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쌍릉(雙陵)·왕궁리(王宮里)유적/익산(益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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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국내)/전라북도

2019. 5. 28.



익산쌍릉(雙陵)·왕궁리(王宮里)유적/익산(益山)-1


☞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시(益山市) 익산쌍릉(益山雙陵)과 왕궁리유적(王宮里遺跡)

         


익산시 익산 쌍릉(益山 雙陵) 위치 <google참고사진>



경주, 공주, 부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고도(古都)의 하나인 익산(益山)을 답사하기 위해 익산시티투어 세계유산 코스[매월 4째주 토요일]를 이용하였습니다.  서울센트럴시티미널에서 06시40분 출발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09시20분경 익산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익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익산역까지는 도보로 약 15분 소요됩니다. 시티투어버스 출발지점을 확인하고 출발시간 10시 전까지 익산역 구내 및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시(益山市)




                            전라북도 행정구역 <참고자료>


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습니다. 호남선이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와 1번,  23번 국도 및 10여개의 국도.지방도 등이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고대도시 익산



익산미륵사<참고사진>


  마한시대

 기자의 41대 손인 준왕이 위만의 난리를 피해 한 땅에 들어와 마한 세움 [건마국(乾馬國): 54개국 중의 하나로 소국]

 백제시대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 금마저(金馬渚:금마)라 했으며 소력지현(所力只縣:구 이리시 지역), 지량초현(只良肖縣:여산),

 감물아현(甘勿阿縣:함라)이 있었음

 신라시대

 신라 경덕왕이 16년 행정구역 변경과 지명 변경에 의하여 옥야현이 금마저의 영현(領縣)

 고려시대

  - 995년 고려 초기 전주에 속하였다가 忠宜王 5년(1345) 郡을 州로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함
  - 성종14년 행정구역 개편하여 지방을 10도로, 그 밑에 주, 부, 군, 현을 설치 후 강남도로 칭하여 오다 금마군으로 칭함

 조선시대

 1413년 태종13년 행정구역을 8도로 정비, 전라도는 1부(전주) 4목 7도호부 12군 31현을 두고 12군 중 익산군으로 칭함

 일제 강점기

  - 1911년 8월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김
  - 1914년 3월1일 부군(府郡) 폐합으로 함열현, 용안현, 여산군을 병합하여 익산군이 됨 (1읍 17면) 
  - 1914년 10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의 통폐합시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병 익산면이 됨
  - 1931년 4월1일 지방제도 개정으로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승격
  - 1931년 11월1일 익산읍을 이리읍으로 개칭
  - 1933년 12월1일 이리읍 12정(町)으로 나누었으며, 조국광복과 더불어 동(洞)으로 명칭 개칭

 정부수립 이후

 - 1947년 4월1일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이리읍이 부로 승격되고 익산군에서 분리됨

<익산문화원 홈페이지 참조>





09:23 / 익산공용버스터미널


          익산고속버스터미널→ 익산역:  도보 약 15분 소요  <google참고사진>


 09:36 / 익산역


      익산역 앞 시티투어탑승장 위치  <google참고사진>


09:52 / 익산 시티투어탑승장


10:00시 익산역을 출발하여 익산문화원입구에 도착하여 10시20분까지 머무른 후 익산쌍릉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익산은 능(陵)과 성(城) 그리고 궁(宮)과 사찰(寺刹) 등 고대국가 수도로서의 자격요건을 모두 갖춘 남한 내의 유일한 도시입니다. 익산은 일찍이 호남지역의 중심지로서 한국고대문명의 요람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축으로 대한민국에서 수도(首都)를 네 번이나 한 지역입니다. 첫 번째는 고조선(古朝鮮) 준왕(準王)이 기원전 198년경 남하하여 금마(金馬)에 수도를 세웠고, 두 번째는 마한(馬韓)의 수도로 금마지역은 마한 54개국을 총괄하던 도읍지였습니다. 세 번째는 서동, 선화로 잘 알려진 백제(百濟) 무왕(武王)이 왕궁으로 천도한 것으로 백제의 왕궁 터가 남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보덕국(報德國)의 수도로서 고구려 왕손 안승(安勝)이 세운 나라입니다. <익산시 자료>


