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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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국내)/인천광역시

2008. 3. 31.

 

                     인천(차이나타운)

 

 

인천 중구 / 차이나타운

 

 

                                          인천차이나타운 입구의 패루(牌樓)

 

인천차이나타운(仁川中華街)의 유래 및 개발개요(開發槪要)

 

인천차이나타운은 1884년에 체결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으로 선린동(善隣洞) 일대 구릉지대에 약 5천평 규모의 청국지계(淸國地界)가 설치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자장면'의 발생지이기도 한 이 지역은 지나정(支那町) 등 여러번의 명칭 변경을 거쳐 1946년에는 중국인과의 친선을 공고히 하자는 의미로 선린동(善隣洞)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개화기 인천의 상권을 주도할 만큼 번성하기도 하였던 화교들은 한국전쟁으로 많은 시설물이 파괴되고 중국과의 국교단절과 무역중지로 상권이 급격히 쇠퇴하여 현재는 600여명 정도가 화교중산학교(청국영사관위치)와 화교협회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상권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거리에는 교회와 사찰 등 오래된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찾는 이들에게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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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타운 주변 관광지

 

차이나타운 역사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체결이 된 후로 화교들이 몰려와 생성 되었습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의 5천 평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와 정기적으로 배가 운영되면서 화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식료잡화, 소금, 곡물을 팔고 우리나라의 사금 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상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면서 화교들은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나고, 일부는 요리집과 잡화상들을 운영하거나,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답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 차별대우로 화교 사회는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더불어 1949년 중국정부가 설립되어 외국이동을 금지하면서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화교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중국의 큰 명절인 설날과 원소절(보름날)사이의 15일 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 였으며,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어 놓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 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겨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현재 화교 2·3세들이 1백70여 가구 600여명이 살고 있으며, 자금성, 중화루, 진흥각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자료: 인천상공회의소>

 

 

          

            

                                               1 패루(牌樓) / 인천역 앞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입구에 2000년 11월1일 중국의 전통 대문인 패루(牌樓)가 중국 웨이하이(威海)시의 기증으로 들어서서 중국동네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동네 이름 '마루'라는 뜻의 이 패루는 폭 17m, 높이 11m 크기로 붉은색 기둥 4개와 7개의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에 '中華街(중화가)'란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패루는 비슷한 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인 방(坊)의 입구에 세웠던 중국의 문루이며,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일종의 중국식 전통 대문입니다. 패루는 미국, 일본의 차이나타운마다 설치되어 있어 외국 거주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건축물입니다.

          

                

                                               2 패루 /  기호일보 인근

 

제1, 2 패루는 인천 중구와 자매 결연을 맺은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시가 무상 기증한 것으로서, 1999년 초 인천시 중구가 중국 웨이하이시에 패루 건립을 요청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제3 패루 / 자유공원 입구  

 

        

                                                     차이나타운 거리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된 차이나타운에는 과거 화교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1884년 청나라의 조계지로 출발한 인천 차이나타운은 전성기 때 1만여명의 화교가 거주했으나, 현재는 600여명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차이나타운 3길

 

거리의 이름이 '차이나타운 3길'인 이곳은 번잡한 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인지 주위를 새롭게 단장한 듯 매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삼국지(三國志) 벽화 거리 안내 조각

 

                           

 

<삼국지 벽화에 부쳐>

 

삼국지는 중국 4대 기서의 하나로 전 세계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받아온 불후의 고전입니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조, 손권, 유비 세 사람의 영웅담은 의리와 배신, 파괴와 건설, 사랑과 미움의 서사시로 동서고금 남녀노소에 큰 감명을 주어 왔습니다.

