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영주(榮州)-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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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여행(국내)/경상북도

2019. 10. 1.



                  부석사(浮石寺) / 영주(榮州)-2

 


☞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부석사(浮石寺)

         


영주시 부석사 위치 <참고사진>



● 세계문화유산 영주 부석사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경북 영주 부석사]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는 2018년 6월30일  대한민국의 산사(山寺) 7곳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山寺) 7곳의 사찰은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입니다.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



부석사 버스종점


'선비촌 버스정류장'에서 12시16분 탑승한 27번 버스는 12시35분 '부석사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12:40~13:10 / 점심

 

부석사주차장 옆 폭포공원


 기념사진 촬영지


부석사 입구의 폭포호수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호수 가장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연출합니다.



부석사(浮石寺) 안내판




부석사(浮石寺)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문무왕16년(67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문무왕의 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화엄사(華嚴寺)에서 지엄(智嚴)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고있던 의상대사는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후 의상이 주석하여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서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곳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원융대덕(圓融大德: 964~1053)이 주석하면서 대장경을 찍었는데, 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는데 '선달'이란 '부석(浮石)'의 뜻을 풀어 한글로 적은 '선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는 지금보다 큰 사세를 유지한듯이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는 수많은 법당, 선당, 승당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석사 가람배치도



부석사 가람배치도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있는 큰 바위가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합니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의 하나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습니다.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북지리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으며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



 13:24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바깥쪽에는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부석사가 앉은 곳은 봉황산(鳳凰山) 자락이지만 봉황산은 크게보면 태백산(太白山)의 한 봉우리로 부석사는 태백산 품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이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웠습니다.


 일주문(一柱門) 안쪽


                                    

                                    쪽 현판


일주문 안쪽에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부석사가 해동화엄의 종찰이 된 건 화엄종(華嚴宗)의 시조(始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부석사(浮石寺)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부석사 경내로 오르는 길 양쪽에 펼쳐진 사과나무밭 사과는 다른 곳의 사과보다 유난히 맛이 달고 향이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과나무 밭길이 끝나면 이어지는 숲길


부석사 중수기적비(浮石寺重修記蹟碑)


최근에 세운 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는 안상(眼象)이 새겨진 지대석(地臺石) 위에 앙련(仰蓮)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갈돌을 지대석과 앙련 위에 잔뜩 얹어놓았는지 모를일입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 (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부석사의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 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28m 입니다.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유물로서 1300여년전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을 것입니다.


                               



당간을 지탱하는 양지주가 1m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습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습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으며,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습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공(圓孔)을 뚫은 원형대석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며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안정감을 줍니다. 각 부분의 조각은 대체로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당간지주 중 가장 늘씬한 몸매의 세련미를 보여주는 훌륭한 석물(石物)입니다.



천왕문(天王門)



당간지주를 지나면 숲사이 계단 위로 천왕문(天王門)이 보입니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안에는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1980년대 조성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모방하였습니다.


왼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오른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오른손에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불법(佛法)을 보호하면서 만물을 소생 시키고,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붉은 관을 쓰고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그 위엄으로 불법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왼쪽은  다문천왕(多聞天), 오른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으로 도량을 지키고,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보검을 쥐고 중생을 두루 보살피면서 항상 국토를 지킵니다.


                         천왕문(天王門)에서 회전문(回轉門)가는 계단 길



대석단(大石壇)



 

                                                       회전문(回轉門) 앞 대석단(大石壇) 


                               천왕문을 나와 회전문으로 오르다 보면 축대가 양 옆으로 펼쳐진 대석단(大石壇)이 있습니다.


 

                                                         회전문(回轉門) 좌우 석축(石築)


대석단(大石壇)의 석축(石築)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아 만든 것입니다.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습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3배관(三品三輩觀)의 9품 만다라(九品曼茶羅)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 마지막 세 계단이 상품단입니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극락세계에 이를 수 있는 열여섯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 세 방법은 삼품삼배관(三品三輩觀)으로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중품중생(中品中生)을 거쳐 하품하생(下品下生)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행실과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품만다라(九品滿茶邏) 입니다.

