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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rt 2020. 10. 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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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 마음에 품는 마인드 스케이프 - 물질로서의 자연/ 김성호

김성호

마음에 품는 마인드 스케이프 - 물질로서의 자연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화가 김명희의 그림에는 자연이 가득하다. 그것은 도심의 일상을 떠나 만나는 자연의 신록이기도 하고 일상 속에서 만나는 도심 속 자연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다. 도심보다는 산, 들, 바다를 즐겨 찾는다. 이국적인 풍경들이 주는 빛과 소리는 나를 뜨겁게 감동시키고 무한한 에너지를 준다. 난 이들에 매료되어 보고 듣고 느끼는 그 감동을 붓 가는 대로 표현한다.” 

산, 들, 바다에서 그리고 이국적인 풍경에서 화가 김명희는 자연이 주는 무한 에너지를 만끽한다. 그리고 그 감동을 화폭에 하나둘 담는다. 어떻게 자연을 그림에 담는가? 작가가 느낀 자연에 대한 감동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맥문동 꽃이 흐드러졌네, 72.7x53.0cm, Oil on canvas, 2019

 

 

 

 

II. 화폭에 담는 자연 - 재현으로부터 표현으로  

작가가 즐겨 찾는 홍천강변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고양 호수 공원에서 만나는 싱그러운 가로수, 진부령 고개에서 맞이한 이름 모를 풀잎과 식물들, 훌쩍 떠난 인도 여행길에서 만난 침묵으로 흐르는 갠지스강 등 작가의 화폭 안에는 다채로운 자연의 모습이 한가득 자리한다. 

그러나 화가 김명희가 작품 속에 담은 자연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특정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은 작품 제목, 〈그곳 봉평은〉, 〈홍천강변〉, 〈두물머리에서〉, 〈제주에서〉, 〈크로아티아에서〉, 〈갠지스강의 추억〉에서 어떤 장소를 그렸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이미지만 봐서는 그곳이 어딘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해외의 이국적인 풍경 정도만 빼면, 대개 풍경이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자연의 모습을 화가가 휘몰아치는 붓질에 마음을 담아 캔버스 위에서 춤을 추듯 사물의 외곽선을 뭉개거나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연 풍경은 자연의 외양을 투시도법이나 음영법에 의지한 채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 오던 고전주의적 풍경이나 자연주의적 풍경과는 거리를 둔 무엇이다. 어찌 보면 19세기 말 이전까지의 회화 방식을 거부하고 야외로 뛰쳐나가 자연과 직접 맞닥뜨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일정 부분 닮아있다. 

자연의 찰나적 순간을 즉흥적인 붓질로 표현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의 점묘법과 같은 조형 언어는 김명희의 작품 안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길이를 짧게 끊는 방식의 붓질을 반복적으로 집적하는 인상파의 작법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조금은 긴 길이의 점묘 방식으로, 작가의 말처럼 ‘과감한 직선 터치’로 드러난다. 작가 김명희가 인상주의 회화에서 선보였던 점묘법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즉발적인 직선 터치’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다음처럼 말한다: “처음엔 그저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고전적으로 표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답답해지기 시작해서 요즘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그림에 표현하고자 과감하게 직선 터치를 시도하고 두껍게 그려서 멀리서 보아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처음에 모네의 수련을 가까이에서 대하고 잘 모르겠다가 멀리서 오래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둥근 것 같았는데 모가 진 수련 잎들...” 

작가 김명희의 언급에서처럼, 그녀는 고전적인 재현(representation)의 언어에서 충족할 수 없었던 창작의 기쁨을 표현(expression)의 조형 언어에서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연을 대면했던 기쁨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데 있어서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재현을 대신하는 표현의 언어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미시적 시점(視點)’을 벗어나 ‘숲을 보는 거시적 시점’을 견지하는 가운데서 얻어진다는 ‘자연 관조’에 관한 직접적인 체험과 연동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연의 세부에 집중할수록 자연에 대한 전체적인 감흥은 사그라지고 작가의 말대로 답답해지기에 십상이다. 모네의 수련이 그랬듯이, 김명희 또한 자연을 대면하면서 느꼈던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미시적 시점이 아닌 거시적 시점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즉 재현의 언어로 자연의 부분에 집중하기보다 표현의 언어로 자연의 전체상에 집중하는 방식을 고려한 것이다. 

