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공원(上林公園)/함양(咸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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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국내)/경상남도

2016. 10. 2.



                                  상림공원(上林公園) / 함양(咸陽)

 

 

☞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 상림공원(上林公園)

 

상림공원(上林公園) 위치 [] <다음지도참고>

                

함양 상림공원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상림공원(천연기념물 제154호) <참고자료>


상림(上林)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위치하며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신라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규모는 연장1.6km,폭80~200m (면적21ha) 이다. 당시에는 이숲을 대관림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

<함양군자료>


상림공원주차장


 함양박물관


13:55 / 상림 숲으로..


상림(上林) 안내판




상림의 아름다움은 봄이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사철을 통하여 그 절경을 맛 볼 수 있다. 특히 여름철 상림은 숲속 나무 그늘에 돗자리 펴고 누우면, 도심속 신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상림의 숲속에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은 연인들과 가족들의 대화와 사랑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상림에는 120여종의 나무가 99,200㎡ 1.6km의 둑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원으로도 좋은 곳이다. <함양군자료>




   상림 최치원공원 [천연기념물 154호] <참고사진> 



<참고자료>


함양상림 (咸陽上林): 천연기념물  제154호


함양상림은 함양읍의 서쪽에 있는 위천(渭川)강가에 있는 숲으로,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고 상림만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함양상림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들로는 참나무류와 개서어나무류, 왕머루와 칡 등 1993년 조사에서 116종류의 식물이 확인되었으며, 현재 20,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함양상림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한 지혜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상림 숲 표지석



                       


                   

                    상림공원 시설물 <함양군사진자료>

            



1) 물레방아



물레방아 <참고사진> 


1792년도에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 현감으로 재직 하신 기간중 연자, 디딜, 수차, 물레방아등을 이용하는 실학사상을 도입하여 선정을 베푸셨던 일은 널리 잘 알려진 일로서 그때부터 함양은 물레방아 등이 생겨나고 이용이 크게 늘어나 물레방아 고을이라 하였습니다. 물레방아는 흔히 마을에서 계를 모아 공동으로 세우며 계원이아닌 사람이 방아를 찧을 때에는 삯을 받아 모았다가 수리할 때 쓰거나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함양군자료>




2) 권석도(權錫燾)장군 기념비



 권석도(權錫燾)장군 기념비 <참고사진> 


권석도 장군은 1887년 합천군 대병면 쌍암에서 태어나 함양에서 성장 하면서 수학하였습니다. 을사보호조약후 지리산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병에 항거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왜병에게 수차례 검거되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조국광복 5개월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6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장군의 애국충정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991년 이곳 상림공원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함양군자료> 


           <참고사진> 



3) 역사인물공원(歷史人物公園) / 역대군수현감선정비군(歷代郡守縣監善政碑群)



역사인물공원 조감도 <함양군사진자료>


1. 고운 최치원 857~925(?) :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한문학의 비조(鼻祖)이며 동방 18현인 중의 일인이다.  

2. 덕곡 조승숙 1357~1418 :고려 말의 학자요 충신으로서 두문동 72인 중의 일인이다.

3. 점필재 김종직 1431~1492 :조선 초기 도학의 거유로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4. 일로당 양관 1437~1507 : 조선 초기의 학자,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다.  

5. 뇌계 유호인 1445~1494 : 조선 초기 학문에 통달한 충효의 표본이며 3대 문장가중의 일인이다.  

6. 일두 정여창 1450~1504 : 조선 초기의 문신,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에 통달한 조선5현의 일인이다.

7. 옥계 노진 1518~1578 : 조선 중기 영남 유림의 거유이며 청백리로서 효행과 덕행이 남달라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8. 개암 강직 1523~1567 : 조선 중기 성리학에 밝고 향토를 빛낸 학자이다.  

9. 연암 박지원 1737~1805 :18세기말 문장가요 북학 실학자의 중심인물로 개혁사상가였다.

10. 진암 이병헌 1870~1940 : 민족수난기에 병곡면에서 태어난 대학자요 유교 개혁 운동가로 학자들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11. 의재 문태서 1880~1912 :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으로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한 애국투사이다.