<부석사 자료 및 나의문와유산답사기(유홍준) 참조>



회전문(廻轉門)



                    회전문(廻轉門)


두 단으로 쌓아올린 석축 위에 회전문이 보입니다. 부석사 회전문은 근래에 새로 지어졌으며, 중생들에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라고 합니다.



회전문(廻轉門)


회전문(廻轉門) 내부 좌우의 공간은 비어있습니다.


회전문 좌측의 건물은 '관광안내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회전문 우측 건물 2채의 용도는 알지 못합니다.



● 쌍탑[雙塔]: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쌍탑[雙塔]: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회전문을 나서면 가운데 범종루(梵鐘樓) 건물이 우뚝 솟아있고 좌우에 나란히 서있는 삼층석탑(三層石塔) 한쌍이 보이는데, 오른쪽은 동탑(東塔), 왼쪽은 서탑(西塔)입니다. 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을 미루어 볼때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부석사로 옮겨 세웠습니다. 탑을 옮길 때 세운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 5립을 모시고 있다 합니다.

 

                                서탑(西塔)                                                                동탑(東塔)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지석대 위에 상, 하층 기단을 쌓고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받침기둥)를 각각 새겨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탑신부의 몸돌에도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지만,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습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당당한 기품을 잃지않은 모습입니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습니다.  <문화재청자료>


1) 동탑(東塔): 동쪽의 삼층석탑(三層石塔)


동탑(東塔): 높이 360cm




2) 서탑(西塔): 서쪽의 삼층석탑(三層石塔)


서탑(西塔): 높이 377cm


서탑(西塔)과 불사리탑이건비(佛舍利塔 移建碑)


서탑 앞에 있는 불사리탑이건비(佛舍利塔 移建碑)에 의하면 "부석사 동방 신라 절터에서 석상과 파탑(破塔; 파괴된 석탑)이 2기가 있었는데 부석사 범종각 남동(南東)쪽에 이건하였고, 서탑에는 전북 익산군 왕궁면 오층석탑(五層石塔)으로부터 석존사리(釋尊舍利) 5립(五粒)을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서탑(西塔)과 종무소 건물



● 종무소(宗務所)


부석사 종무소



●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 


범종루는 일주문, 천왕문, 회던문 다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문으로, 누각식 문입니다. 2층에는 운판, 목어, 법고가 놓여있으며, 범종은 옆에 따로 종각을 지어 달아 놓았습니다.



                        

                         범종루(梵鐘樓): 쌍탑을 지나 계속 진행하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집니다.


                           범종루(梵鐘樓) 현판: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고 써있는 일주문의 현판과는 다릅니다.


범종루 아래로 이어지는 길

 범종루(梵鐘樓)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인 범종루는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정면4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건물로 사방이 트여있고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남쪽]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비상하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임에따라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지붕으로 하여 건물이 날아오르는 느낌을 주도록 처리하였습니다.


 운판(雲版), 목어(木魚), 법고(法鼓)가 놓여있는 범종루 2층


범종루(梵鐘樓) 



● 요사(寮舍)



 요사채


범종각 남쪽 석축 아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북쪽면에 1칸반의 내부공간을 덧 대어 확장하였습니다.



●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은 범종루 서쪽에 있는 건물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습니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에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였습니다.


 鳳凰山浮石寺(봉황산 부석사)라고 새겨진 범종(梵鐘)


 범종각(梵鐘閣)에서 바라본 범종루(梵鐘樓)



● 보장각(寶藏閣)



 보장각(寶藏閣)


보장각(寶藏閣)은 부석사 고려각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祖師堂)에서 떼어 낸 벽화(국보 제46호)를 보관하기 위하여 1996년 세운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 2동을 석축단 위아래에 따라 건립하여 서로 연결하였습니다. 


 

석축단 위의 보장각 건물                                                             석축단 아래의 보장각 건물



괘불지주(掛佛支柱)




범종루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2단의 석축 위 오른쪽으로 안양루(安養樓)가 보이지만, 석축 밑 정면으로 낮은 돌기둥 두쌍인 괘불지주(掛佛支柱)가 보이고 그 오른쪽에 샘물이 있어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괘불지주(掛佛支柱)


괘불지주는 야단법석(野壇法席: 야외에서 크게 펼치는 설법 강좌)을 할 때 내거는 괘불(掛佛)을 붙들어 매는 장대를 양쪽에서 버텨주는 기둥 보조 돌입니다. 괘불지주의 모양은 일반적으로 당간지주외 비슷하나 크기가 훨씬 작아서 높이는 고작 1미터 안팎입니다.



