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자료

찾는이 2017. 2. 4. 18:10

일본의 한국지배 과정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역할과 의의

                                                                                                           찾는이

 

1905년 을사 늑약으로 설치된 조선통감부에 이어 한일 합방으로 설치된 조선총독 부는 조선통치의 첫 단계에서 부터 통감부 시절의 대 기독교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외국 선교사들을 대했다. 즉 통감부 시절부터 유지해 온 공식적으로는 ‘외국인의 선교활동 에 대해서 긍정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내면으로는 미국의 선교사 활동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한다’는 이중적 태도의 견지였다.

동시에 미국을 위시한 외국선교사들도 본국의 선교본부의 공식정책, 즉 일본의 조선통치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인들을 포섭해야 한다는 전도사업 본래의 필요성 때문에 은밀하게는 한국인들의 동정에 대해서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나 선교사들은 서로가 이중적 태도로서 대한다는 복잡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초기 단계에서 부터 선교의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던 ‘의료와 교육’ 사업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선교 방법 이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일제하의 한국 청소년들을 자각시키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1919년 3.1 만세의거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 지도 자였으며 당시 인구의 1.3%였던 기독교인이 3.1만세로 투옥돼 재판받은 사람의 17.6%였으며 장로회 총회장이던 평양의 김선두 목사, 경북 노회장 이던 대구의 이만집 목사 등이 만세운동을 주동할 정도로 기독교의 역할이 컷음이 그 뚜렷한 반증이다..

일제는 점차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폈고 민족성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한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기에 이르렀고 일제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황민화정책 및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등 부일에 앞장 선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런 친일부역 목사들이 진정한 참회를 하지 않은 채 해방 후 교계를 장악하여 기독교 분열의 씨앗이 만들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친일파 기독교인은 감리교의 정춘수와 신흥우, 장로회의 정인과와 김길창, 성결교의 이명직, YMCA 박희도, 연동교회 원로목사 전필순 등 교단 지도자와 이동욱, 백낙준, 김활란, 오문환 등 기독교 인사다.

기독교 친일행적은 아래와 같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1939년까지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 1355회 등을 열고 국방헌금을 바친 데 이어 1942년엔 육군과 해군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7정에 대한 기금을 냈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했다 변절한 정춘수는 1944년 경성, 제물포, 평양, 원산, 강경 등의 34개 교회를 폐쇄해 그 재산을 팔아 비행기 3대의 헌납 기금으로 바칠 것을 결의했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변질과 부일 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세속의 권력에 영합하고 추종한 행위로 기독교인으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악을 범한 것 이였다.

3.1 독립선언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하나님께서 민족에게 준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것이 역사적인 죄이며 그것을 찾을 만한 기회에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 하였다.

일제 총독 데라우치의 암살 기도로 사형을 당한 강우규 전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말씀 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것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독립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고난과 순교 그리고, 회개의 종교다.

강우규 전도사는 사형당한 게 아니라 순교한 것이다.

과거 일제시대에 기독교가 이 땅에 끼친 선한 영향력과 믿음의 선진들이 행한 굳센 신앙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고 일제에 아부하여 살아남은 교계 지도자들이 행한 민족적 반역행위와 해악을 감추지 말고 백일하에 드러내어 시시비비를 가려보고 반성하며 교계 전체가 참회하는 용기도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