위와같은 익산시의 자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내용에 대해 뚜렷한 증거가 없어 여러 주장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까지 제기되고 있어 앞으로 결정적 단서가 나와 역사적인 사실이 확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덕국(報德國):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 금마저(金馬渚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설치했던 고구려 유민의 나라. 존속기간 674(문무왕 10)∼684년(신문왕 4)



10:32 / 익산쌍릉 주차장[시티투어버스]




익산쌍릉(益山雙陵):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 위치 <google참고사진>


익산쌍릉 전경 <NAVER참고사진>


익산시 석왕동에 자리하고 있는 익산쌍릉은 백제말기 굴식 돌방무덤으로 남북으로 약 180m 사이를 두고 2개의 봉분이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 크고 북쪽에 있는 무덤은  ‘대왕뫼’,  ‘말통대왕릉’ 또는 ‘대왕릉’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남쪽에 있는 규모가 약간 작은 능은  ‘소왕뫼', ‘소왕릉’으로 불립니다. 여기의 ‘말통’은 서동의 이름인 마동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13년(1326) 왜구에 의해 여러 차례 도굴되었으며,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굴이 실시되었습니다.


                                         대왕릉                        <문화재청참고사진>                          소왕릉


익산쌍릉 주인공에 대해서는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의해 “백제 무왕의 능이다, 고조선 무강왕 능이다”“라는 설로 주장이 양분되어 있습니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무강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백제의 무덤양식인 부여 능산리고분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과 같은 형식으로 백제 무왕의 미륵사지의 창건이나 왕궁리유적의 조성과 관련지어 본다면 설화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의 능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나 뚜렷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쌍릉 주차장 앞 안내판



                               <참고사진>


소왕릉으로 먼저 향했습니다.


소왕릉(小王陵)은 발굴조사 중 


익산쌍릉 중 소왕릉(小王陵)은 현재 가림막을 설치하고 발굴조사 안내 플래카드를 내걸어 2019년 4월10일부터 전북 익산시와 문화재청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등과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소왕릉(小王陵) 고유제(告由祭) <참고사진>


 2019년 4월10일부터 소왕릉 발굴조사에 앞서 4월9일 소왕릉에 모셔진 영령을 위로하고 조사단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고유제

 (告由祭) '를 진행하였습니다.


소왕릉 발굴조사지 옆에 걸려있는 청주한씨종친회 주장 플래카드


청주한씨 문중에서는 대왕릉(大王陵) 과 소왕릉(小王陵)을 고조선의 준왕(準王) 즉, 자신들의 시조(始祖)인 ‘마한(馬韓)의 태조(太祖) 무강왕(武康王)과 무강왕비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앞서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대왕릉 발굴에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관대(棺臺: 관을 얹어놓는 넓은 받침) 위에서 수습한 상자 속 인골 분석을 통해 ‘60대 전후 남성 노인으로 160∼170.1㎝, 사망 시점 620∼659년’이라는 결과를 공개하며 대왕릉이 641년에 사망한 무왕 무덤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한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청주한씨 종친회는 “고려사에 청주한씨 시조인 무강왕릉으로 기록된 익산 쌍릉을 익산시 등이 백제 무왕릉으로 일방적으로 추정발표했다”고 주장하며 "대왕릉은 ‘청주한씨 시조인 마한태조 무강왕릉‘이다”며 ‘익산 천도나 백제왕도’ 및 ‘대왕릉의 무왕릉 주장’은 완전 허구이고 역사왜곡이라며 청주 한씨로 쌍릉 땅 반환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플래카드에 "마한태조 무강왕릉 수호(선우, 한, 기씨)범대책 위원회"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선우, 한, 기씨가 모두 무강왕(武康王)의 자손이 되는셈인데요 살펴보면, 마한(馬韓) 말년 원왕(元王)이 백제 온조왕(溫祚王)에게 나라를 빼았길 때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입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자 (1) 우평은 고구려에 귀의하여 유리왕(琉璃王)을 섬겨 북원(北原) 선우씨(鮮于氏)가 되었고, (2) 우량은 신라에 귀의하여 탈해왕(脫解王)을 섬겨 상당(上黨)한씨[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으며, 友諒(우량)의 32세인 란(蘭란)이 시조(始祖)가 됩니다  (3) 우성은 백제에 귀의하여 온조왕을 섬겨 덕양(德陽) 기씨(奇氏)가 되었다고 전해오고있습니다.