다만, 작가 김명희에게 있어 표현이라는 방식은, 외광파(外光派)라 불렸던 인상주의 작가들이 야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맞닥뜨리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과 달리, 야외에서 대면했던 자연에 대한 벅찬 감동과 기억을 아틀리에에 소환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작업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달리 말해 김명희가 화폭에 담은 자연 그림은 자연의 외피적 이미지(image)라고 하기보다 자연과 맞닥뜨렸던 당시의 마음과 감정의 기억을 소환한 자연의 이미저리(imagery), 즉 ‘자연의 내적 형상’이라고 할 것이다.  

 

 

 

홍천강변, 90.9x65.1cm, Oil on canvas, 2019-05

 

 

III. 마음에 품는 자연 - 마인드 스케이프 

자연으로부터 받았던 기쁨과 환희의 감흥을 작업실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 쉬운 일인가? 당시의 자연 체험에 대한 감흥은 감퇴하고 그것에 관한 세세한 기억은 소멸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명희에게서 자연을 대면하면서 느꼈던 감흥이란 구체적으로 시각, 후각, 촉각과 같은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지각(per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그때, 그곳’에서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다시 인식(recognition)이라는 이름으로 ‘그때, 그곳’의 미적 경험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과 연동된다. 즉 화가 김명희의 작업에서 ‘바깥의 자연’을 ‘안의 작업실’ 안에 소환하는 일은 이처럼 지각과 인식 그리고 기억을 동시에 동반하는 일이다.      

이 자리에 주요한 화두가 있다. ‘밖의 자연’을 ‘안의 작업실’로 옮겨오는 일이란 머리의 기억이기보다 마음의 깊은 심연에 거주하는 기억을 가져오는 것이다. 즉 ‘마음의 눈으로 보았던 자연’ 그리고 ‘마음에 품었던 자연’에 대한 ‘기억의 잔상(Afterimage of Memories)’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몸의 눈으로 보고 읽은 풍경(landscape)'이기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읽고 기억하는 풍경(mind scape)'이라 할 만하다. 생각해 보자. ‘몸의 눈’은 대상을 분석하고 해부해서 발가벗겨 내고 그것을 재조합하는데 골몰하지만, ‘마음의 눈’은 대상에 감정이입하고 대상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것에 집중한다. 

작품을 보자.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포착하는 김명희의 마인드 스케이프에는 육안(肉眼)의 재현 혹은 사생(寫生)의 의지를 어르고 다독이며 심안(心眼)의 표현 혹은 비사생(非寫生) 의지를 넘실대게 한다. 작품 〈가는 가을을 품다〉(2019)에는 강 혹은 호수 주변에 무르익은 늦가을 갈대숲이 화폭에 가득 자리한다. 원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무채색의 산자락을 밀치고 화면 가득 채워진 누런 갈색의 갈대숲에는 짧은 직선의 표현주의 붓질들이 신명나게 쌓여 있고 마티에르 가득한 물감층이 두텁게 겹쳐 있기에 그것은 어찌 보면 풍경이기보다 차라리 질료 덩어리처럼 여겨진다. 

또 다른 작품 〈맥문동 꽃이 흐드러졌네〉(2019)는 어떠한가? 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인 맥문동(麥門冬)이라는 명칭은 “뿌리에 겉보리 낱알과 같이 생긴 덩이뿌리가 매달려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화가의 작품 속에서 맥문동 꽃은 쉽게 찾기 어렵다. 단지 연한 자주색의 물감 덩어리만 표현되었거나 붓질의 흔적으로만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에는 넓고 굵은 붓질과 가느다랗고 짧은 직선의 붓 터치가 뒤섞인 채 수직과 수평 그리고 대각선을 오가면서 쌓아놓은 녹색과 흰색의 물감 덩어리를 나누어 놓는데 어떤 면에서 그것은 붓질과 물감 덩어리가 만든 한 점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것은 분명 맥문동 꽃이 흐드러지게 본 풍경을 그렸으되 ‘사생의 재현이 아닌 비사생의 표현’과 더불어 ‘마음의 눈으로 그린 마인드 스케이프’라 할 것이다.   