 

특히 한,중 두 나라 국민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삼국지를 통해 인간과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 왔고, 국교 정상화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점증하는 가운데 이곳 차이나타운에 '삼국지 명장면'을 벽화로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2004. 11월 인천광역시 중구청장> 

 

                                        '삼국지 명장면' 벽화

 

모두 127장의 삼국지 그림이 길 양쪽 100m 정도의 벽을 따라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는 원용연(54)화백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벽화 한 장의 크기는 큰 것이 가로 3m. 세로 2m, 작은 것은 가로 1.2m. 세로 1.3m나 됩니다. 그림 한 장의 내용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그린 뒤 각각을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 타일로 만들었으며, 다시 이 타일을 모자이크식으로 벽에 붙여 그림을 완성한 작품입니다.

 

        

                                                   삼국지(三國志)거리

 

현상 공모로 제작팀을 결정한 뒤 사업비 5억원을 투입해 벽화 조성에 들어가 5개월간 밤낮으로 이 작업에만 매달렸다는 원용연 화백은 "인물들의 표정, 투구의 모양, 가죽의 질감 등이 그림마다 다르게 표현됐다"며 "모두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적벽대전, 도원결의, 황건적의 난, 동탁의 도성 진격 등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그린 것이 77장이고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여포 등 등장인물을 그린 것이 50여장 입니다.   <자료: 인천상공회의소>

 

          

  

밤에도 벽화를 즐길 수 있도록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벽화를 보며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삼국지를 읽던 당시의 기억이 가슴 속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벽화 "도원결의(桃園結義)"

 

"황건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의병을 모았다. 이 때 탁현(현재의 북경 부근)에 살고있던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장비의 별장 뒷뜰 복숭아 밭에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을 토벌해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맹세한다"는 이야기에 관한 벽화입니다.

 

        

                                    벽화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

 

"조조는 유비가 영웅의 그릇임을 알아보고 어느날 자기 집 후원으로 청해 술을 마시다가 때마침 용이 승천하듯 구름이 일어나자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설파하며 유비의 속마음을 알고자한다.. 이 때 유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고 여겨 수저를 떨어뜨리는데 때마침 번개치는 소리에 놀랐다는 듯이 둘러대 조조의 예리한 눈빛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에 관환 벽화입니다.

 

          

                                     인천화교(華僑) 중산(中山)학교  <자료사진>

 

1884년의 청국 영사관으로, 청국인 집단거류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청국영사관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인 화교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1902년 4월 차이나타운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자녀를 위해 화교소학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중국풍의 중산학교 건물은 몇 번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중국식 건물의 특징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1930년대의 청조계지(淸租地界) 내의 청국 공공학교로서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인천 유일의 화교학교입니다.

  

          

  

화교 소학교는 학년당 1학급(정원 35명)씩 모두 210명, 유치원은 80명, 화교중산 중.고교는 학급당 45명씩 모두 135명을 선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조계지경계계단(淸日租界地境界階段)

 

인천광역시기념물 제51호(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전동)인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租界)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지계(地界)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약 12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조계지 경계계단(租界地境界階段)은 중앙에 석조계단이 있고, 양단을 중심으로 경사가 급한 것을 감안하여 계단참을 두고, 조경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공간의 이용적 측면을 고려하여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되어있다.  <안내판에서..>

  

        

                               

 조계(租界)와 지계(地界)

 

조계(租界)와 지계(地界)란 일정한 지역범위 안에 외국인(外國人) 전용 주거지역을 정하여 그곳의 행정권(行政權)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을 말합니다. 인천 관내에는 1883년 일본 전관조계(日本 專管組界)를 시작으로 1884년 화상(華商/청국) 지계(地界), 각국조계(各國租界) 등 3개의 조계가 설정되었습니다. 이중 각국조계는 우리나라와 미국·영국·청국·일본·독일(독일은 1885년에 가입) 대표사이에 체결된바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영국이 중국과 조계 계약을 맺고 1845년 상해에 외국인 조계를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1858년에는 일본이 미, 영, 불 등 서구 5개 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도쿄와 히로시마, 나가사끼 등 5개 지역에 조계를 설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1880년에 원산, 그리고 위와같이1883년에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 조계가 설정되었습니다. 이 조계는 1914년까지 30여년간 지속되다가 한일합방 후 모두 폐지된바 있습니다.