소왕릉(小王陵) <문화재청사진자료>


쌍릉(雙陵)의 소왕릉(小王陵)은 대왕릉(大王陵)의 비(妃) 능으로 알려져 있으며, 1917년 12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굴 조사됐지만 조사가 며칠 만에 이뤄져 정식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데다 약식 보고서만 남아 있어 출토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조사에 의하면  소왕릉은 지름 24m, 높이 3.5m 정도의 원분(圓墳)이었고, 내부는 판석조(板石造)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길이 3.2m, 너비 1.3m·높이 1.7m의 크기였습니다. 


 

1917년 발굴시 소왕묘 출토 유물 <참고사진>


가림막 틈으로 본 소왕릉


이번 소왕릉 발굴은 쌍릉의 종합적인 정비와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연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훼손된 소왕릉의 모습을 확인하고 봉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규모와 형태 등 세부사항을 확인할 예정입니다.


  현재는 치워진 소왕릉내 청주한씨 석물(2007.4~2008.7)  <참고사진>


원형의 봉토분으로 원래는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었던 익산쌍릉(대왕릉과 소왕릉)석물(石物)들이 2007년 4월 무단으로 설치되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고발조치까지 된 끝에 청주한씨(淸州韓氏) 종중에 의해 2008년 7월 말경 자진 철거됐습니다.



소왕릉 발굴현장


소왕릉에서 대왕릉으로 가는 숲길


숲 사이로 보이는 대왕릉(大王陵)


소왕릉에서 대왕릉으로 오는 숲길


대왕릉(大王陵)


익산쌍릉(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마한의 무강왕(武康王)? 또는 백제 무왕(武王)?]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의견은 분분한 상태지만, 최근 발굴조사 결과는 대왕릉의 주인으로 백제 제30대 왕이자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일 확률이 높지만 아직 충분한 증거가 부족한 형편입니다.

 

쌍릉 안내판

                                             


                               1917년 발굴 당시의 출토유물 <참고사진>



1917년 대왕릉 발굴조사




               대왕릉(大王陵) <조선고적도보/국립문화재연구소자료>


익산쌍릉(益山雙陵)은 1917년 일제에 의해 발굴되었을 때 당시 13줄 분량의 보고서에는 무덤 주위에 호석이 둘려 있는 것, 무덤구조, 그리고 이것이 왕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발굴 당시 이곳에서 나온 목관의 형태, 관재, 그와 결부되어있던 여러가지 금부 장식들을 보면 이곳이 왕릉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왕릉(大王陵)의 봉토는 지름 30m, 높이 5m 정도의 규모로 원분(圓墳)이고, 내부는 길이 3.8m, 너비 1.78m, 높이 2.27m의 판석조(板石造) 굴식 돌방무덤이었으며, 널길[연도(羨道)]은 남벽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익산쌍릉 대왕묘 연도(羨道) 폐쇄석 <참고사진>