▶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 보물 제1562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이 괘불은 1745년에 조성된 오불회도(五佛會圖) 형식의 괘불[크기: 925x577.5cm, 비단에 채색], 부석사에 전래되어 오던 1684년작 괘불을 청풍 신륵사로 이안하고 새롭게 조성한 것입니다. 1684년작 괘불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노사나불을 새롭게 첨가하였는데, 가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을, 세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하여 삼세, 삼신의 오불회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중심은 영산회상의 설주(說主)인 석가모니불입니다. 특히 대형의 군도형식의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인물묘사에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는 등 18세기 중반경의 격조 높은 불화양식을 대변합니다. <문화재청>


괘불대



● 응향각(凝香閣)



응향각(凝香閣): 요사채


괘불지주 동쪽에 위치하는 요사채인 응향각(凝香閣)은 원래 강원(講院) 건물이었습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있었는데 통로와 너무 인접하여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서 신축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최근에는 전면에 마루를 덧달았습니다.



● 선열당(禪悅堂)



선열당(禪悅堂): 요사채


선열당(禪悅堂)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범종각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5칸, 측면3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선열당(禪悅堂)


선열당(禪悅堂)의 원래 위치는 조사당(祖師堂) 동쪽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건물을 헐면서 발견한 묵서가 쓰여진 부재(部材)에는 원래 건물이 조선 효종 원년(1649)에 수리한 사실이 적혀있었습니다.


 선열당 동쪽 뜰에 놓여있는 석등(石燈)의 화사석(火舍石) 유구(遺構) 



● 장경각(藏經閣)



장경각(藏經閣)


장경각에는 부석사 고려 각판[보물 제735호]인 고려시대 화엄경판 634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고려 각판은 부석사에 소장된 정원본(貞元本) ‚ 진본(晋本) ‚ 주본(周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목판으로 13~14세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란 크고 방정하고 넓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것 같은 경전입니다.



영주 부석사 고려각판 (榮州 浮石寺 高麗刻板: 보물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각판 (榮州 浮石寺 高麗刻板: 보물 제735호) <참고사진>


영주 부석사 고려각판(榮州 浮石寺 高麗刻板)은 부석사에 있는『화엄경』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나무판에 새긴 것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입니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킵니다. 이 판은 모두 합쳐 634판이며 한 줄에 34자씩 글자를 배열한 특이한 형식입니다. 13∼14세기경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나무판에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큽니다. <문화재청자료,사진>




●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는 조선 후기의 목조 건물로 범종루를 지나 누각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건물입니다. 정면3칸, 측면2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건물로 석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부석사(浮石寺) 현판: 안양루 정면 2층에 걸려있습니다.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는 정면3칸, 측면2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건물로 석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안양루(安養樓) 현판들


안양루 정면 아래층에 걸려있는 현판은 안양문(安養門)으로, 반대편인 무량수전 마당에서 보는 안양루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건물에 누각(樓閣)과 문(門)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양(安養)은 극락이므로 안양문(安養門)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위치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안양루에서의 조망(眺望)은 부석사에서 뛰어난 경관으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습니다. <부석사자료>


                         

         

             안양루 누각의 김삿갓 시(詩)  <참고사진>


                                                              浮石寺(부석사)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흰머리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悤悤馬(풍진만사총총마)     지나간 모든 일이 말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우주간에 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염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 (세월무정노장부)    세월은 무정하니 나는 벌써 늙어 있네


                          김삿갓, 金笠(金炳淵)1807~1863



 조망(眺望): 소백산맥의 봉우리들


석등(石燈)과 안양루(安養樓)


                                 방향전환 안양루 축(安養樓 軸)


안양루 축은 이제까지 남서향이었던 축과는 살짝 비껴서 정남을 향하고 있습니다.이런 방향전환으로 숨을 틔어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수직의 권위는 한껏 살리고 있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13:52 /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석등(石燈)


안양루 밑을 지나 고개를 들면 반듯한 석등(石燈) 뒤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의 글씨無量壽殿이란 현판이 달린 무량수전(無量壽殿)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안양(安養)'은 곧 '극락(極樂)'을 일컬음이라 무량수전이란 땅 위의 극락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무량수전에는 극락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습니다. 부석사(浮石寺)가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無量壽佛)로도 불리는데 ‘무량수(無量壽)’ 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였으며 1969년에는 번와(翻瓦: 기와 덮는 일) 보수하였습니다.





