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SOArt 2013. 3. 4. 17:17

이 글은 인터넷카페 nie-group에 별명 "조병교"란 이가 연재한 시인 "김용오"님의 시인모독이란 내용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하고, 또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나에 대해 더불어 성찰하는 계기를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디 자괴감이나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시인 뿐이겠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의 성실한 보통사람들에게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들이어서 모든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이 된다.

 

인류가 생겨나서 부터 이 세상은 모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번 사람 중 제대로 양심과 사회규범, 도덕성에 똥칠을 하지 않고 돈을 번 자가 있다면 어디 한 번 데리고 나와봐라.

 

또한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회적 명망을 얻는 유명인사? 예를들면 정치가, 사업가, 의사, 교수 , 예술가 기타 등등..........

그들은 과연 휘황한 조명과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인지?

 

정직하고 묵묵하게 사회를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 대다수의 옳바른 삶을 견지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자화상이 되는  맑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칭송을 받거나 존경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적 루저(loser)로서만 따돌림 당하고 비아냥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인간세계야 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법칙(Gresham's law)이 극명하게 보여지는 곳이 아니던가?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옮겨온 글이지만 우리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울 속의 자기모습을 보는 시간을 갖게해 주는 유익한 글이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김용오 시인

경북 포항 출생
건대 대학원 수료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제 11 회 현대 시인상 수상
제 24 회 시문학상 수상
****시집****
*<신의 수염>
*<동화작용>
*<두 사람에 관한 성찰>
*<멀티 오르가즘>

*현재 : "동인당 약품(주)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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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

아포리즘이란?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와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아포리즘의 한 예이다.

문예 또는 철학적인 아포리즘을 모은 책으로는 라 로슈푸코의 《잠언집》, 콜리지의 《내성(內省)의 안내》, 니체의 《서광(曙光)》 등이 있다.

아포리즘은 일견 ‘이언(俚言)’이나 ‘속담’ ‘처세훈’과 흡사하지만, 이언이나 속담은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면서도 작자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포리즘은 작자의 독자적(獨自的)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점이 ‘처세훈’과는 다르다.

 

 

시인은 때때로
역설적이며 반어적 기법으로
자신의 전달 하고자 하는 바를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럴때는
표면의 의미와 정반대로 해석 해야만,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혼의 아내가 자기의 남편 흉을 보며"미워 죽겠다"는 말을 한다면 이때, 표면 그대로,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을 정도로 미워 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밉다"는 반대어 표현하고 있으며, 그 정도가 죽을 정도라고 과장된, 극도의 수준이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한 작품에서 어떤 말은 역설적으로,
어떤 말은 직설적으로, 마구 뒤섞어 놓는 바람에, 혼란 스러운 경우도 간혹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강렬한 표현에 집착하는 창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그 의도가 왜곡 되거나, 오인되어, 커다란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일본의 저명한 시인
미시마 유키오의 저서
"거꾸로 읽는 도덕경"들 볼것 같으면
인간 사회의 위선과 가식적 모순을 통렬하게 지적 하고자 한 창작가의 열정의 산물임이 틀림이 없으나, 때로는 수준 낮은 독자들의 저차원적 독해로 인해 종종 물의가 되기도 하는 것 입니다.
극단적 예를 들면

쇼펜 하우어의 명저
"여성론"과
"독서론"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역설적이며 반어적 표현을 일삼는 창작가의 의도를
관념의 정체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빙자한 인간 세태의 모순과 가식에 대한 준열한 경고임을 전제로 하고,
작품에 겸허히 접근 해야 만 이상적인 독서가 가능하며, 바람직한 감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저의 군소리'를 전제로 하고
연재 되는 김용오 시인의 작품을 감상하여 달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교통사고로 아까운 시인 한사람이 나의 곁을 떠나갔다. 그가 나에게 남겨놓고 간 시작 노트에는 장래 훌륭한 시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필수 과목이 몇 가지 적혀 있었다.
첫째 : 무슨무슨 협회라는 이름을 작당하여 만들어 놓고 감투싸움이나 계속 할 것.
둘째 : 무슨무슨 상을 많이 남발하여 만들어 놓고 뒷구멍에서 로비활동을 잘 하는 엉터리 시인에게 수여하는 법을 터득할 것.
셋째 : 문학잡지나 시 전문지 하나쯤 창간하여 철없는 지망생들, 돈푼깨나 가지고 있는 신인들의 등이나 쳐 먹을 것.
넷째 : 국가기관에 빌붙어서 빈대처럼 살아갈 것.

