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彌勒寺址)·보석박물관/익산(益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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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국내)/전라북도

2019. 5. 29.



  미륵사지(彌勒寺址)·보석박물관 / 익산(益山)-2

 


☞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시(益山市) 미륵사지(彌勒寺址)와 보석박물관(寶石博物館)

         

         

익산 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위치 <google참고사진>



익산 미륵사지 위치 <google참고사진>



<참고자료>


점심 식사 후 13시45분까지 미륵사지 입구 정문 앞에서 모이기위해 13시32분 삭당을 출발하여 이동합니다. 


 13:39 / 722번 국도[미륵사지로]


13:41 / 미륵산(彌勒山)과 미륵사지(彌勒寺址)


13:45 / 미륵사지 정문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등 4개지구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입니다.



 미륵산(彌勒山)과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산(彌勒山: 430m)


미륵사지와 사자사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삼국유사』무왕(武王)조의 미륵사(彌勒寺) 창건부분을 보면,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龍華山) 밑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하였다. 부인이 왕께 아뢰기를 ‘나의 소원은 이곳에 큰 절을 세웠으면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상(彌勒三像)과 회전(會殿) · 탑(塔) ·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편액을 미륵사라 하니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어 주었다."


 미륵사지 배치도


발굴 결과 절터 아래가 뻘흙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각각 석탑이 있었으며, 또 각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고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서쪽 연못


동쪽 연못



서쪽 연못가


미륵사지 전경 <참고사진>


미륵사지 전경


미륵사 남쪽 아래에 자리잡은 미륵사는 총 10만평에 이르는 너른 절터에 35년에 걸쳐 건설된 백제 최대의 사찰입니다.



 미륵사지 서쪽 당간지주(幢竿支柱)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문 앞에 1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의 미륵사 터에는 동서 두 석탑 남쪽에 1기씩 모두 2기가 있습니다.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모두 같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彌勒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서쪽 당간지주 기단(基壇)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주(支柱)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습니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럼하게 깍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미륵사 가람배치 모형 <참고사진>


탑 하나와 금당 한채를 절 하나로 볼때 마치 3개의 절이 합쳐진 듯한 삼원일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삼원일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이란 남북 일직선의 기본축 중앙에 목탑(木塔)을 세우고 동서 별원(別院)에 석탑을 세운 형식으로 다른나라에는 이러한 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 절이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을 위하여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또 세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용화세계(龍華世界)로 이끈다는 미륵을 위해서 세 군데에 설법장소를 마련하느라 이러한 형식이 나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제 금산사(金堤 金山寺)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 <참고사진>


미륵삼존불은 미륵을 본존불로 모시고 양옆에 두 분의 협시불을 포함해 세분을 모셨다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이라고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앙에 비로자나불(=미륵불), 좌측에 노사나불(盧舍那佛),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말합니다. 미륵불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현세의 부처로서 못다 구한 중생들을 56억 7천만년 후 인간세계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완성시시키고 3회 설법한 후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입니다.




  미륵사 가람배치 모형 <참고사진>


목탑이 배치된 중원(中院)은 규모가 가장 크며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입니다. 석탑이 배치된 서원(西院)과 동원(東院)의 규모는 서로 같은데 역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입니다. 각 원(院) 앞에는 전체 길이 172m에 이르는 긴 행랑건물이 배치되었고 각 원(院)으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이 세 군데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미륵사지석탑과 미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탑]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의 약 2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목조 건축 형식의 목탑이 주로 건립되었습니다. 7세기 초에 이르러 그 목탑의 전통이 이 지역의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이라는 재료와 만나 마침내 미륵사 석탑을 빚어 놓았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면]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7층이었는지 9층이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으나, 80년대 발견된 노반석(露盤石)의 크기와 남아있는 탑신의 비례관계로 미루어 보아 9층이었을 것으로 집작하고 있습니다. 탑이 앉은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 있는 것 만으로도 14.25m에 이르는데, 원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 26m 가량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안에서 마주 통합니다.


                        심주석(心柱石)


1층 가운데 문이 뚫려있는 곳의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형 공간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커다란 돌기둥인 심주석(心柱石)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북쪽면]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 처마 부분이 목조 건축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앝아지고 처마 밑부분의 짜임 등이 간략해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게 보입니다.


                        

                         미륵사지 석탑 [서쪽면]


                         미륵사지 석탑 [동쪽면]


미륵사지 석탑 동남쪽 수호석인상(守護石人像)


탑 주위의 네 귀퉁이에는 수호석인상이 있습니다.  동남쪽 귀퉁이에 있는 것이 비교적 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매우 공손한 모습입니다. 우리 전래 수호신상으로 장승의 원조로 볼 수 있습니다.