무량수전 현판 <참고사진>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安東)에 머무를 때 쓴 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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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1376 중창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1363년 중수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 특히 고대 불전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1916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귀기둥 위에 짜놓은 공포) 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지었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 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본래있던 건물이 대개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나이를 다투게됩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참고사진>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 주심포 양식의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전면의 문살이 바둑판 같은 격자문(格字文)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은 배흘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지붕 네 모서리에 활주(活柱)를 받쳤습니다.


무량수전의 공포(栱包):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 <참고사진>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습니다.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귀공포



기단(基壇)과 계단(階段)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基壇)과 사갑석(斜甲石)을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이 돌출된 계단‚ 원형주좌
(圓形柱座)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礎石)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입니다.


                   외진우주(外陣隅柱) 초석(礎石) <참고사진>


  

 외진우주(外陣隅柱) 초석(礎石)


 건물 바깥편 모서리에 놓여진 귓기둥(隅柱,우주)아래에 놓이는 초석으로 기둥이 이어지직각

 방향에 고막이가 있습니다.




기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 김애선(石手 金愛先)' 의 기록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전 의장기법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입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입니다.


안허리곡(曲)  <문화유산채널 사진자료>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둥의 안쏠림 <문화유산채널 사진자료>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입니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습니다.


귀솟음 <문화유산채널 사진자료>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가운데 기둥보다 높게 처리한 것인데 지붕처마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줍니다.


                                             배흘림 기둥 <문화유산채널 사진자료>


높은 기둥의 아래위 굵기가 같으면 사람의 눈은 착시를 일으켜 위쪽이 더 굵게보이며 기둥이 앞으로 쏟아질 것같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배흘림 기둥은 이러한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합니다.



무량수전 뒷면


무량수전 뒷면은 중앙칸에 신방을 두어 쌍여닫이 판장문에 그 양쪽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고 내부에 판문을 덧댔습니다.



무량수전 측면


무량수전 측면은 벽화없이 엷은 채색으로 벽을 마감하였습니다. 여느 법전의 화려함보다 마음을 안정시켜주어 매력적입니다.



남향하는 건물의 서편에 불단을 만들고 그 위에 아미타여래상을 동향하여 안치하였으며 그 상부엔 보개를 두었습니다.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참고사진>


현재는 마루가 깔려있지만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두껍게 입힌 전돌인 녹유전(錄釉塼)이 깔려있었다고 합니다. 녹유전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습니다. 녹유전을 걷어내고 마루를 깐 것은 엎드려 절을 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의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수습된 고려시대 녹유전(錄釉塼): 부석사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무량수전 내 소형 동종(銅鐘)


무량수전 닫집과 내부가구 <참고사진>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습니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합니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입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지붕 가구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문화재청, 부석사자료>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참고사진>


무량수전의 본존으로 다른 불전 불상과는 다르게 측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서방 정토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를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융국사(圓融國師) 비문(碑文)에 따르면 의상대사(義湘大師)는 아미타불의 존엄을 높이려고 협시보살도 세우지 않고 불전 앞에 탑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큽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습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문화재청 자료>


                                   <참고사진>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으로 보아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極樂殿)/무량수전(無量壽殿) 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圓融國師) 비문(碑文)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합니다. <문화재청 자료>



▶ 석룡(石龍)의 전설


 

석룡(石龍)의 전설  <문화유산채널 사진자료>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선묘(善妙)낭자가 석룡(石龍)이 돼 절 창건을 돕고 무량수전 아래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선묘설화(善妙說話)


 의상(義相)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등주에 있는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신도

 의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연하게 대하는 의상의 굳은 의지

 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

 습니다. 훗날 의상이 떠남다는 소식에 미리 준비한 용품을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난 후였습니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