대왕릉의 경우 널길의 규모는 너비 1m·높이 1.5m이고, 길이는 1m 정도이며, 널문[연문(羨門)]과 널길의 입구는 폐쇄석[폐쇄고정석]으로 장방형의 판석(板石)을 세워 막고 있습니다. 네 벽면과 바닥, 그리고 천정은 모두 다듬은 판석(板石)으로 축조하고 있는데, 특히 양 측벽과 천정 사이에는 장대석을 안으로 기울어지게 끼워 단면 6각형의 괴임식 구조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익산쌍릉 대왕묘 목관의 발굴당시 모습 <참고사진>


익산쌍릉 대왕묘의 현실에는 바닥의 중앙에 바닥면보다 한 단 높은 길이 2.71m, 너비 0.85m 크기 한 장의 판석으로 된 널받침[관대(棺臺)]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위로 목관이 올려져 있었으며 목관은 부식 등으로 인해 뚜껑과 측판이 분리된 채 놓여 있었습니다.


익산쌍릉 대왕묘 출토 목관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시할 때의 모습] <참고사진>


조사 당시 고분은 이미 도굴되어 이렇다 할 유물은 남아 있지 않았는데, 다행히 대왕릉 안에서 부식(腐蝕)된 목관을 수습하였습니다.


대왕릉 목관 실측도 <참고사진>


                                                    대왕릉 복원 목관 <참고사진>



복원 결과 목관은 바닥면보다 위쪽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단면이 둥근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이 목관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려 있으며, 관고리에는 8엽 연화문의 좌금구(座金具)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으며 복원된 목관의 크기는 길이 2.4m, 너비 0.76m, 높이 0.7m 정도의 크기입니다. 



익산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



 

       발굴당시 석실에서 출토된 적갈색 토제완(土製盌) <참고사진>

 현재는 토제완(土製盌)의 구연과 동체 일부가 결실되었음 <참고사진>

토제완(土製盌)


대왕릉 관대의 남쪽 아래에서 엎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으며, 형태로보아 7세기 익산 지역의 특징이 반영된 토기로 보는 견해와 신라계 토기로 보는 견해가 함께 있습니다.


                                    

                             옥 꾸미개(玉製裝身具) <참고사진>


당나라 요패(腰佩)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옥제 요패는 문무관 3품 이상의 최고위 관료나 왕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마루어 보아도 이꾸미개는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 사용한 물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관 뚜껑과 금동 밑동쇠(木棺蓋 金銅製座金具) <참고사진>


                              대왕묘 목관에서 확인된 치아들 <참고사진>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의 일환으로 1917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익산 쌍릉의 출토 유물을 정밀 분석한 결과 대왕묘의 목관(木棺) 내부에서 성인(20~40세) 여성의 치아일 가능성이 높은 치아 4점이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치아 4점은 모두 한 사람의 것으로 크기가 여성의 평균치보다 약간 작으며 상태가 양호한 송곳니와 어금니는 20~40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왔으나 여성 치아 4점이 확인돼 무덤 주인이 왕족에 준하는 최상급 계층의 여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무왕 무덤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무왕의 무덤을 조성한 건 아들인 의자왕이고 의자왕은 부여를 근거지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우영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 전주박물관의 치아 조사는 논리적 접근 방식으로는 합당했지만, 치아만으로 성별과 연령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뼈 길이와 두께 등을 고려해 봤을 때 전주박물관이 분석한 치아도 남성 노인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어느쪽의 주장이 옳은지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종중에 의해 설치되었던 석물(石物), (2007.4~2008.7) 



현재는 치워진 대왕릉 앞 석물 <참고사진>


원형의 봉토분으로 원래는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었던 익산쌍릉(대왕릉과 소왕릉)에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석수(石獸) 등을 봉토 앞쪽에 2007년 4월 무단으로 설치되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고발조치까지 된 끝에 청주한씨(淸州韓氏) 종중에 의해 2008년 7월 말경 자진 철거되었습니다.