 

                                     

                                               . 일 조계지 쉼터  <자료사진>

 

이 지역은 개항기 외국인이 집단 거주하였던 조계(租界)로 이 계단을 기준으로 좌측은 청국조계, 우측은 일본조계로서 1983년부터 30여년간 계속되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폐지 되었으며 중앙부의 계단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5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청국 양식                                                          일본 양식

 

120여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계지와 계단은 이 속에 남아 있는 조경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간직해야 할 중요한 공간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열된 석등의 형태가 좌측(청국)과 우측(일본) 각각 서로의 고유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공자상(孔子像)

 

.일조계지경계계단(淸日租界地境界階段) 상단부에 설치된 공자상은 인천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투자 협의차 중국 청도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양 도시의 우호와 교류 협력을 위해 사업을 제안, 2002년 6월 중국 청도시 시남구의 기증으로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공자(孔子)는 이상을 미래에 건 고대 중국의 위대한 교육자이며, '仁'의 학설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덕을 인(仁)이라고 보고,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자상 아래쪽의 .일조계지경계계단(淸日租界地境界階段)

 

        

                                     계단을 중심으로 우측의 일본 양식의 건물

 

          

                                                       일본 양식의 건물

 

        

                                   계단을 중심으로 좌측의 청국 양식의 건물

 

위의 건물은 중국인 연립주택으로 1939년에 지어졌으며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건물로 원형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3가구 연립형 집합주택으로 전면에 폭은 좁으나 안쪽 깊이는 상당히 깊고 중간에 비워둔 부분이 있어 환기와 채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형 연립주택은 상해를 비롯하여 중국 남부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유형입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 촌에는 이런 주택들이 여러채가 있었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현재는 불과 몇 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자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 자료에서>

 

한편 이 곳은 영화드라마촬영지로 유명한데 “내마음을 뺏어봐”, “육남매” 등의 드라마 배경으로 많이 등장했던 곳입니다.  

 

                      

                                   2패루 옆의 서성 왕의지상(書聖王義之像)

 

                                                한중문화관(韓中文化館)

 

한중문화관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차이나타운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ㆍ중국 간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직접 중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다양한 중국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차이나타운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더 많은 볼거리 제공은 물론 다양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건립하였습니다.  <한중문화관 홈>

 

                  

 

지하1층, 지상5층 규모의 한중문화관은 직접 중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다양한 중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호도시홍보관, 한중문화전시관, 기획전시실, 정보검색실, 투자상담실, 공연장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으며, 중국우호교류도시의 토속물이나 특산물의 상시 전시와 한·중 예술단의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지는 등 21세기 뉴 실크로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요녕성 영구시 전시품 

 

중국의 선사시대부터 청시대까지의 유물전시를 통해 중국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국 상주시대(商周時代) 유물로서 청동거울 및 술잔 등의 동기(銅器)

 

                  

                           중국 상주시대(商周時代) 청동으로 만든 청동솥(靑銅鼎)

 

절강성 항주시 하성구 전시품

 

항주는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통있는 절강성의 성도(省都)로 특산물인 비단으로 제작된 실크방석, 실크책, 아름다운 족자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실크로 제작된 중국 전통의상

 

산동성 청도시 시남구 전시품

 

청도시에서 기증한 수공예품과 조개공예품, 중국전통 연극인 경극가면 등 귀중한 전시문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중국전통 연극인 경극가면 모형

 

  

                                             구(舊) 공화춘(共和春) 건물 

 

“고급 청요리 집이었던 자장면의 원조 공화춘”

 

자장면의 발생은 틀림없는 인천인데, 1883년 개항 이후 '인천드림'을 따라 산둥 지장에서 건너온 중국인 쿨리[苦力]들과 부두노동자들의 간편식(簡便食) 끼니였다는 것이다. 이 음식이 처음 공화춘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증명할 수가 없다.