수호석인상(守護石人像)


오랜세월 비바람에 노출되고 시달려 거의 돌덩어리가 되어 눈, 코, 입을 분간 할 수 없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1층 처마와 탑신


                        추녀의 맵시에서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솜씨를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풍령(風鈴)을 달았던 구멍


 미륵사지 석탑 남쪽과 동쪽면



미륵사지 석탑 북쪽과 동쪽면



● 오래된 미륵사지 석탑모습



미륵사지 석탑 서쪽모습[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1910): 1915년 콘크리트를 덧씌워지기 전까지의 모습 <참고사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어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정조 때 무장의 선비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는 이미 절이 폐허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미륵사지석탑(동쪽면) <참고사진>


미륵사지 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측면을 중심으로 1층 높이까지 석축이 보강되어 있었고 그 윗부분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수된 상태였습니다.


            미륵사지석탑(1층 해체시 평면) <참고사진>


1층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형 공간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심주석(心柱石)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고대 목탑의 구조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당시 백제 건축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으로 그 가치가 큽니다.


               미륵사지 석탑(양순목씨 사진) <참고사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어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정조 때 무장의 선비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는 이미 절이 폐허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서쪽 회랑지(回廊址)



서원(西院)의 금당지(金堂址)


서원(西院)의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습니다. 금당의 초석은 마름모꼴로 다듬어져 있고 그 위에 원형 주좌(柱座)가 높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각 금당과 탑 사이에는 석등(石燈)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목탑자리와 동석탑 뒤편에는 석등의 지붕돌과 연꽃잎이 새겨진 받침돌(하대석) 등 부재가 남아있습니다.


중원(中院)의 금당지(金堂址)


목탑이 배치된 중원(中院)은 규모가 가장 크며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입니다.


중원(中院)의 금당지(金堂址)와 목탑지(木塔址) 사이의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미륵사터 복원 석등 <참고사진>


                국립전주박물관 뜰에는 미륵사터에서 발굴된 석등 화사석과 지붕돌을 토대로 복원해 놓은 석등이 있습니다.


 동원(東院)의 금당지(金堂址)


동원(東院)의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습니다.


동원(東院)의 금당지(金堂址)


금당(金堂)의 초석은 마름모꼴로 다듬어져 있고 그 위에 원형 주좌(柱座)가 높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동원(東院)의 금당지(金堂址)와 9층석탑 사이의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 <참고사진>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


미륵사터 석등의 연꽃받침은 석등 연꽃받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조각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북쪽면



중원(中院) 금당지 동쪽 회랑지(回廊址)


 강당지(講堂址)


금당자리 뒤편으로는 장대석으로 된 강당의 기단과 층계가 남아 있습니다.


 강당지(講堂址)




강당지(講堂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강당지로부터 북승방지로 연결되는 복도시설의 기초석


강당지(講堂址) 뒤로는 돌로된 옛 교각(橋脚) 위에 나무다리가 걸쳐진 작은 개천을 건녀면 승방 자리의 기단이 있습니다.


 북승방지(北僧房址)




                        북승방지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우물터 <참고사진>


 조선시대건물지<참고사진>


백제시대의 미륵사 중심 구역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정덕 9년, 만력 15년 명(銘) 기와와 1500년대 후반의 백자 등 유물이 집중 출토되어 당시가 전성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1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기와가마터 보호건물: 북승방지 뒤쪽, 조선시대건물지 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기와가마터


미륵사지에는 기와를 자체 공급하기위한 생산시설인 기와가마가 세 곳이 있습니다. 미륵사지 동쪽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가마가 일정 거리를 두고 각각 2개씩 있습니다.


                       미륵사지 내 가마터 위치



조선시대 기와가마터 보호건물 <참고사진>



조선시대 기와가마터 [건물내부] <참고사진>


조선시대가마 2기는 미륵사지 동쪽으로 흐르는 수로의 서쪽 경사면에 30cm정도의 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위치합니다, 이 가마에서 구워진 기와는 미륵사지 북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물지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강당지에서 보는 미륵사지 석탑


강당지 초석


동원 구층석탑(東院 九層石塔)



                        동원 구층석탑


            남아있는 서원의 석탑과 발굴조사 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상륜부와 지붕 네 귀마다 달린 금빛 풍령(風鈴)

     

        탑의 상륜부 명칭<참고자료>


                      


동원(東院) 석탑의 1층 탑신부


심주석(心柱石)


1층 가운데 문이 뚫려있는 곳의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형 공간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커다란 돌기둥인 심주석(心柱石)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습니다.  