 

스스로 잘난 척 하는 시인들이 시를 쓰는 같은 동업자들을 낮추어 평가할 때, 저 친구 시는 참 좋은데 사람이 형편 없다든가 아니면 저 친구 사람은 참 좋은데 시가 형편 없다는 뜻의 이야기를 곧잘 하지만 사실 시와 인격이라는 두가지 문학적인 명제를 극복한 시인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들에게 지금 몇살이냐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고 치욕적인 질문은 없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선문답식의 답변을 한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나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게 진술하면 시인들은 나이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동심을 살아야할 운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배님, 아직도 시를 쓰고 있습니까?

위의 질문은 지난 날 그가 아껴주었던 허나, 지금은 어느새 아물한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고 있는 고향 후배의 두툼한 편지 속에 들어 있던 말이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집으로 놀러갔다가 천덕꾸러기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선배님의 시집을 읽게 되었노라며 "아직도"라는 부사 속에는 아무래도 참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어려운 말 장난이나 하고 있느냐 하는, 정말 안타깝다는 투의 빈정거림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던가, 개새끼같은 짓거리를 해놓고도 자기네들끼리 모이면 시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잘잘못을 얼버무리려 하지 말라. 단지 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나는 그대의 얼굴에 침을 뱉으리라.

 

시인들은 사물의 비밀이나 인간의 마음을 상처 하나 없이 훔쳐내는 천하 제일의 도둑놈이다. 다들 잠든 사이에 모국어와 상상력이라는 두개의 무기만으로도, 거뜬히

 

역시 알고 보니 시인들은 사기꾼이더라. 그러나 그들의 거짓말이 생각했던 것 보다 성스럽고 정직하여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걷어차거나 미워할 수 없으니 더욱 큰 사기꾼이더라.

 

시인의 직업으로는 창녀촌의 포주가 가장 안성맞춤이다. 그 이유는 묻지 말라. 게으르기 짝이 없는 그들 자신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순진한 독자들은 널리 애송되는 좋은 시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 시인들의 인격마저 작품과 동일한 시적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착각에 불과하다. 세상 인기를 누리는 시인일수록 위선적인 사이비가 많다는 것을 알라. 

 

평소에 고상한 척 머리를 꼿꼿이 들고다니던 시인들 까지도, 종합문예지나 시 전문지 같은 발표지면을 가지고 있는 분들 혹은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나 심지어 유명하다는 평론가들 앞에 서면 옆에서 보기 딱할 정도로 머리를 굽히고 두 손을 비비며 비굴해진다. 작품의 질보다는 빨리 유명해지고 싶은 속물 근성의 성감대를 보는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날마다 시인들은 이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죽음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일종의 비현실적이고 과대망상증이라는.

 

만약 그대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우편으로 보낸 이쁜 장정의 본인 시집이 믿었던 친구의 집에서 그것도 넓은 안방의 화려한 장롱 밑의 받침대로 사용되어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로 하여 친구의 집에 갔다가 만약 그대가 값비싼 장롱 밑에 형편없는 몰골로 구겨진 시집의 주검을 불행하게 목격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다시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 지리라. 분명 이 사건은 엄연한 사실에 속하지만.

 

우리 문단에 퍽 덕망 있다고 알려진 중견 시인이요 평론가인 모 교수로부터 나는 이런 슬픈 고백을 들었다. 하루는 청탁받은 원고를 쓴다고 방바닥에 엎드려 끙끙거리며 잡히지 않는 언어와 땀흘리는 시름을 끝도 없이 벌이고 있는데 아무 말 없이 방안으로 들어온 아내가 머리맡에 어질러 놓은 원고지를 고의적으로 짓밟아 뭉개고는 휭하니 집밖으로 나가버리더라고, 마치 징그러운 뱀처럼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논밭 팔고 소 팔아 가슴 저리게 보낸 돈으로 그는 어렵게 대학을 마쳤고 열심히 글을 써서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병아리 시인이 되었다. 다음 해 운좋게 첫시집까지 출판하는 행운을 얻어 제일먼저 그는 소중한 시집 한 권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가난한 시골 고향으로 부모님을 뵈러 내려갔다. 더욱 늙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께 삼가 큰절을 엎드려 하며 글썽거리는 마음으로 첫 시집을 안겨 드렸다. 한참동안 물끄러미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더듬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였다.
"얘야, 이 책 한 권 팔면 쌀 열가마 정도는 바꿀 수 있는 거지. 허허 이제 논밭도 사고 외양간의 누런 황소도 다시 보게 되었구나. 허허허."