역사인물공원 <참고사진> 


 <참고사진> 

                                                    고운 최치원 [857~925(?)] <참고사진>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한문학의 비조(鼻祖)이며 동방 18현인 중의 일인이다.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관리로 종사하면서 황제의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고 「토황소격문」의 글을 써서 내란을 수습하여 공의 문장은 중국에서도 명성이 드높았다. 28세에 귀국하였으나 문란한 국정(國政)에 통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태인, 정읍, 서산을 거쳐 천령(함양)태수로 부임하여 대관림(상림)을 조성하고 풍수해(風水害)를 막아 이 고장 발전에 기여했고, 덕으로써 풍속을 교화하고 치정(治政)을 쌓아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육집, 사산비명, 법장화상전 등이 있다. <함양군자료>


역대군수현감선정비군(歷代郡守縣監善政碑群) <참고사진> 



4)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



문창후최선생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신라 진성여왕(887-897)때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太守)로 부임하여 읍민을 다스릴 때 홍수로 인해 읍성을 지나 흐르던 뇌계(위천/渭川) 주위의 농토와 가옥이 유실되고 군민의 생활이 궁핍해짐에 치수(治水)를 위하여 상림(上林)에서 하림(下林)까지 둑을 쌓고 물을 돌려 조림을 함으로써 민심을 바르게 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에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碑)입니다. <함양군자료>


 문창후최선생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




5) 금(金)호미 다리


    

금호미 다리 <참고사진>


상림숲과 관련된 전설중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어디엔가 나뭇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다리에 금호미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여깁니다. 함양 천령문화제 행사에는 금호미 찾기 행사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함양군자료> 

                                        

                                          <참고사진>



6) 연못




이 연못은 숲속중앙을 흐르는 소하천을 1995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말끔히 단장하면서 중간 지점인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게 된 것이며 숲을 걷는 모든 분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한 것입니다. <함양군자료>


연밭


홍연지(紅蓮池)


 백연지(白蓮池)













7) 사운정(思雲亭)



사운정(思雲亭)


사운정(思雲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고종(高宗)46년(1906)에 도(道) 유림(儒林)과 정상품(正三品) 박정규, 김득창이 문창후 고운 최치원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모현정(慕賢亭)이라 불렀으나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思雲亭)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함양의 시우회원(詩友會員)들의 시조창(時調唱)을 비롯하여 각종 문예행사가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함양군자료>


                     현판


7) 만세기념비(萬歲紀念碑)




 함양읍 만세기념비 <참고사진>


기미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꽃처럼 일어나자 함양군 유지(有志) 정순길, 윤보훈, 정순귀, 노경식씨 등 4인이 밀의 (密議)를 거듭하여 만세시위를 함양읍 옛 시장 싸전거리에서 거사키로 하였습니다. 3월2일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며 왜경의 총칼 앞에 분연히 마주섰던 함양읍민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민족정신을 기리고자 1985년 12월 상림내에 만세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함양군자료> 


 <참고사진>

                                                  그 날의 함성


일천구백십구년 삼월 이십팔일. 함양읍 내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대관림과 한들을 누비며 맴 돌다 왜경의 총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빼앗긴 주권과 글과 노래의 풍습을 되찾고, 자주독립을 쟁취코자 분연히 일어선 기미독립만세에 뒤따라 이 고장에서도 총검에 맞서 귀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만세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민중이 천명을 넘어섰다는 일은 우리의 자랑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날 만세 운동에 앞장 섰던 선인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고 그 함성의 대관림과 한들에서 우렁찬 메아리되어, 번영과 통일로 치닫는 활력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군민의 정성을 담아 위천변 숲 안에 큰 돌 하나를 세운다.                                             198512





●  4.19 학생의거기념탑(學生義擧紀念塔)



                        4.19 학생의거기념탑



7)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大韓義士 하승현 事蹟碑)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참고사진>

 

1919. 4. 2 함양 장날 병곡면 사람 김한익(金漢益)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히게되자 하승현이 군중과 함께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습니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습니다. 병곡면민은 하승현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잇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습니다.  <함양군자료>



8)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大韓義士 金漢益 紀念)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참고사진>


김한익(金漢益) 선생은 항상 정의감에 불타 우국 충절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3.28 함양읍 만세사건을 보고 다음 장날 혼자서라도 의거하기로 하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만들어 4. 2일 장터로 갔습니다. 정오쯤 3천여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고 이에 주민들이 적극 호응하였으며, 선생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1919. 5월 진주지방법원에서 10월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 28일 대구 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습니다. <함양군자료>


          좌로부터 만세기념비,  4.19 학생의거기념탑,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참고사진> 



9) 이은리석불(吏隱里石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이은리석불(吏隱里石佛) <참고사진> 



                                          <참고자료> 


                         이은리석불(吏隱里石佛) <참고사진> 


이은리 석불은 함양읍 이은리 냇가에서 1950년경에 출토된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높이 1.8m의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불상 주위 약 300m 지점에 망가사(望迦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절의 유물로 추정됩니다.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이 불상은 현재 두손이 떨어지고 없습니다. 머리부분은 단정하며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합니다, 머리는 소발(燒髮: 민머리)이며, 원만한 얼굴은 다소 토속적인 표정도 엿보입니다. 얼굴에 비해 빈약한 두 어깨에는 얇은 부처의 옷이 U자형을 이루며, 두텁게 묘사되어 있는데 U 자형의 평행 옷 주름은 충주 철불들과 비슷한 기법을 보여 주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광배는 연화문으로 두광을 표현하였습니다. 타원형의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 잎을 새김 하였으며,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 안에는 꽃무늬를 새겼습니다. <함양군자료>



10) 화수정(花樹亭)



화수정(花樹亭)


파평 윤씨 종중(宗中)에서 집안끼리 모여서 우의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으며, 상림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함양군자료>



화수정은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기단위의 목조누각 건물입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안에 파평윤씨 종중의 건물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를일입니다.


