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한 깔라빠를 이루는 최소 단위라는 말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四大와 형상(r?pa), 냄새(gandha), 맛(rasa), 영양소(oj?)의 여덟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용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항상 서로 묶여서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인 대상에 현현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여덟 가지는 물질의 무리(깔라빠, kal?pa)를 이루는 최소의 구성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덟 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팔원소(suddha.t.thaka)’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깔라빠는 이들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구원소(navaka)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십원소(dasaka)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9원소는 8가지 아위닙보가에다 생명기능(명근)이라는 물질이 하나 더 붙어서 9원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위닙보가는 물질의 무리(깔라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석서들에서 오자앗타마까(oja.t.thamaka,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한 것)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이 아위닙보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오자(영양소)가 이 아위닙보가에서 맨 나중 즉 여덟 번째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위닙보가(분리할 수 없는 것)와 숫다앗타까(순수한 팔원소)와 오자앗타마까(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것)는 모두 동의어입니다.

 

아비담마에 익숙치 않은 분들에게는 너무 생소한 술어들인데 알고보면 어려울 것 하나없는 용어들입니다. 인도에서 공부할 때 아비담마를 잘 모르는 교수님이 이 오잣타마까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온갖 산스끄리뜨 지식을 다 동원하여 설명하기를 오자(영양분)+타마(스떼만=영어 스테미나와 같은 어원=정력=힘)로 분해해서 음식을 먹고나서 원기왕성한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아비담마를 잘 모를때는 귄가민가하였고 문맥과 맞지 않아서 무슨 뜻인지 참 당황스러웠는데 미얀마 가서 영양소를 여덟번째로 한 것(앗타마까)이란 뜻이고 깔라빠의 동의어임을 알고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뭐든 알고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모르면 온갖 소설을 다 쓰게 되는 것이지요.

 

 

Δ 44. 사과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해보면?!

 

문: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 뭔가 좀 감이 잡힙니다. 아무튼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이 세상의 물질은 모두 이렇게 분해되고 이렇게 무리지어 존재하는군요. 그럼 사과의 물질구조는 아비담마로는 어떻게 분석될까요.

 

답: 아, 사과란 것은 아비담마에서 보면 단지 눈의 대상인 색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니 아위닙보가(분리할 수 없는 순수한 8원소) 8가지일뿐이겠습니다. 아위닙보가 속에 사과의 성분이 다들어 있으니까요. 사실 사과니 배니 코끼리니 하는 개념은 단지 빤냣띠일 뿐이라서 아비담마의 관심이 아니지요. 그것은 일단 눈의 대상일 뿐이지요. 코끼리 소리라 하면 그것은 귀의 대상일 뿐이고요.

 

문: 잘 알겠습니다. 아비담마의 기본 전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시네요. 어쨋던 존재하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8가지 물질의 담마로서 정의하고 그 중에서 냄새와 맛과 자양분을 포함시킨다는게 흥미롭고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모든 깔라빠(분자상태?)의 물질은 고유의 냄세를 가졌고 고유의 맛을 가졌고 양분을 가졌다고 아비담마 논사들은 직관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문: 또 물질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없습니까?

 

답: 많지요. 그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읽어보면 됩니다. 여기서 다 말해버리면 길라잡이 책을 내는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웃음)

 

 

Δ 45. 열반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문: 스님, 이제 아비담마의 마지막 주제이면서 불교의 근본 이상인 열반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차례입니다.

 

답: 열반은 nibbaana(Sk. nirvaan*a)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寂靜이나 寂滅로 번역을 하기도 했는데 후대로 가면서 모두 열반으로 음역해서 정착했습니다. nibbaana는 nis(부정접두어)+√v?(to blow)의 과거분사형인데 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불어서 꺼진’의 뜻입니다.

 

초기경에서는 탐(r?ga), 진(dosa), 치(moha)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라고 설명하는데 열반의 가장 좋은 설명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말로서 설명하거나 거론하지 않습니다. 탐진치가 소멸된 그 경지를 어떤 언설로 설명하면 그것은 이미 열반이 아니고 알음알이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대승불교에서는 엄청난 개념을 총동원해서 소위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을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열반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진여, 법성, 자성, 원각 등등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은 열반을 개념화시키고 이념화시키는 우를 범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열반을 이념화 시키면 힌두에서 말하는 브라흐만이나 아뜨만 사상과 다를바가 없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힌두에서는 열반을 자기들 식으로 이해하여 브라흐만의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고 주장하며 그래서 힌두 제일의 성전인 바가왓기따(Bhagavadgiita)에서 브라흐마니르와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하고 있습니다.