 

공화춘은 객잔(客棧)이라고 부르는 여관 비슷한 영업도 함께 했기 때문에 쿨리들이 합숙을 했을 가능성과 그에 따라 집단 급식용 자장면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런 사실을 전하는 중국인 또는 한국인 증언자가 일찍이 하나도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화춘 원조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알려지기는 공화춘은 당시 경인간 최고급 요리점으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쿨리들은 답동 등지의 합숙소 같은 곳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전히 공화춘 원조설에 의문이 간다. 그럼에도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인천 개항장의 청국조계 일대에서 자장면이라는 세계적 음식이 탄생한 것만은 분명하다.  <자료: 인천시>

 

참고: 중국 음식을 먹으려 할 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짱께집 가자" 거나 "짱께 먹으러 가자" 고 말하곤 한다. 이떼 "짱께"는 중국사람, 특히 화교나 중국음식을 다소 낮춰 부르는 어감이 담겨있지만, 사실 이 말은 '주인'을 뜻하는 중국어 '장꾸이더[掌櫃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방계 중국어에서는 주인을 흔히 '라오반[老板]'이라고 하고, 북방계 중국어에서는 '짱꾸이더'라고 한다. 한자를 해석하면 궤(櫃), 곧 돈 상자를 맡고있는 장(掌) 사람[的]이라는 뜻이니 주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자장면의 역사는 ‘공화춘’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후미진 골목에 쇠락한 건물로 남아있지만 공화춘은 100년 전에 처음으로 자장면을 만들어 팔았고 한때 수도권의 식도락가들이 첫 번째로 꼽는 유명한 청요리 집이었다. 1981년 이후 이 집에서는 요리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었다. 지금은 황금색으로 쓰여진 ‘共和春’이라는 낡은 간판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공화춘 정문

 

자장면의 발상지로서 구 대불호텔의 중화루(中華樓)와 함께 이름난 곳인 공화춘(共和春) 문을 닫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공화춘은 외관으로 미루어 보아 1900년말에서 1910년대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건물 전면에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 평인방을 사용하여 창들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점,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하여 외벽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하여 평 슬래브 건물처럼 보이게 한 점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건물 관리대장에는 1948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이 건물이 보존대상이 되어 수리를 하게 되면 상량문 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자료에서>

            

        

                                            공화춘(共和春)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들이 인근의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를 열어 전통 북경요리를 맛보려는 전국의 미식가들이 청관거리에 줄을 이었으며 연이어 동흥루가 문을 열면서 이곳은 청요리의 본산으로 자리잡게 됩니다<자료: 기호일보>

 

                       

                                                      자장면  <자료사진>

 

자장면이 처음 유래된 곳이 어디냐를 놓고 지금도 말들이 분분하지만 자장면은 중국의 사천요리로 춘장에 국수를 비벼 야식으로 즐겨먹었던 하류층 음식인 `챠오쳉멘'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챠오쳉멘이라는 중국식 발음이 짜장면으로 들려 짜장면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80년대 들어 국어학자들이 한국어의 된소리 현상이 언어 순화에 역행된다 해 자장면으로 바뀌었으며 대중성만큼 중국집도 많이 늘어 우리나라의 중국집 수만 2만4천여개에 달하고 하루 평균 720만 그릇이 팔려나간다고 한다.  <자료: 기호일보> 

 

          

                                                 신(新) 공화춘(共和春) 음식점

 
1981년 문을 닫았던 최초의 중국요리집 '공화춘'이 (주)공화춘프랜차이즈로 2003년 10월 본점이자 1호점인 중국요리 전문점 '공화춘'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대창반점 

  

1925년 차이나타운 청조지계(淸租地界)내에 세워진 이 건물은 중국인들의 주상복합 건물로서, 현재도 중국 화교들에 의해서 중국 요리집들이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청조계지내의 1930년대 청국인들의 주상복합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그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습니다.