● 2017년 대왕릉 발굴조사



대왕릉(大王陵)



대왕릉(大王陵) 고유제(告由祭) <참고사진>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던 이후 100년만인 2017년 9월25일부터 대왕릉 정밀 발굴조사에 앞서 9월21일 대왕릉 앞에서 조사의 안전기원과 무왕(武王)을 기르는 고유제(告由祭)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진행되는 발굴조사에서는 대왕릉의 모습을 지형 복원하며 발굴된 고분을 실측해 봉분 축조방법, 석실규모를 밝혀낼 예정이며 지하 물리 탐사 등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대왕릉의 주인, 피장자를 밝히려 합니다.


대왕릉의 현실(玄室)과 인골(人骨)이 담긴 나무상자 <참고사진>


2017년 1차 발굴 때 대왕릉은 백제 사비기의 전형적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 왕릉급 무덤으로 확인하였으며 또한 석실 내부 끝부분에서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진 적 없는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했지만, 이는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골(人骨)이 담긴 나무상자 <참고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 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습니다.


 

        인골(人骨)의 상태확인과 분류작업 <문화재청>

2018년 4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대왕릉에서 발견된 102개 인골 조각을 분석한 결과 남성노년층의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하였습니다.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해 산출한 결과 키는 161㎝에서 최대 170.1㎝로 보고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추정하였습니다. 19세기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키가 161.1㎝인 것을 볼 때 당시로서는 큰 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한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높았으며,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를 했을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쯤에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 결과는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백제 왕들의 무덤이 부여나 공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달리 왕릉급 무덤이 이례적으로 무왕의 고향인 익산에서 발견된 점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동안 대왕릉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능묘라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분석으로 ‘쌍릉=백제 무왕설’에 무게를 둘 수 있게 됐습니다.


21m 길이의 묘도(墓道) <참고사진>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익산시와 함께 조사한 대왕릉 2차 발굴조사(2018. 5~11) 과정에서 백제 고분으로는 길이가 가장 긴 묘도(墓道: 무덤의 입구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가 확인되었습니다. 확인된 묘도의 길이는 21m,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 가량의 최대급 규모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4~6m인 묘도 길이보다 길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석실 입구측 묘도 너비는 4m 정도이고, 묘도 시작부분의 너비는 6m 내외입니다. 바닥의 높이는 80cm 정도로 석실 입구쪽이 높게 되어 있습니다.


묘도(墓道) <참고사진>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대왕릉은 석실을 먼저 만들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긴 묘도를 조성했다"며 "길이 21m인 묘도는 시신을 납입하기 위해 마련했고, 석실을 축조하기 위해 낸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묘도가 존재했다"고 밝히고 "석실을 만들 때 사용한 묘도는 길이가 훨씬 짧다"며 "석실을 완성한 뒤에는 일부러 폐쇄한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사비기 최대 규모의 무덤방(石室) <참고사진>


이번 조사에서는 중앙에 입구를 마련하고 대왕릉 고분 축조 과정에서 단면육각형의 석실이 먼저 만들어지고 시간이 흐른 후에 긴 묘도를 만들어 봉분이 완성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대왕릉이 피장자 생전에 철저히 준비한 수릉(壽陵: 살아있을 때 미리 마련해 두는 임금의 능)일 가능성의 근거를 찾은 것입니다.  


 발굴조사 모습 <참고사진>


 판축(板築) 모습 <참고사진>


발굴조사에서 백제 최초로 대형 왕릉에 대한 봉토(封土: 석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흙)를 확인하였는데 흙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판축(板築: 건축물 지반을 다지기 위해 흙 등을 여러 겹으로 단단히 다지는 기법)으로 아주 단단하게 쌓여져 있고, 지름 25m, 높이가 5m가 되는 대형 봉토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봉토 축조기법은 인근 제석사나 미륵사에서 탑지나 금당에 썼던 판축수법과 똑 같습니다.
             