                        풍령(風鈴)


 동원 남회랑지·중문지(東院 南回廊址·中門址)


 

 미륵사 복원 모형[동원 남회랑지·중문지(東院 南回廊址·中門址)] <참고사진>


고려시대 기와가마터 위치


고려시대기와가마터 <참고사진>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2기의 가마는 형태가 거의 유실되었으나 내부에서 고려시대 기와와 연우4년으로 기록된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동쪽 당간지주(幢竿支柱)


삼원일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의 미륵사 터에는 동서 두 석탑 남쪽에 1기씩 모두 2기가 있습니다.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모두 같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彌勒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당간지주 기단부와 당간석(幢竿石)의 일부분


  

   미륵사지 당간지주 재현품 <참고사진>


동쪽 당간지주(幢竿支柱) 기단(基壇)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주(支柱)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습니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안내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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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미륵사지 유물전시관(國立彌勒寺址遺物展示館)




 국립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國立彌勒寺址遺物展示館)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國立彌勒寺址遺物展示館)이 2019년 명칭을 국립익산박물관(國立益山博物館)으로 변경하였고 2020년에 증축해서 개관할 예정입니다.



복구전 미륵사지 석탑모형



중앙홀


 중앙홀 <참고사진>




미륵사 가람배치 모형 <참고사진>


미륵산 사진을 배경으로 미륵사의 가람배치 양식과 건축구조, 규모 등을 알 수 있는 모형(1/50)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륵사지 모형은 1980년대부터 1996년까지 약 17년간 실시한 미륵사지 발굴성과를 토대로 추정 복원한 것입니다.




 미륵사 가람배치 모형


             미륵사지 전경(남→북)


                1930년대의 미륵사지 전경 사진입니다. 저 멀리 시멘트로 보수된 미륵사지 석탑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동탑 터 발굴 모습(동→서)


                       1974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가 미륵사지 동탑 터를 발굴조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역사문화실



역사문화실 <참고사진>


백제 무왕(600~641)이 창건한 호국사찰인 미륵사의 석탑(서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속에서 백제 사리장엄의례와 화려하고 완숙한 백제 금속공예기술의 정수를 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보물 1753호 금동향로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금동풍탁(金銅風鐸), 백제시대, 높이 14.1cm

풍탁(風鐸)은 절의 목조 건물이나 석탑 처마에 매달아 소리가 나도록 한 장엄구로서 풍경이라고도 합니다. 동원 석탑지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풍탁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아랫부분 가운데와 양 끝이뾰족하게 돌출되어 있습니다. 배 부분에는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가, 어깨 부분에는 한쪽 면에 두 개씩 유곽(乳廓)이 있습니다. 유곽 안에는 5개의 작고 낮은 유두(乳頭)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안쪽에는 천판(天板)에 바람판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경주 감은사지 출토 청동 소종 등과 함께 우리나라 범종의 원류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금동향로(金銅香爐): 보물 1753호


금동향로(金銅香爐)는 높이 30cm,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입니다. 향(香)은 고온다습한 환경인 인도에서 해충을 쫓거나 실내의 악취와 습기를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불교 성립 이후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쓰였습니다. 이 향로는 둥글게 솟은 뚜껑과 납작한 몸체, 다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뚜껑의 가운데에는 높게 돌출된 보주(寶珠) 모양 손잡이가 달려있고 뚜껑의 네 군데에는 구름 모양의 연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몸체와 다리가 연결되는 곳에는 사자 머리 모양 장식이 붙어 있습니다. 향로 다리는 사자의 다리 모양을 본 떠 만들어졌고 다리와 다리 사이에도 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또 다른 사자 머리 4개가 보입니다. 이와 같이 넓적한 몸체에 동물의 다리가 달린 향로를 중국에서는 수각향로(獸脚香爐)라 부릅니다. 이러한 형태의 향로는 그림이나 조각에서만 보이던 향로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미륵사지 청자




 미륵사지 차 도구(茶道具) / 고려시대


1. 차절구   2, 찻숟가락   3. 찻잔과 잔받침   4. 백자 완   5. 청자 꽃 모양 국화무늬 접시   6. 청자 주전자



 

다양한 중국동전, 청자파편과 차 도구



                  청동제보살손{고려시대), 길이 27.7cm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곧게 펴고 가운뎃손가락과 약손가락은 살짝 구부리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나 손목이 장식된 팔찌로 보아 보살상의 일부로 생각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청동제보살상의 손과 손목 부분이 27.7cm에 달한다는 것은 원래는 실제 사람 키에 가까운 크기의 보살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펼쳐진 손의 형태가 완주 봉림사지의 석조삼존불 협시보살과 닮아 대략 10~11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 기와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 복제품


 



★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



                      2009년 1월 사리장엄 발굴직후 사진 <참고사진>


2009년 1월14일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과정에서 석탑 1층의 기둥돌(심주석/心柱石) 안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리장엄 최초 노출상태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함께 봉안된 여러가지 공양물을 의미합니다. 이 사리장엄구는 석탑을 처음 세울 때 모셔진 것으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 보물[보물 제1991호]지정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위의 목록 중 총9점(금동제사리외호 1점, 금제사리내호 1점, 금제사리봉영기 1점, 청동합 6점)이 2018년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금동제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 [보물 제1991호] <참고사진>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되며,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습니다.