 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우고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 하던 중 676년(문무왕 16)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으나 이미 다른 무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선묘

 룡(善妙龍)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에 들었다 놓았습니다. 이에 놀란 무리들이 굴복하

 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佛事)를 도왔습니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

 름을 부석사(浮石寺)라 지었습니다. 그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 암벽 밑에 있으며, 선묘룡

 은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1916년 무량수전을 보수할

 때, 일본인들이 사실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파 뒤졌던바, 석룡이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하며, 1967년 5월 8일자 한국일보 기사에는 『6일 아침부터 석룡(石龍) 발굴 작업을 시

 작한 조사단(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무량수전 앞 기단을 따라 일직선으로 시굴하던

 중, 7일 하오 기단 서쪽에서 석룡이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석룡은 등이 끊긴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석룡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이 되

 었으며, 임란(壬亂)때 명(明)나라 어느 장수가 칼로 석룡의 허리를 끊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1967년 5월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석룡을 발굴하여 확인했다는 한국일보의 기사.  <참고기사>



● 석등(石燈): 국보 제17호




석등과 안양루 <참고사진>


석등(石燈)은 무량수전(無量壽殿)으로 가기위해 안양루(安養樓) 1층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보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 <참고사진>


석등(石燈)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앞 마당 중앙에 세워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합니다.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拜禮石)이 있습니다. 석등은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집니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합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7호 <참고사진>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97m이고 각 부재(部材)는 상륜부만이 일부 훼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석등을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석등(石燈): 국보 제17호


4각 바닥돌[기단석(基壇石)]은 옆면에 안상(眼象)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하대석(下臺石)]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간주석(間柱石)]을 받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상대석(上臺石)]을 얹어놓았습니다.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지붕돌[옥개석(屋蓋石)]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이며, 꼭대기[상륜부(相輪部)]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부석사의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문화재청자료>



                        화사석(火舍石)


화사석 4면 화창 사이사이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있는 공양보살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있습니다.


                          상대석과 화사석 <참고사진>


상대석(上臺石)은 다시 피어오르는 여덟잎 연꽃인데, 꽃잎 한 장마다 불교에서 이상화(理想化)한 꽃인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단석(基壇石)과 지대석(地臺石) <참고사진>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부재(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 다른 하나는 취현암(醉玄庵)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이 있습니다.


 

배례석(拜禮石)  <참고사진>


석등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습니다. 배례석의 정확한 용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행사에 사용되는 일종의 판석으로 본래 향로를 올려놓는 봉로대(奉爐臺)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외에서의 예불 때 향(香) 공양을 하던 곳으로 추정합니다. 배례석 상면(上面) 중앙의 연꽃무늬는 이중의 원으로둘러싼 자방(子房: 씨주머니)을 두고 주변에 8엽의 잎을 돌렸는데 사이에는 간엽(間葉)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재의 재질이나 형식등이 석등과 동일한 시기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이후의 일반형에 속하는 배례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주시자료>



● 부석(浮石)



부석(浮石)



부석(浮石)


무량수전 뒤 서쪽 암벽 밑에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넓은 바위가 있습니다. 중국 북송때(988) 편찬된송고승전(宋高僧傳)』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善妙)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합니다. 왕명으로 의상이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 할 때 거기에 웅거해 있던 무리들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이때 선묘는 큰바위로 변하여 가람의 지붕위에서 떨어질까‚ 말까하는 모양을 하자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의상은 절에 들어가 화엄도량으로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부석(浮石)’


선묘(善妙)의 전설을 간직한 돌을 '부석(浮石)'이라고 하였는데,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부석(浮石)이라 하였습니다.



● 선묘각(善妙)



 선묘각(善妙閣)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동에 작은 전각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善妙)의 넋을 기려 세운 것입니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로 보입니다.



선묘(善妙)에 관한 이야기는 일본에도 전해져서 그곳에서 더욱 유명하며 12세기에 만든 선묘의 목각상(木刻像)이 매우 소중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선묘각 내부 중앙에 걸려있는 근세에 그린 선묘(善妙)의 영정


 

선묘각 좌, 우측 벽면에 걸려있는 선묘설화와 관련된 그림



●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은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입니다. 문무왕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 기단폭 이 3.56m 이며 탑신부 각 부의 비례에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 둔중한 감이 있지만 건실한 체감, 비례를 보여 장중하게 보입니다.