 

 

Δ 46. 오온과 마음-마음부수-물질

 

문: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단 아비담마의 네 가지 주제 즉 찟따(마음)와 쩨따시까(마음부수, 심리현상)와 루빠(물질)와 닙바나(열반)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여기서 열반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나면 일단 부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분석하여 파악하신 오온의 개념이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로 설해진 것 같습니다. 찟따는 알음알이요 쩨따시까는 느낌[수], 인식[상], 의도(형성된 것)[행]들이고 루빠는 물질[색]로 이렇게 배대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오온 그 중에서도 정신(naama)에 관계된 4온들 즉 수상행식을 같은 선상에서 설하셨고 특히 수행에서는 수와 상의 중요성을 거듭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응부에서는 느낌상응(S36)이 따로 독립되어 설해졌고요. 산냐도 여러 측면에서 설해졌습니다. 그럼 왜 아비담마에서는 윈냐나(알음알이)를 찟따(마음)라고 하여 독립시켜 먼저 설명하고 나머지를 쩨따시까(마음부수)라 하여 나중에 뭉뚱그려 설명합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답: 이렇게 설명드리면 될까요. 앞에서 사진에다 아비담마를 비유했는데요. 이 욕계 색계 무색계 그리고 출세간계의 4계의 모든 찰라의 마음들을 순간순간 찍어낸다면 수백억조 불가설 불가설전 미진수가 되겠지요. 그것들을 어떻게든 분류하여 분석하고 분해해내려 시도하면 일단 무슨 분류의 기준이 있어야 겠지요. 그 기준이 되는 구극의 단위로 윈냐나(알음알이) 즉 찟따(마음)를 아비담마 논사들은 주목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해봅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런 불가설 불가설전의 많은 명색(정신-물질)의 사진들을 아비담마에서는 찟따를 중심으로 89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다른 단위들(dhammaa)은 이런 분류의 기준이 되기에는 너무 제한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알음알이는 찰라생 찰라멸하면서 ‘안다’는 단지 하나의 성질과 기능을 가졌지만 주위의 조건에따라서 89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기에 이렇게 나누었다 생각합니다.

 

문: 잘 알겠습니다. 아비담마는 항상 사진으로 생각해보면 감이 잘 잡힐 것 같습니다. 매순간의 정신-물질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니 거기에는 분류의 조건이 되는 알음알이가 있고 여러 심소가 있고 여러 물질이 있더라. 이렇게 그려지네요.

 

 

Δ 47.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1 - 힌두는 초월적(transcendental)이다

 

문: 그런데 스님, 아비담마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도 물질, 느낌, 인식, 의도적 행위들, 알음알이의 오온이고 그 오온은 바로 부처님이 제시하신 ‘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비담마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체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 선종의 대표적 화두 ‘이뭣꼬’나 힌두 상까라파의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꼬아함(ko aham)’과 같은 말이 아닙니까?

 

답: 언어로 보면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분별 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습니다.

 

그리고 꼬아함은 ‘나는(aham) 누구인가(ka?)’로 번역되는 산스끄리뜨로 베단따 본류를 자처하는 상까라(Sa?kara)파의 힌두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명상 주제입니다. 그들은 이 ‘나’를 영원한 자아(아뜨만)라 하여 이 아뜨만에 몰입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니 화두참구를 이런 수준으로 파악한다면 참으로 문제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몇 몇 인도 사두들은 숨을 들이쉬면서 ‘꼬(ko)’하고 내쉬면서 ‘[아]함(aham)’하라고 지도를 한다니 참 화두와는 십만 팔천 리라 하겠습니다.

 

힌두 수행은 모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자리라는 식으로 아뜨만(자아)이나 브라흐만(梵)을 설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은 이런 대상을 향해서 몰두합니다. 때로는 그 아뜨만 브라흐만으로 옴(Aum)자를 설정하고 이 옴을 찬찬히 발성하면서 그 진동음속으로 몰입하기도합니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모두 이런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게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 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aara)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힌두 수행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 할 수 있습니다.

 

 

Δ 48.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2 - 간화선은 직관적(intuitive)이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합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심이 화두의 출발입니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닙니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의 출발입니다.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최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n$n$aanam* uparodha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입니다. 이런 산냐의 대표되는 것으로 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aatmaa-sam*jn$aa) 즉, 我相, 자아라는 산냐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 할 수 있습니다.

 

 

Δ 49.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3 - 아비담마는 분석적(analytic)이다

 

그러나 아비담마는 이 둘과 또 다릅니다. 아비담마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합니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닙니다.

 

나를 찟따와 쩨따시까 루빠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냅니다. 그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집니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無我, anattaa]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며 그래서 삼차결집을 주도한 아쇼까 대왕때의 띳사 큰스님에서 유래된 상좌부 불교를 위밧자와딘(vibhajja-vaadin, 분석을 설하는 자들)이라 하며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요즘 일본 학자들은 분별상좌부란 말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물론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경지는 직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비담마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직관으로 완성되는 것이 위빳사나라 할 수 있겠지요.

