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北京) - 사직(社稷)/개요(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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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해외)/중국(북경-사직)

2014. 4. 4.

 

 

                                                                        사직(社稷)

 

 

                                   중국 북경(北京) / 사직(社稷)

 

 

 

사직(社稷)의 개요(槪要)

 

 

                  

                  북경(北京)의 사직단(社稷壇) <참고사진>

 

사직(社稷)이란 중국 왕조시대에 국토의 번창와 곡식의 풍양을 기원하는 제사 및 그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의미하며,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직(稷)은 오곡신(五穀神)을 상징합니다. 옛부터 중국의 황제나 제후 또는 우리 나라의 왕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릴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국토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고 곡식없는 백성의 삶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영토의 유지와 백성의 윤택한 삶을 기원하며 사직을 세웠고, 백성과 사직의 존망(存亡)은 임금과도 직결되는 것이므로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직(社稷)을 국가 그 자체로 여겼는데 논어(論語)에 의하면, “백성이 있으면 사직이 있다”고 하였으며, 맹자(孟子)에서는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여기에 비해 가벼운 존재이다.”고 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경(北京)의 사직단(社稷壇) <참고사진>

 

사직(社稷)의 제사는 주대(周代)에 춘(春)·추(秋) 두 계절에 행하였는데, 봄에 파종해 그것이 무사하게 성장이 잘 되기를 빌고, 가을에는 곡물이 자라나 많은 수확을 거두어 이를 감사하는 의례였기 때문입니다. 명대(明代)에는 홍무26년(1393)에 처음 그 의례를 정했으며, 영락19년(1421)에 지금의 북경에 사직단(社稷壇)이 완성되어 매년 춘추 중월[음력 2월과 8월] 상무일(上戊日) 첫새벽에 제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는 청대(淸代)까지 이르렀습니다. 참고로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新羅) 선덕왕(善德王) 때인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고, 그 뒤 고구려(高句麗)는 고국양왕(故國壤王), 고려(高麗)는 성종(成宗), 조선(朝鮮)은 태조(太祖)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대(明代) 초기의 사직단 [大明集禮] <참고자료>

 

사직단은 일찌기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을 나누어 세워 토지신과 오곡신을 모셨지만 북경의 사직단은 후에 와서 하나로 합쳐 공동으로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직단은 아직도 원래의 제도대로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이 각각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출정(出征), 반사(班師), 포로를 바치는 등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직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직(社稷)을 사직단(社稷壇)으로도 지칭하며, 사직단은 도읍지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북경(北京)의 사직(社稷)

 

 

                                             

                                                             사직단(社稷壇) 위치  <google자료사진>

  

북경(北京)의 사직단(社稷)은 천안문광장 서북쪽에 위치하며  명(明) 영락(永樂)18년(1420)에 태묘(太廟)와 동시에 건설하였습니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나타나 있는 제왕도성(帝王都城)의 좌조우사(左祖右社) 원칙에 따라 건설하였습니다.

 

                                좌조우사(左祖右社) <참고자료>

 

명(明) 영락(永樂)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옮길 때 자금성(紫禁城) 동서 양쪽에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을 세웠습니다.

 

                  좌조우사(左祖右社) 위치  <google자료사진>

 

궁궐인 자금성(紫禁城)을 중심으로 정면 왼쪽[동쪽]에는 태묘(太廟) 지금의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이, 오른쪽[서쪽]에는 사직(社稷) 지금의 중산공원(中山公園)이 좌우로 서로 대칭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1988년 1월 사직단(社稷壇)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는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제정한 문화유산 보호제도로 국가급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제정되는 명칭으로 1961년부터 5차에 걸쳐서 공포되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위치 <참고사진>

 

사직단(社稷壇)이 있던 곳에는 원래 옛 당나라시대에 오래된 사찰이 있었으며, 금나라시대에는 흥국사(興國寺)가, 원나라시대에는 만수흥국사(萬壽興國寺)가 있던 절 터이며, 당시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요나라, 금나라 시대에 심은 고목들이 아직도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사직제례(社稷祭禮)