무량수전과 삼층석탑 <문화재청 참고사진>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도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는데 하나는 서쪽에 앉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마주하는 자리가 동쪽 끝이므로 여기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며, 또하나는 무량수전 마당은 이미 석등이 있고 탑을 앉힐 만한 너비도 되지 않으므로, 비껴 동쪽 언덕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3층석탑(보물 제249호)과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3층 몸돌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했지만 사리구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 앞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으며 삼층석탑과 서로 한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풍경


태백산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각화산, 청량산으로 뻗고, 서남쪽으로는 민백산, 옥석산, 선달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는데 선달산 남쪽에 봉황산(鳳凰山)이 있고 그 중턱에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있는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기단(基壇)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습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3층 지붕돌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覆鉢, 둥그런 부분)만이 남아 있습니다. 노반(露盤, 머리장식 받침)은 1단의 갑석이 있고 복발은 편구형으로 횡대(橫帶)가 있고 그 위에 사방에 꽃모양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삼층석탑(三層石塔)옆 선묘각 입구에 서있는 조사당(祖師堂) 표지석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조사당(祖師堂)의상대사(義湘大師)의 상(像)을 모시고 있는 곳이며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전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은 처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로 여겨집니다.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참고사진>


1916년의 해체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墨書)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재건한 것이며,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습니다.


조사당 현판


조사당(祖師堂)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양식으로, 지붕은 전면이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지었습니다. 작은 크기의 건물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합니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현재 출입문 우측에는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골담초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선비화(禪扉花)가 유리창 속에 보호되어 자라고 있습니다. 
 

   부석사조사당 벽화(祖師堂 壁畵): 국보 제46호 <문화재청 참고사진>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인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 6점이 있었는데 아마도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외호(外護)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벽화[205.0 X 75.0 cm]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인1918년 벽화를 벽에서 떼어내 보장각(寶藏閣)내 유리장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중입니다.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모사품을 두었습니다.


조사당 뒷면


 조사당 내부 중앙의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상(像)


 

조사당 내부 의상대사 관련 그림



● 선비화(禪扉花)



선비화(禪扉花)



                         선비화(禪扉花)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祖師堂) 추녀 밑에 일명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骨擔草) 한 그루가 있습니다. 『택리지(擇里志)』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며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禪扉花)입니다.



● 취현암(醉玄庵)



 취현암(醉玄庵)


취현암(醉玄庵)은 조사당(祖師堂)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1997년도에 복원되어 2002년까지 선원(禪院)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부석사 산내암자(山內庵子)로 쓰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수도처로 유명합니다.



자인당(慈忍堂)/응진전(應眞殿)



조사당(祖師堂)에서 자인당(慈忍堂)/응진전(應眞殿) 가는 길


 자인당(慈忍堂)과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과 자인당(慈忍堂) 두 전각은 세운지 몇 십년이 되지않은 건물로 조사당(祖師堂)을 본떠 지은 맞배지붕집들입니다.


자인당(慈忍堂)과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과 응진전(應眞殿) 뒷면




■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은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으며 자인당(慈忍堂)과 함께 일렬로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제자인 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입니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기와를 보수하였으며, 이 건물의 공포(拱包)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翼工)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응진전 내부에는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중앙에, 그 좌우로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


 나한상(羅漢像)



■ 자인당(慈忍堂)



자인당(慈忍堂)


자인당(慈忍堂)은 선방(禪房)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며, 내부에는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廢寺址)에서 옮겨 온 석불(石佛)을 이곳에 모셨습니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인당(慈忍堂) 내부의 석불좌상(石佛坐像)


자인당(慈忍堂)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좌상(石造如來三尊坐像)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2구는 지권인(智拳印)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220호-1,2호)으로 부석사 동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폐사지(廢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온 것입니다. 가운데 1구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석조석가여래좌상 (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1636호)으로 부석사 동쪽 언덕에서 옮겨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인당(慈忍堂)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2구: 보물 제220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판단합니다. 불상은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입니다. <문화재청>



자인당(慈忍堂) 석조석가여래좌상 (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1636호

 


                                                    

                                                    석조석가여래좌상 (石造釋迦如來坐像) <문화재청참고사진>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 단하각(丹霞閣)



응진전 북쪽의 단하각(丹霞閣)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응진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단하각(丹霞閣)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丹霞)’ 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설화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단하(丹霞;739∼824) 천연선사(天然禪師)를 모신 듯합니다.