 

성경 속에는 전염성이 강한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그 책을 볼 때는 반드시 장갑을 끼고 읽어야 한다는 니체의 잠언처럼 어제 오늘 마구 쓰레기가 되어 쏟아져 나오는 시인들의 시집을 읽을 적에는 역시 질긴 고무 장갑이라도 두손에 끼고 보아야 하리니. 전염성이 신속한 언어의 바이러스들이 시의 행간에 덕지덕지 숨어서 우리들을 잔뜩 노려보고 있으므로.

 

원래 시인은 그 옛날 노동이나 사냥을 할 수 없는 육체적인 불구자들, 즉 쓸모없는 병신이었다고 영국의 시인 "데이 루이스"가 말하였지만 요즘에 와서는 사대육신이 멀쩡한 정신적인 불구자 시인들이 더 많이 태어나는 것 같다.

 

마구 쏟아지는 문학 잡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신인상이나 추천제도를 만들어 놓고 마구 똥오줌을 배설하는 것처럼 엉터리 시인들을 뽑아대고 있으니 어디 백화점의 상품처럼 시인들을 바겐 세일이라도 하려나 보다.

 

시인들 중에 한번도 손에 흙이나 기름을 묻혀본 적도 없는, 부르조아같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날마다 양주를 마시고 빈둥빈둥 놀면서 노동자나 농민들의 삶이 어쩌구 저쩌구 노래하는 관념적인 위선자들이 많다. 알고보면 그들의 정신적인 패배주의는 인기를 얻기위한 치사스러운 엄살일 뿐이다.

 

시인을 만들어 주면 거금 백만원을 선뜻 내놓겠다는 정신빠진 놈이나 풍만한 육체라도 바치겠다는 매춘부같은 년들. 모두 빨리 죽어서 조용히 사라지거라. 종교에서 들먹 거리는 불타는 지옥으로.

 

시인이 많은 세상에는 언어를 버리고 시를쓰지 않는 시인이 더 위대할 수도 있고, 존경받을 요인도 더 많다. 내가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그 이유는 시인들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시를 가르쳐서 시 때문에 밥을 먹고사는 대학 교수들이 시를 오염시키는 장본인은 아닐까. 하여 진짜 시는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으며 그런 학문적인 범주 밖에 자연스럽게 존재해 온 것은 아닐까.

 

시인의 천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길이 남는 시인은 몇 사람 안 된다. 그러므로 엑스트라 같은 시인들이여, 어서 찬물 한 사발 들이키고 마음을 돌려 먹을 지어다.

 

젊은 나이에 아깝게 자살한 시인이나 죽어버린 시인들은 그나마 신의 축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욕을 얻어 먹으면서까지 고향에다 자신의 시비나 세우려하고 감투에 목이 말라 동분서주하는 늙은 시인들의 보기 흉한 노탐에 비한다면.

 

나는 나의 시를 읽은 독자가 무슨 뜻인지, 무엇을 노래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허허 웃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시인을 위해 시인들이 시를 쓰는 시대, 좋은 현상인지,나쁜 현상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도대체 갈피가 잘 잡히지 않는다.

 

장사꾼들 보다 더 약삭 빠르고 비양심적인 시인들. 시를 쓰는 일에 전심전력하기 보다 세상 눈치보기에 더욱 바빠진 시인들-----------신이여, 간구하오니 용서 하소서.

 

슬픈 일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울 때 실컷 울고나면 마음이 한결 시원해지고 가벼워 진다. 그러나 시를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갑절 무거워 지고 갑절 어두워 지기만 하니, 눈물 한 방울보다 못한 시를 쓰는 눈물 한 방울보다 못한 시를 쓰는 눈물 한 방울보다 못한 시인들에게 어느 누가 박수를 칠 것인가.