화수정(花樹亭) 앞 개울



11) 지압보도



                   지압보도



12) 함화루(咸化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



 함화루(咸化樓) <참고사진>


원래는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함양읍 죽곡리 거주 송계 노덕영(盧悳泳)이 사재를 들여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함화루(咸化樓)라고 개칭 하였습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1층에는 벽이 없고 기둥만이 서 있어  정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기둥은 굽은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2층의 출입은 목조 계단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2층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문루로 이용될 때에는 하층에 벽과 문짝이 시설되어 있었는데 현재에는 벽과 문짝은 사라지고 기둥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함양군자료>


                                                           <참고자료>


                       현판 <참고사진> 



함화루(咸化樓) 옆 약수터



 함화루(咸化樓) 옆 약수터 <참고사진> 



13) 다볕당 [다咸, 볕陽, 집堂]



    다볕당 <참고사진>


이곳 잔디장은 함양공설운동장이 건립되기 이전까지는 천령문화제를 비롯한 모든 체육 및 문화행사를 행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공연등 문화행사가 간혹 열리는 야외무대로서, 그리고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연 하기에 적합한 시설로 평가 되는 야외무대인 다볕당은 순수 우리말로서 다咸 자와 볕陽, 집堂 자를 써서 다볕당이라 이름하여 1995년도에 건립 하였습니다.

앞쪽으로 펼쳐진 3,000평의 잔디장은 10,000명이상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함양군자료>



14) 척화비 [斥和碑: 문화재자료 제 264호]



                                  척화비(斥和碑)  <참고사진>


척화비(斥和碑)는 상림 잔디장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조선 고종3년(1866) 병인양요 와 고종8년(1871) 신미양요를 겪고 쇄국의 의지를 고취 하고자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중 하나로 서양과의 화친(和親)을 배척한다는 것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비석입니다. 비신높이 110cm, 폭 55cm, 이수높이 40cm, 두께 19cm의 크기인데 한일합병으로 일본에 의해 전국 척화비가 대부분 훼철 되었으나 이것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바로 세워 단장하였습니다. 비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함양군자료>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다.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




15) 초선정 (招仙亭) : 한옥호텔 '정일품명가' 부지 내로 2012.3 옮김




               초선정(樵仙亭) <참고사진> 


초선정(樵仙亭)은 원래 상림에 있던 정자로 일명 '십구인정(十九人亭)'이라고도  하며, 조선조 고종때 영남학파의 맥을 이어온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며 학문을 논하고 유흥을 즐기기 위해 19인의 유림의 뜻을 모아 이 정자를 건립하였기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초선정에 걸려있는 시판(詩版)들도 이들 19인과 연관이 있다합니다. 이들 19인의 유림들은 개평마을에서 시사(詩社)를 창단하여 최치원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자 조선 고종때 상림공원에 정자를 세우고 초선정(樵仙亭)이라하였다. 그러나 19인의 후손들은 2012년 3월에 이 초선정(樵仙亭)을 상림공원에서 영농조합법인 함양정일품명가(正一品名家) 내로 이전하였습니다. <함양군자료>



16) 음악분수대(音樂噴水臺)



음악분수대 <참고사진> 


음악분수대 : 1개소(바닥분수, 음향시설, 조명(LED)시설),  산책로 음향시설 : 4km정도(스피커 101개)  <함양군자료>


                                       음악분수대 <참고사진> 



17) 기타(其他)


●  분수광장(噴水廣場)


 분수광장


●  장승(長丞) 호법대신(護法大神)



상림공원을 지키는 장승 호법대신(護法大神) <참고사진> 


●  마당바위


마당바위


●  연리목(連理木)


                       


연리목(連理木):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  유인밀양박씨 정려비(孺人密陽朴氏旌閭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


 유인밀양박씨 정려비(孺人密陽朴氏旌閭碑) <참고사진> 


                           열녀학생 임술증처 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 <참고사진>


 <참고사진> 


●  함양군민헌장(咸陽郡民憲章)



<참고사진> 


<참고사진> 


●  기타 풍경








                         목백일홍


다래터널


다래


머루터널


머루



설치작품 '타워맨[Towerman]'




상림토요무대




                                      상림공원 / 함양 (1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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