 

 

                         제례 재현 장면 <참고자료>

 

옛날 중국인들은 풍년이 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에 황제들은 자신이 하늘의 아들[天子]로써 백성들을 위해 풍년이 들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년을 관장하는 것이 토지신과 곡식신으로 생각하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대로부터 사(社)는 토지의 신(神)으로, 직(稷)은 오곡(五穀)의 하나로 곡식을 대표한다고 여겼기에 이곳 사직단(社稷壇)에서 명(明), 청(淸) 양대의 황제들은 매년 봄, 가을인 음력 2월과 8월 상무일(上戊日) 첫새벽에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참고자료>

 

그래서 매년 제사때가되면 황제가 직접 사직제례(社稷祭禮)를 주관하였으며, 명(明) 영락(英樂)19년(1421)부터 청(淸) 선통(宣統)3년(1911: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까지 약 1,300 번이 넘는 제사활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건축물의 배치

 

 

● 사직(社稷) 원래의 주요 건축물

 

 

                         원래의 고유 건축물 위치 <google자료사진>

 

사직(社稷) 전체 부지면적은 24만㎡이며, 원래의 고유 건축물은 내부 중심에 사직단(社稷壇)과 주체건축인 배전(拜殿)과 부속건축인 극문(戟門), 신주(神廚), 신고(神庫), 재생정(宰牲亭), 정정(井亭)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사직(社稷) 내에 추가된 건축물

 

 

                        원래의 건축물[흰색]과 추가된 건축물[노란색]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후 사직단(社稷壇) 본래의 모습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사직단이 갖고있던 제사 기능과 원래의 의의도 사라졌습니다.

 

                                       사직(社稷) 조감도 <참고자료>

 

 

민국3년(1914) 사직단을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개칭하고 대외에 개방하였는데, 이것은 북경 시내에 만든 최초의 공공원림(公共園林)이기도 합니다. 남쪽 담장에 남문[중산공원 남문]을 설치하였으며, 후에 서쪽 담장에도 서문(西門)을 설치하였습니다.

 

민국4년(1915)원래 예부에 있던 습례정(習禮亭)을 원내에 옮겨 세웠습니다.

 

민국6년(1917) 청(淸) 건륭년간에 원명원(圓明園)에 세웠던 난정팔주(蘭亭八柱)와 난정비(蘭亭碑)를 옮겨 세웠습니다.

 

1919년에 보위화평방(保衛和平坊)의 원래 이름인 극임덕비(克林德碑)가 동단북대가 서총부호동 서구외(東單北大街 西總部胡同西口外)의 큰 거리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설치되었습니다.

 

1925년 손문(孫文)[손중산(孫中山)]이 서거하였을 때 이곳 배전(拜殿)에 잠시 영구를 모시고 제(祭)를 올렸으며, 각계인사들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사직(社稷) 조감도 <참고자료>

 

1928년에는 배전(拜殿)을 중산당(中山堂)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동시에 공원이름을 중앙공원(中央公園)에서 중산공원(中山公園)으로 개칭하였고, 동쪽에 송백교취정(松柏交翠亭), 투호정(投壺亭), 내금우헌(來今雨軒), 서쪽에 영휘정(迎暉亭), 당화오(唐花塢), 수사(水榭), 사의헌(四宜軒). 북쪽에 격언정(格言亭) 등의 여러 풍경 건축물이 새로 들어섰습니다.
 
1929년 중산공원 내에 중국영조학사(中國營造學社)를 세웠으며 이는 중국 건축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1942년 7월에는 중산음악당(中山音樂堂)을 세웠고, 극문(戟門)을 전영장(電影場)으로 고쳤으며, 후에 혁명도서관(革命圖書館)으로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전국정협(全國政協)의 회의청(會議廳)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 중국 성립 후 공원은 한층 더 대형 예술, 오락건축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북경(北京) / 사직(社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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