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문학의 세계

새롭게 하소서 2009. 12. 15.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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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년경 이집트 왕좌에 오르면서 당대의 역사적 인물들과 수 많은 로멘스를 만들었던 클레오파트라.
역사를 통틀어 과연 그녀만큼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이 또 있을까요?

 

 

 Cleopatra

William Wetmore Story (1819-1895)

Marble, 141 x 84.5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피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파라오의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프톨레마이오스 13세,14세)과 차례로 결혼한 여자,
남편이면서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결국 승리해 왕권을 쟁취한 여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역사적 기록만으로도 그녀의 일대기는 드라마틱합니다.

 

 

 

 

The Death of Cleopatra

Felice Ficherelli (1605 - 1669?)

1650s, Oil on canvas, 71 x 87 cm

National Gallery of Slovenia, Ljubljana

 

거기에다, 클레오파트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로마의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의

의도된 러브스토리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빼어난 용모와 성적매력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인류에 회자되었겠습니까?

 

 

 

 

Maria Mancini as Cleopatra

Jacob Ferdinand Voet (1639 - 1700)

1663-72, Oil on canvas, 75 x 62 cm

Staatliche Museen, Berlin


그녀는 한술 더 떠서 연인들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이집트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세계를 제패할 야심까지 품게 됩니다.

거기다 세기의 여걸은 화려한 명성에 걸맞게 지극히 파격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연인 안토니우스의 자결 후 그녀가 택한 죽음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으며, 무수한 추측을 만들어냈습니다.

 

 

 

 

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

Alexandre Cabanel (1823-1889)

188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수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생애를 작품에 담으려 했던 것도 그녀의 인생 그 자체가 한편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명성과 폭발적 대중의 관심에 비해서 그녀의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초라할 정도로 빈약한 편입니다. 아마도 최후의 승리자가 아닌 탓일겁니다.

 

 

 

 

 Cleopatra on the Terraces of Philae

Frederick Arthur Bridgman (1847-1928)

189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그녀의 무덤, 그녀를 담았던 예술품, 문헌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대 연대기 작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삶과 업적을

빛내기 위한 장식물로 그녀의 존재를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치명적 매력을 지닌 여자라는 사실만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The Death of Cleopatra

Jean Andre Rixens (1846-1924)

1874, Oil on canvas, 200 x 290 cm

Musee des Augustins, Toulouse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 세인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일 것입니다.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는 세 남녀의 역사적인 만남과 비극적인 사랑은

수세기 동안 미술,소설,연극,영화의 가장 잘 팔리는 주제였습니다.
로마의 변방인 이집트 여왕이 로마의 권력자인 두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쫓아가 보겠습니다.

 

 

 

 

Cleopatra

Peter Paul Rubens (1577-1640)

c.1615, Oil on oak, 130 x 74 cm

National Gallery, Prague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당해 유배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그녀는 이집트를 침공한 로마 장군 카이사르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왕권을 되찾을 계략을 세웁니다.

이른바 '이이제이' 전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Cleopatra

Gustave Moreau (French, 1826 - 1898)

circa 1887 ,Watercolor with gouache 

Musee du Louvre, Paris, France

 

그녀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카이사르에게 접근을 시도합니다.
그것인 즉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 군대가 이집트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고는
칠흑같은 어둠을 틈타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아서 숨긴 후 카이사르를 위한 선물로 위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카이사르에게 선물로서 전달됩니다. 카이사르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머, 그 결과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Cleopatra's Banquet

Gérard de Lairesse (1641 - 1711)

c. 1675, Oil on canvas, 74 x 96 cm

Rijksmuseum, Amsterdam

 

그 후 그녀는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전통에 맞추어

불과 10살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허울 뿐인 결혼을 하고 공동통치에 들어갑니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해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다시 화려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Cleopatra's Barge

Frederick Arthur Bridgman (1847-1928)

1876, Oil on canvas, 83.2 x 159.4 cm

Private collection

 

클레오파트라를 담은 그림들을 보면 그녀의 자살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것 중 하나가 바로 나일강에서 불살랐던 카이사르와의 사랑입니다.

기원전 47년경 두 사람은 40척의 호화 유람선을 타고 강을 횡단하면서 열정을 불태웠고 결실로서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보게 됩니다.

 

 

 

 

 Cleopatra before Caesar

Jean-Leon Gerome (1824-1904)

Oil on canvas, 1866, Lost

 

그러나 지나치면 독약이 되는 법, 인생의 황혼기에 찾아 온 사랑은 카이사르를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사랑의 힘에 총기를 잃은 그는 신전에 클레오파트라의 황금조각상을 세우는가 하면,

수치심도 잊은 채 카이사리온은 자신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습니다.

원로원의 원성을 샀음은 불을 보듯 뻔한거겠지요.