                         단하각(丹霞閣) 내부


 나한상(羅漢像)


단하각(丹霞閣)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羅漢像)을 모시고 있습니다.



●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 또는 명부전(冥府殿)은 영가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전각으로 부석사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입니다.


지장전(地藏殿) 내부의 지장삼존상(地藏三尊像)과 닫집 <참고사진>


지장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주불로, 협시불로는 지옥을 출입한다는 스님 도명존자(道明尊子)와 전생부터 지장보살과 인연을 맺었다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삼존불(三尊佛)로 모시고 있습니다. 삼존불 뒤에는 지장후불탱이 있습니다.  


지장전(地藏殿) 외부 벽면의 벽화


                  <참고사진>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아 극락 세계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보살입니다.


              <참고사진>



● 선묘정(善妙井)




지장전 뒤편에 있는 우물 선묘정(善妙井)


설화에 의하면 의상을 위하여 선묘가 판 우물로 늘 맑은 물이 나온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석사에는 우물이 두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선묘정(善妙井)이며, 또하나는 식사용정(食沙龍井)이라는 우물입니다. 식사용정은 마을사람들이 '한샘'(큰샘)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서쪽 요사채 마당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선묘정(善妙井): 수량이 풍부하지 않은둣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우물입니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 의 수(壽) ‚ 복(福) ‚ 재(財)의 삼신신앙(三神信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삼성각(三聖閣)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습니다. 공포는 익공 형식이지만 마치 다포 형식처럼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1구씩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며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각(三聖閣) 내부 불단


삼성각(三聖閣) 내부 불단 중앙칸에는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七聖)탱화를 모셨습니다. 왼쪽 칸에는 산신도(山神圖)를‚ 오른쪽 칸에는 독성(獨聖)상을 모시고 독성탱화를 걸었습니다.



● 삼보전(三寶殿)



삼보전(三寶殿): 부석사 주지실(住持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삼보전(三寶殿)



● 관음전(觀音殿)



14:54 /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은 부석사 전각 중 가장 서쪽에 있는 건물의 하나이며 최근에 세운 건물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모셨으며 또한 의상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영정 <참고사진>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의 연봉들



●  원융국사비각(圓融國師碑閣): 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



        ★ 도로 공사중으로 실제 가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원융국사비각(圓融國師碑閣) <참고사진>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는 부석사 전각중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비각(碑閣) 안에 놓여 있는 비(碑)로, 고려시대 부석사를 중창한 승려인 원융국사(圓融國師) 결응(決凝: 964~105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입니다. 결응은 12세에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28세에 대덕(大德: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킴)이 되었습니다. 고려 정종 7년(1041)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문종 7년(1053) 4월 이 절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왕은 그의 시호를 ‘원융(圓融)’이라 내리었습니다.

<부석사, 문화재청자료>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참고사진>


비는 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웠고, 비신은 높이1.73m이며‚ 재료는 수성암질청석(水成岩質靑石)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비는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거북받침은 원래의 것이 아니며, 비몸은 깨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을 이어 붙인 것입니다. 비몸의 파손으로 첫머리와 끝부분의 비문내용을 살피기 힘드나,『조선금석총람』에 그 전체가 실려 있어 내용 파악은 가능합니다. <부석사, 문화재청자료>



● 요사(寮舍)



 요사(寮舍): 지장전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로 가는 길 입구에 위치해있습니다.



 요사(寮舍)


[부석사 답사 종료]


15:20 / 부석사 답사를 마친 후 폭포호수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 15:30분 부석사 출발 27번[부석사영주여객차고지] 영주시내버스 탑승하여 영주종합터미널에 도착한후

    17:20분 출발 서울경부터미널행 고속버스 이용하여 풍기 경유 20:45분 서울경부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석사(浮石寺) / 영주(榮州)

                                                                       (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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