 


산촌의 겨울, 53.0x40.9cm, Oil on canvas, 2019

 

 

 

IV. 물질로서의 자연 - 풍경 아닌 풍경과 보이지 않는 풍경  

화가 김명희는 논과 밭이 있고 잡풀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찮고 소소한 일상 속 자연을 마음에 담아 그린다. 고양, 홍천, 제주의 흔한 자연뿐 아니라 외국의 소소한 풍경까지 마음에 담아서 말이다. 그녀는 ‘마음의 눈’이라는 ‘심미안(審美眼)’을 통해 일상 혹은 일상의 자연이라는 미적 대상과 부지런히 교감하고 대화하면서 풍경화를 그린다. 

주지하듯이, 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안목’이라는 한자 뜻풀이 외에도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分別)하여 살피는 마음의 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것은 ‘대상에 대한 육안(肉眼)의 판별력’보다는 심안(心眼)의 판별력’에 더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대면하는 몸의 눈은 조형적 완결미와 형식미라는 ‘외양(外樣)’을 부단히 좇지만, 심미안으로 분별하는 마음의 눈은 ‘내면과 범상한 것, 심지어 추한 것’에 이르기까지 ‘외양’ 너머에 혹은 그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자 한다. 

외양 너머에 혹은 그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라니?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에서 혹은 이면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안은 풍경이자 그것이 품은 미적 가치를 의미한다. 화가 김명희가 찾고자 하는 자연의 본성은 보이지 않는 것에(도) 존재한다. 이른 봄 대지를 뚫고 자라는 새싹이 느리게 기지개를 켜는 몸짓에, 맥문동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풀잎 사이로 일렁이는 바람결에, 한여름 두물머리 호수에 피어있는 연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의 살포시 팔랑거리는 날갯짓에 그리고 가을 나뭇잎이 벌겋게 물들어가는 느릿한 과정에 자연은 자리한다. 그뿐인가? 세상이 멈춘 듯한 한겨울 얼어붙은 땅 아래서도 자연의 본성은 여전히 움직이면서 아름다움을 전한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풍경인 듯 풍경이 아닌 김명희 작품들에 나타난 자연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필자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이자 ‘물질로서의 자연’으로 해설한다. 마치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처럼 말이다. 흙은 인간이 떠나온 자연으로서의 원시향(源始鄕)이자, ‘지금 여기’에 소환되는 근원의 세계이지 않던가? 여기에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이 지속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이 그리고 ‘물질로서의 자연’이 자리한다. 

김명희의 거친 듯 자유로운 표현의 회화에는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언급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 꿈틀대는 자연이 있다. 게다가 그 자유로운 회화 안에는 제작학이라 번역되는 ‘포이에티크(poïétique)라고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작’이 작동한다.  

 

 

V. 에필로그 - 풍경 아닌 풍경과 보이지 않는 풍경   

화가 김명희는 벅찬 마음과 기쁨으로 맞닥뜨렸던 자연에 대한 기억을 아틀리에에서 소환하여 화폭에 담는다. 작가는 자연의 한 부분 한 부분에 집중하고 ‘미시적 세계에 대한 사생과 묘사’에 의지하는 재현이라는 조형 언어를 탈주하고 보편적 자연이라는 거시적 세계에 집중하는 표현이라는 조형 언어에 안착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탐구하는 자연이란,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으로 확장하는 것이기에, 육안의 눈으로 살피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심안의 눈으로 품는 마인드 스케이프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물감의 마티에르와 표현주의의 붓질로 넘실대는 김명희의 회화는 물질로서의 자연과 과정으로서의 자연을 담는 ‘풍경 아닌 풍경화’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신명을 가지고 이러한 자연에 골몰하는 작업 태도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의 본질처럼 나를 멸(滅)하고 타자를 생(生)하게 하는 나눔의 미학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작업의 화두를 엿볼 수 있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내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기쁨과 에너지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감히 욕심을 내본다.” ●

 

출전/

김성호, 「마음에 품는 마인드 스케이프 - 물질로서의 자연」, 카탈로그 서문 

(김명희 개인전, 진부령미술관, 2020.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