 

 

 

 

The Death of Caesar

Jean-Leon Gerome (1824-1904)

1867, Oil on canvas, 215.9 x 368.3 cm

Walters Art Gallery, Baltimore


마침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엄청난 불행이 닥칩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무려 23군데나 칼에 찔린 채 처참하게 살해 됩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 가장 위기에 처한 사람은 역시 클레오파트라였을 것입니다.
카이사르를 대신 할 새로운 권력자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로 카이사르 암살 후 최고의 권력자로 급부상한 안토니우스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이집트의 운명이 걸려 있는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방도를 찾기 위해 궁리를 거듭한 결과 묘안을 만들어 냅니다.

 

 

 

 

 

Antony and Cleopatra

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

1883, Oil on canvas, 65.4 x 92.1 cm

Private collection

 

위의 그림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인기있는 화가였던 엘마 테디마의 작품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첫 만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 역시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소재였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한 장소는 타르수스였습니다.

현재는 터키의 한 지방도시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창한 대도시였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발견한 안토니우스가 거의 뇌살 직전의 표정으로

혼이 반쯤 빠진채 그녀를 바라다 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The Disembarkation of Cleopatra at Tarsus

Claude Lorrain (1600-1682)

1642-1643, Oil on canvas, 119 x 170 cm

Musee du Louvre, Paris

 

클레오파트라는 왕실의 전재산을 털어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토니우스와 만남을 갖습니다. 선체는 황금색,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오른 돛은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아 있습니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춰 춤을 추었고 배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습니다.

 

 

 

 

 

The Banquet of Cleopatra

Paolo Veronese (Italian,1528 - 1588)

1746-47, Fresco, 650 x 300 cm

Palazzo Labia, Venice

 

위의 그림은 18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티에폴로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호화로운 연회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여왕이 진주를 포도주잔에 녹여 안토니우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플루타르크에 말을 빌리면 두 사람은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랑의 결실로 알랙산더와 크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이란성 쌍둥이도 태어났고요.

 

 

 

 

The Banquet of Cleopatra

Paolo Veronese (Italian,1528 - 1588)

1743-44, Oil on canvas, 249 x 346 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불륜이지만 10년이 넘도록 이들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청혼을 받아들여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엄청난 잇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넘겨 주었고

부부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The Nile Hunt of Cleopatra

Hans Makart (1840-1884)

Oil on canvas, 270 x 450 cm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Wien

 

이것을 지켜보던 지각있는 로마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엿한 로마인 아내 옥타비아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음에도 이집트 창녀와 이중 결혼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클레오파트라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황금알을 낳는 식민지를 통째로 갖다 바쳤으니까요.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아름답고 총명하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정실부인 옥타비아는 집에서 쫓겨 났다고 합니다.

 

 

 

 

The de Bray Family (The Banquet of Antony and Cleopatra)

Jan de Bray (1627-1697)

1669, Oil on canvas, 230 x 180 cm

Private collection 

 

마침내 기원전 32년 국가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권한을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때 득세한 사람이 옥타비아의 동생 옥타비아누스입니다.

두 사람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행과 불행의 갈림길을 만들어 냅니다.

패전한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Cleopatra and the Peasant

Eugene Delacroix (1798-1863)

1838, Oil on canvas, 98 x 123 cm

Private collection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안토니우스의 자살로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듭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장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후를 맞았는데 그녀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혹자는 무화과 바구니 바닥에 숨겨온 코브라 독사에 젖가슴을 물려 죽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이는 맹독성 뱀인 바이퍼라 에스피스의 일종인 혼드 바이퍼에 물렸다고도 죽었다고도 합니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1642, 이탈리아 화가)

Cleopatra, 1635 - 1640, Oil on canvas, 122 x 96 cm,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Italy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1642, 이탈리아 화가)

 The Death of Cleopatra, 1625-30, Oil on canvas, 124 x 94 cm, Neues Palais, Potzdam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1642, 이탈리아 화가)

Cleopatra with the Asp, c.1630, Oil on canvas, 113,7 x 94,9 cm, Royal Collection, Windsor

 

 

 

 

The Death Of Cleopatra

Guido Cagnacci (1601-1663)

165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지금까지 우리는 드라마틱한 클레오파트라의 일생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로마인들에게 그녀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요부일 뿐더러

서양문명을 위태롭게 만든 국제적 창부요 또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동방에 대한 서방의 패배, 덕성에 대한 방탕의 승리로 여겼습니다. 왜 그렇게 가혹한 평가를 내렸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신들의 황제인 안토니우스를 죽음으로 몰아 세운 새 황제에 비난과

그의 약점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 위한 속셈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로마인들에 의해 비틀어고 자기중심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복원하면 정반대의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을까?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욕에 불탄 창부라기 보다는 정치를 사랑처럼 즐겼던 진정한 여걸이 아닐까?
또 세계를 제패한 로마의 속국일 수 밖에 없었던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피할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출처: 네이버블로그 '찬솔미술관'

출처 : 번뇌, 고통과 친구하기
글쓴이 : roman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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