 

 

Δ 50. 대승은 아비담마의 토양위에 핀 꽃이다 1

 

문: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그래서 법이라는 최소의 단위들을 설정하고 이것은 찰라생 찰라멸이지만 인식의 기본 단위라고 설명하고, 아까 스님께서 설일체유부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지만, 그래서 후대 대승 논사들이 부파불교는 아공은 말하지만 법공은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승이다. 교학적으로도 하열하다. 뭐 이런 주장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답: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그런 대승논사들의 주장이 근거없는 말씀은 아니라고 저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대승논사 중의 대논사이신 용수 스님만해도 그 분이 논거로 사용한 경들이 모두 남방의 니까야와 북방 소전의 아함부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분은 초기불교의 경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아비담마적인 법의 분석과 그것을 존재론적으로만 이해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용수 스님뿐만 아니고 초기 대승의 논사들은 모두 아비담마적 분석에는 능통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그런 바탕위에서 부파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극복하려한 것입니다.

 

 

Δ 51. 대승은 아비담마의 토양위에 핀 꽃이다 2

 

그러나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 없이 대승적 직관에만 의존하다 보면 뿌리 없는 나무를 가꾸려는 시도로 빠질 수 있고 더욱이 그런 것을 더 주장하다보면 비불교적이되고 그래서 힌두적인 발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후대로 올수록 대승불교에서는 여러 면에서 힌두적인 냄세를 너무 풍기다가 힌두로 스며들고만 게 아닙니까. 중국에서는 도교나 유교식의 접근을 하게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대승, 참다운 대승불교의 직관을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서는 아비담마적인 법의 분석과 체계적인 사유가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법에 대한 분석적인 사유가 결여되면 자칫 허공에 구름잡는 주장을 대승불교나 선불교 아니면 돈오돈수라는 이름으로 하게되고 그래서 오히려 최고의 지혜나 직관을 보여 주어야할 우리 불교가 궁극에 가서는 의지해야할 판단기준이 없어져 더욱더 세속의 논리나 세속적 가치판단을 중시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뭇던 부처님께서는 분석적 태도와 직관적 태도를 둘 다 중시하신 것은 틀림없고 현대를 사는 우리도 이 둘이 균형잡힐 때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사유하고 실천하리라 생각합니다.

 

 

Δ 52. 아비담마 공부의 중요성

 

미얀마가 위빠사나 수행을 깊이하고 이런 수행을 생활의 태도로 삶는 나라로 발전하게 된 데는 그만큼 아비담마 교학이 튼튼히 뿌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와 고려를 불교국가였다고 한데는 그만큼 불교교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교학연구와 사유의 출발은 뭐라해도 아비담마입니다. 이 아비담마적 태도를 계속 발전시켜온게 남방불교이고 이런 아비담마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발달해온 게 북방의 중관파와 유식파입니다. 이런 기초 위에서 선종이 힘을 얻고 중국 천태와 화엄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바르게 중관의 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비담마의 이해가 전제조건이며 특히 아비담마에 대한 천착이 없이는 유식은 결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생각합니다. 후대의 중국적 불교의 전개도 아비담마의 이해가 필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방불교에서도 구사론을 중시해온게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구사론은 산스끄리뜨원문을 직역한 것이 많은데 산스끄리뜨 원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면 한문으로 전승되어온 구사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범어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경들이나 논서들은 한문 서적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엄연히 범어로된 경론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실력으로만 그런 경론을 이해하려할 때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직역을 많이 한 경론들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한문권의 언어나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와 산스끄리뜨로 된 초기 불전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불교를 이해하는 출발이 됨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제가 올리는 글들을 그러한 이해를 위한 조그마한 시도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Δ 53. 감사합니다

 

문: 스님 말씀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하고 젊은 세대는 더욱 크게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분석과 직관은 불교의

두 축인 것만은 사실이고 우리 한국불교는 너무 직관에만 의존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제 자신도 이런 '아비담마 길라잡이' 같은 책이 많이 나와서 우리 스님들이나 불자님들이 불교적 사유를 기본 소양으로

갖추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 대승은 참다운 대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말씀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다면 간단히 해주십시오.

 

답: 저는 일단 제가 설명드린 이 정도라도 기본적인 이해를 하면 아비담마의 기초를 파악하는데는 그리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한 이 정도의 기본 이해면 수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이나 수행이 다 그렇겠지만 하나하나 천천히 조바심이나 육단심을 내지 말고 유장하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Δ 54.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연재를 마치며 ...

 

이상으로 제가 준비해두었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에 해당되는 글의 연재를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아비담마를 공부하는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아비담마의 중요한 개념과 술어에 대한 해설을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발췌하여 가급적 쉽게 풀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3월 부터는 홍제동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공부하는 법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아비담마는 읽기 보다는 들어서 배우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릅니다. 함께 공부하고 탁마하는 좋은 모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각묵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