도굴로 인한 석실 내부 구멍과 그 옆의 그을음 흔적 <참고사진>


고려사에도 석실을 도굴 당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이번 조사에서도 두군데의 도굴 흔적을 찾았습니다.

                               

                                     판석(板石) <참고사진>


                           이번 조사에서 석실의 커다란 판석의 형태가 미륵사지 석탑 가공 수법과 똑같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대왕릉 발굴조사 결과 학자들은 출토된 목관이 부여에 있는 무령왕릉(武寧王陵)의 목관과 같은 재질로 일본에서 들여온 목재라는 사실을 밝혀 냈고, 묘제도 청주 한씨(淸州韓氏)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준왕(準王ㆍ武康王) 시기인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묘제가 아니라 이보다 800년 가량이나 늦은 백제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입증했습니다. 특히 내부에서 수습된 인골(人骨)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백제 30대 무왕(武王·재위 기간 600∼641)으로 특정할 수 있는 성과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무덤 주인을 무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골의 부식이 심해 유전자(DNA) 분석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며, 또 쌍릉은 고려 충숙왕 때인 1327년 도굴됐다는 기록이 있는 등 일제강점기까지 지속적으로 훼손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한편 2016년 발견된 치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대 위에 놓여있던 인골은 과연 1917년 대왕릉에서 수습된 인골이 확실한지 등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확인된 바가 없기에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익산쌍릉(益山雙陵), 대왕릉(大王陵)



대왕릉 한쪽 가에 세워진 청주한씨 공적비[淸州漢公諱昌敎功績碑(청주한공휘창교공적비)] 앞면과 뒷면


'한창교공적비' 뒷면에는 이 공적비를 '마힌왕손(馬韓王孫) 청주한씨팔봉왕릉종친회'에서 세웠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10:57 / 대왕릉 앞 숲속의 넓은 판석


판석의 받침돌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무슨 연유가 있는 유구(遺構)? 같아 보입니다만. 이곳에서 익산쌍릉의 답사를 마치고 왕궁리유적지로 이동하였습니다.



                          <보완자료: 2019년 소왕릉 발굴조사[뉴시스 기사자료: 2019.09.19]>


        익산 쌍릉에서 국내 최초 왕릉급 묘표석 2개 발견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전경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석비(石碑)형과 석주(石柱)형 묘표석이 나왔다. 익산시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시행한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 발굴 조사 중 소왕릉에서 묘표석을 확인했다. 익산 쌍릉은 익산시 석왕동의 백제 시대 무덤이다. 대왕릉과 소왕릉이 180m가량 서로 떨어져 있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 능으로 알려져 왔다. 고려 시대에 이미 도굴된 기록도 있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발굴한 바 있다. 정확한 정보는 남기지 않았다. 2017년 8월부터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어 왔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석실 전경


소왕릉에 대한 발굴조사는 올해 4월 고유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봉분과 묘도의 축조과정과 양상을 파악했다. 일제강점기 발굴 흔적과 그 이전 도굴 흔적을 확인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국내 최초로 왕릉급 고분에서의 석비형과 석주형 묘표석 발견이 주목할 점이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묘표석 안에서 밖


석비형 묘표석은 일반 비석과 유사하다. 석실 입구에서 약 1m 떨어진 지점에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확인됐다.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다. 석실을 향한 전면은 정교하게 가공됐고, 그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다.석주형 묘표석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 내에서 뉘어진 상태로 발견돼 원 위치는 불분명하다.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이다. 상부는 둥글게 가공됐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 형태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석실과 묘표석