 

          

                                                          중국제과점

 

                      

                                                              공갈빵

 

크기는 거대한 중국을 닮았지만 손으로 콕 찌르면 푹 들어가 버리는 빵, 내용물이라고는 바람밖에 들어있지 않은 중국 고유의 빵입니다. 겉에 꿀이 발라져 있어 조금씩 먹으면 달콤한 향과 맛 그리고 바람의 좋은 향기도 함께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각종 월병

 

남송시대부터 전해지는 과자로, 음력 8월15일에 둥근 달의 모양을 상징해서 만든 것으로 이것을 나누어 먹고 행복을 빌어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100년전 개항기 인천(仁川) 옛 모습 되살린다

 

100여년 전 개항기의 역사와 문물이 당시 인천의 도심지(현재의 중구 일대)에 되살아난다. 인천은 구한말 근대의 관문 역할을 한 국제도시였다.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에는 외국 선박이 수시로 드나들고, 일본·청·영국·러시아 등의 영사관을 중심으로 각국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조계(租界)와 지계(地界)가 설정돼 외국인 수천명이 활보했다. 인천시와 중구청은 2010년까지 900억여원을 들여 개항 당시 건축물들과 거리를 되살릴 계획이다.

 

활기찾는 차이나타운·일본거리

 

경인전철 인천역 앞에 펼쳐진 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국영사관 주변에 형성된 청국조계(淸國租界·치외법권 지역)에서 유래됐다. 한때 화교 1만여명이 북적댔지만 지금은 500여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최근 옛 모습이 살아나고 있다. 온통 붉게 외벽을 칠한 식당과 잡화점, 치파오(旗袍·중국 전통의상)를 입고 뛰어노는 아이들.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장면을 옮긴 130m 길이의 담장벽화…. 중국이 따로 없다. 

 

또 차이나타운 바로 옆 옛 일본조계(日本租界·현 중구청사 일대)는 최근 도로가 말끔히 정비됐다. 전신주는 지하로 들어가고 대신 예스런 가로등이 들어섰다. 주변 상가와 주택들은 개항 당시의 분위기에 맞춰 일본풍으로 바뀐다. 중구청은 이 사업이 끝나면 중국·일본 분위기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이색 관광지로 거듭나고,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개항기 건축물들이 부활한다

 

복원될 건물은 모두 8개. 영국·러시아·일본·청나라 등 4개국의 영사관을 비롯해 영국인 부호 제임스 존스턴이 1905년 각국공원(현 자유공원) 정상에 지어 인천의 상징이 됐던 존스턴 별장,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1904년 해군 작전수행에 필요한 기상관측 목적으로 세운 인천관측소, 활동사진과 영화를 상영했던 표관(瓢館), 조선에서 무역업을 하던 독일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사택 등이다.

 

각국 영사관의 경우 해당국 대사관을 통해 복원비용을 지원받고 완성 후 대사관측에 건물 운영을 맡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또 흩어져 있는 근대 건축물들의 이력을 찾는 사업도 병행된다. 

 

고풍스런 건물은 박물관으로

 

일본조계 한복판에 세워졌던 옛 일본 '18은행'은 근대 건축사 박물관(가칭)이 된다. 당시 제물포의 근대 건축물 가운데 보존 가치가 있는 것들을 골라 소개하고, 모형을 전시할 예정이다. 바로 옆에 있는 일본 '58은행'은 박물관 부속 건물로 활용한다. 길 건너 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인천 최초사 박물관'(가칭)으로 만든다. 경인선, 첫 전화기 등 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인천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된다.

 

처음으로 자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차이나타운 내 중화요릿집 공화춘(共和春) 건물은 자장면 박물관이 된다. 자장면의 역사·재료·그릇 등을 소개하고,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게 된다. 이 밖에 한국 기독교 선교사(史)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선교역사관, 1903년 인천에서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이 떠났던 것을 기념한 이민사박물관 등도 내년 말까지 속속 들어설 예정이다. [조선일보 이용수 기자]

  

 

 

2008.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