 

 금제사리봉영기 [보물 제1991호], 앞면(가로 15.3㎝, 세로 10.3㎝, 두께 0.13㎝)과 뒷면(왼쪽) <참고사진>


<참고사진>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 사리로 일곱 번을 돌게하였으니,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였다. 우리 백제황후(百濟王后)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광겁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世世)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겁겁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립(王位)[寶曆]은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永遠)토록 다함께 복이(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습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청동합 [보물 제1991호] <참고사진>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습니다.


                       






2) 그 외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관꾸미개(銀製冠飾)

                         




                                       금 족집게

  

                                     납유리판

  

                                 청동 합 내부 유물

         [진주, 호박, 옥, 유리구슬, 금구슬, 금판, 금못]

<참고사진>








③ 건축문화실



건축문화실 <참고사진>


창건시 웅장하고 화려했던 미륵사의 건축부재를 통해 미륵사의 창건과정과 변천에 대한 그림 및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대별 막새




 치미(鴟尾)



                        미륵사지 목탑모형




15시경 미륵사지 답사를 마치고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하여 약10여분 후 보석박물관에 도착하였습니다.




익산 보석박물관(益山寶石博物館)





익산 보석박물관(益山 寶石博物館) 위치 <google참고사진>


익산 보석박물관(益山 寶石博物館) 위치 <google참고사진>




 <참고자료>


15:22 / 익산 보석박물관(益山 寶石博物館)


익산(益山)은 1974년 구, 이리공업단지였던 익산국가산업단지(益山國家産業團地)가 준공되어 1975년에 수출특화산업으로 귀금속, 보석가공 수출업체를 집단화하여 국내유일의 귀금속산업단지인 이리귀금속 보석가공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보석의 도시 익산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보석하면 떠오르는 도시 익산으로 자리매김하며 지역의 특화산업인 귀금속 가공산업의 우수성과 보석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위해 미륵사지 석탑, 왕궁리 유적, 익산쌍릉 등 백제문화유적과 연계한 문화공간으로 국내 유일의 보석박물관을 2002년 개관하였습니다. 


시설물안내도 <참고사진>


 익산 보석박물관(益山 寶石博物館)


보석박물관 전시실에는 11만 5천여점의 진귀한 보석과 원석을 전시하고있으며, 어린이들이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화석전시관이 마련되어있어 화석 및 공룡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0년 우리나라 최고의 귀금속보석 전시판매장인 ‘주얼팰리스’가 개관하여 국내외 약 60여 개의 주얼리판매업체가 입점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보석광장, 야외무대, 칠선녀상 등 조형물들과 화석전시관 주변에 공룡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 <참고사진>



 탄생석 5월-에메랄드


 금동신발, 익산입점리고분군, 길이 31.5cm



 익산 미륵사지 목탑 추정모형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





  원석 채광


                        보석꽃



 세계의 광물




                       



벽옥(碧玉)






                                              



토파즈





다이아몬드


'주얼팰리스' 귀금속보석판매센터


조형물 '영원한 빛'



                     야간 조명 아래조형물 '영원한 빛' <참고사진>


 조형물 '칠선녀상'


 칠선녀광장 농악공연


포토존


16:11 / 보석박물관 주차장


시티투어 마지막 코스인 보석박물관을 둘러보고 16시 20분경 투어버스에 승차 후 익산역으로 출발하여 16:50분경 도착하였습니다.  

18:10분 출발 센트럴시티행 고속버스 예약으로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익산문화예술의거리'를 둘러보았습니다.




익산문화예술의거리





16:55


일본식 가옥


거리공연







익산근대역사관: 등록문화재 제180호[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익산근대역사관: 등록문화재 제180호[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1층 내부




                       금고 출입문[해방 후 한국흥업은행, 국민은행으로 사용될 당시의 은행금고]


                      창호 원형 부재





                    항일운동





2층 내부





익산근대역사관 2층에서 내려다 본 역사관 광장


2층 창호


1층 천장


근대역사관 광장






미륵사지(彌勒寺址)·보석박물관 / 익산(益山)-2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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