이들 묘표석은 문자가 새겨지지 않은 형태로 발견됐다. 석주형 묘표석과 비슷한 예는 중국 만주 집안(集安) 지역의 태왕릉에 있는 고구려 봉토석실분인 우산하(禹山下) 1080호 봉토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번에 묘표석들이 나온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 높이 2.7m 정도다.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됐다. 이는 대왕릉 판축기법과도 유사하다. 석실은 백제 사비시대 전형적 단면 육각형 굴식돌방무덤이다. 석실 규모는 길이 340㎝, 폭 128㎝, 높이 176㎝다. 이는 길이 400㎝, 폭 175㎝, 높이 225㎝에 달하는 대왕릉의 석실에 비해 작은 편이다. 측벽 2매, 바닥석 3매, 개석(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의 구조 짜임새는 동일하다. 석재 가공도 치밀하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현실 입구


고분 입구에서 현실까지 어어진 연도는 짧은 편이다. 연도 폐쇄석과 현문 폐쇄석이 두 겹으로 구성되어 대왕릉과 같은 양상이다. 소왕릉 석실의 바닥에는 관을 얹어놓던 관대가 있었다. 관대 크기는 길이 242㎝, 폭 62㎝, 높이 18㎝에 달한다.  묘도는 석실 입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규모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다.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10m 가량이다. 일정한 성토(盛土)를 통해 묘도부를 조성한 후 되파기한 걸로 판단된다. 폐쇄부는 점질토와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았다. 묘도부 10m 지점 끝단에서는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반원형상 석재를 놓아 묘역의 범위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내부 도굴괭


석실 천장의 북동쪽 천장부를 받치는 고임석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길이 68㎝, 높이 45㎝ 정도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소왕릉은 선화공주와 관련된 설화를 간직하는 고분으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번 발굴에서는 이와 관련된 적극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으나 봉토와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서 왕릉급 임을 확인했다.  


associate_pic4             익산 쌍릉 소왕릉 석실 폐쇄 전경


특히, 이번에 발견된 묘표석은 석실 입구와 봉토 중에 위치한 점, 문자가 없는 점에서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鎭墓)와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백제 왕실 장묘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남은 조사와 인근 대왕릉과의 비교검토를 통하여 주인공의 실체가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장 공개는 20일 오후 2시에 열린다.   


2019-09-19  / 이수지 기자  




익산 왕궁리유적(益山王宮里遺蹟): 사적 제408호




익산시 왕궁리유적 위치 <google참고사진>



익산 왕궁리유적 위치 <google참고사진>


                            익산 왕궁리 유적지 <google참고사진>


익산시 왕궁면 용화산 남쪽 끝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이 백제의 궁성터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대동지지』(김정호)의 ´익산 별도(別都)´ 기록과 「관세음응험기」(일본 청렴원 발견)의 ´백제 무왕 지모밀지(枳慕蜜地) 천도´기록이 왕궁리유적의 소재지명인 왕궁면의 ´왕궁(王宮)´과 연관되어 백제의 무왕 혹은 보덕국의 안승, 후백제의 견훤이 경영하였던 왕궁터로 인식되어 왔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무왕대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 <참고사진>


'왕궁리유적지'는 백제 무왕대에 조성된 왕궁터로 평지성 구릉 내부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평탄대지를 조성하여 정무공간,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왕궁이었음이 최근 발굴조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왕궁은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내외의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쌓고 내부에는 왕이 정사나 의례를 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정전 건물지 등 14개의 백제시대 건물지가 조사되었습니다. 아울러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백제 최고의 화장실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백제 무왕대 말기나 의자왕대 궁성으로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탑-금당-강당으로 구성된 1탑 1금당식 사찰로 그 성격이 변화된 것은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오층석탑과 그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를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 왕궁리유적전시관



 11:14 / 왕궁리유적전시관 표지석



★ 야외전시



 야외 전시 석제품[계단석(階段石), 갑석(甲石: 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  및 뒤쪽의 백제왕 계보 팻말



야외 전시 석제품[면석(面石), 지대석(地臺石)]



야외 전시 석제품[정원석(庭園石), 초석(礎石)]