 

시 그것은 남자 대장부로서 평생을 다 바쳐 투자해 볼 만한 가치 있는 사업이라고 말한 노 시인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짧은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그 말은 개인적인 이기심의 소치나 마지막 자존심 같기도 하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튼소리 같기만 하다. 더구나 요즘같은 시대에.

 

시인들은 고독한 정신 노동자. 시장에 내어 놓아도 흥미는 고사하고 전혀 교환가치가 없는 문화적인 상품을 생산하며 살고 있는 불쌍한 노동자에 불과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듣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먹는 편협한 이기주의자. 정말 처치 곤란한 존재를 어찌하여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부르며 이따금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하지만 시가 감동을 준다고 해서 그 작품을 쓴 시인까지 감동을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와 시인은 밥 따로 국 따로 식탁에 올려놓은 "따로 국밥" 같은 것.

 

멍청한 시인과 함께 살다 끝내는 진저리가 난 늙은 악처가 이웃 친구들에게 하는 말을 몰래 도둑질하여 들었다. "아마 시인들의 똥은 배고픈 개도 안 먹을거야".

 

이 세상이 좀더 조용하고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늘어나는 시인들의 숫자를 막아야 하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거든 어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아 시집 화장터라도 하나 건립해야 할까보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숫제 쓰레기처럼 쌓이는 시집들을 불 속에 던져넣고 한참동안 기다렸다가 화장터의 높은 굴뚝으로부터 한 줌의 허무한 여기로 사라지는 시집들의 마지막 운명을 마음에 똑똑히 새겨 두기 위해서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고, 직업을 묻게 되는 경우 나는 왜 한번도 떳떳하게 시인이라고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집을 떠나 호텔이나 여관 같은 곳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는 경우에도 나는 왜 숙박일지의 직업란에 당당하게 시인이라고 기록하지 못하고 끝내 회사원이라고 써야만 했던 것일까. 논밭에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농부도 엄연한 직업이라면 원고지 밭에 언어를 심어 영혼의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시인도 분명 성스러운 직업일텐데...... 그럼 나는 아직도 시인으로서 자격미달자란 말인가. 한마디로 하늘 보기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로다.

 

어떤 직업의 사람들이 제일 오래 살까. 예나 지금이나 스님이 첫번째로 꼽히고 그 다음이 실업가, 그 다음이 정치가, 또 다음이 의사 순으로 내려 가다 제일 짧은 그룹에 예술가, 그 중에서도 시인이 제일 단명하여 57 세를 넘기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가 최근 일본의 한 교수에 의해 발표 되었다. 한 방면에만 재능이 뛰어나면 아무래도 전체적인 정신 안정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시인의 단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다. 만약 그런 조사 결과가 어느 정도 사실에 속하고,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을 창조자에 비유하여 부르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로 믿는다면 다음과 같은 나의 해석이 오히려 외로운 시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진혼곡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조물주의 비밀을 남 몰래 훔쳐본 아름다운 죄 때문이라고"
"조물주의 부끄러운 질투심 때문이라고."

 

용서해 다오 그 동안 나의 시를 읽어준 고마운 독자들이여. 그동안 나는 네권의 시집을 내고 그대들로부터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사실은 그 작품들이 모두 가짜요 거짓말에 불과 하다는 것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고백한다. 용서해 다오. 그대들을 속인 죄, 천벌을 받아도 마땅하겠지만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 단 한편이라도 진짜를 써서 그 죄값을 받고 가려 하오니 부디 용서해 다오. 얼굴을 똑바로 들고 쳐다볼 수 없는 미지의 독자들이여.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여. 어느 날 불어오는 바람결에 조용히 내가 눈을 감고 죽었다는 전갈을 받게 되거든 모래알만큼도 슬퍼하거나 울지를 말고 그저 조금은 세월이 지난 다음 내 외로운 무덤 앞에 자그마한 묘비를 하나 세우고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몇자 써 다오.
'여기 시를 자기 생명 보다도 더 아끼고 좋아 하다가 오히려 시를 더럽히고만 죄 많은 시인 한 사람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