 왕궁리유적 출토기와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백제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되어 2008년 개관하였습니다. 자체보유 유물과 국가귀속 위탁유물 등 1,800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금제품, 유리제품, 인장와, 수막새, 토기류 등 300여점을 전시하여 백제 왕궁에서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안내도


① 왕궁리유적전시관   ② 만남의 광장   ③ 백제광장   ④ 파고라   ⑤ 정자   ⑥ 왕궁리유적 표지석   


                




★ 기획전시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 /은제 도금 금강경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 /유리사리병, 금제방형사리합


 

왕궁리5층석탑(1917년)                                                               왕궁리5층석탑 탑신부 해체과정(1965) 


 

왕궁리5층석탑(기단부심초석하부조사)                                             왕궁리5층석탑(기단부사리공)


 

왕궁리5층석탑 탑신부 해체과정(1965)                                          왕궁리5층석탑 탑신부 복원과정(1966)  


 

2층탑신부 사리장엄부 개봉                                                            1층 탑신부 사리함 내부(1965)


왕궁리유적지 궁성모형도



★ 상설전시



백제문화연표


 

공산성(공주)                                                                              관북리유적(부여)


 왕궁리유적(익산)


                         궁성터축소모형




 궁성터축소모형 상세




 왕궁리유적배치도 상세


대형 항아리



대형화장실 유적


 화장실 유적1


 화장실 유적1,2



연통장식(煙家)



공방 재현



 

                                                                                  금제품(金製品)


변기형토기(便器形土器)


정원 모형


                                              왕궁리5층석탑






★ 전시관 체험




전시관 홀 어좌체험



● 왕궁리유적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왕궁리유적]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등 4개지구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입니다.



왕궁리유적지 입구









① 정전건물지   ② 왕궁리5층석탑   ③ 금당지   ④ 강당지   ⑤ 와적기단건물지   ⑥ 정원   ⑦ 동서석축1   ⑧ 동서석축2   ⑨ 동서석축3   ⑩ 동서석축4   ⑪ 화장실유적   ⑫ 공방(폐기장)


남성벽(南城壁)



남측궁궐담장전경 <참고사진>


왕궁리5층석탑


 대형건물터(大形建物址)


대형건물터(大形建物址)




<안내판>


                                      '수부(首府)' 명(銘) 인장와 <참고사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 (王宮里 五層石塔)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탑의 기단부(基壇部)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탑신부(塔身部)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습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습니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습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왕궁리5층석탑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습니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됩니다.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자료>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국보 제123호


 왕궁리5층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은제도금금강경판


                  금강경판 외합과 사리합[청동주칠도금사리외합, 금제방형사리합]

  

 유리사리병과 금제방형사리합                                                                              금동여래입상 

                                                                <문화재청참고사진>

 



건물터




건물터



기와 가마터



       기와 가마터



동쪽 담장




건물터








 건물터



                                                       정원중심시설(庭苑中心施設)


정원중심시설도(庭苑中心施設圖)


 정원중심시설(庭苑中心施設)


              정원 중심시설 전경(남쪽에서)







정원(庭苑)





 역U자형 대형수로






후원중심건물지






서쪽 담장


후원 북문지 방향




                                                                              곡수로(曲水路)


곡수로(曲水路)


곡수로(曲水路)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


                          <참고사진>





                                                                                            공방지







강당터



 강당터(講堂址)



강당터전경(講堂址全景)





                                                                     금당터


당터(金堂址)








                                                                    건물터


석탑에 연접해 있는 건물터



건물터




12:35분 왕궁리유적 답사를 마친 후 시티버스에 탑승하여 미륵사지로 이동하였으며 점심을 먹은 후 13시45분 미륵사지 정문 앞에서 모여 미륵사지 답사를 시작합니다. 


 점심:  순두부백반


                       









익산쌍릉(雙陵)·왕궁리(王宮里)유적/익산(益山)-1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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