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자료

찾는이 2017. 6. 14. 18:50

 후기 왕정시대 (분열왕국)

 

1. 이스라엘의 분열 - 르호보암에서 오므리 까지

여로보암이 르호보암 식 이집트 강제노동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출애급"시켰지만 여로보암의 ”출애급“도 결국 또 하나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귀착되었음을 보여 준다.

자기백성의 정치젓 충성과 종교적 충성이 연결되었음을 간파한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유실이나 상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북쪽 국경지대인 단과 남쪽 국경지역인 벧엘을 새로운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삼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금송아지를 설치하였다.

2. 오므리 왕조.

왕국의 분열이후 남·북 왕조는 상당기간 쇠퇴기로 접어들었으나 북이스라엘에 오므리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 남·북 왕국은 안정되었다.

열왕기 저자들은 정치상황보다 종교적 상황에 보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오므리 왕조의 시조인 오므리보다 그 아들 아합에 관한 기술이 많다.

아합은 시돈공주 이세벨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의 문을 열어버린 왕이다. 이 바알 종교와의 싸움에서 결정적 승리는 엘리사시대에 찾아 온다.

이 시대의 성경 외 기록은 모압왕 메사가 세운 메사석비가 대표적이다

오므리왕조가 통치하던 때에 유다왕조는 세명의 왕이 즉위하여(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아) 통치하던 시기로 주변 강대국의 압력이 적었고 남·북 왕조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에서 서로 전략적 제휴를 맺은 시기였다.

3. 예후부터 사마리아 멸망까지

엘리사가 군대사령관 예후를 선동하여 여호람에 대한 반역을 꾀하게 있을 때 유다왕국의 아하시아는 대 아람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이스라엘에서 휴식을 취하던 여호람을 방문하였다가 여호람, 아하시아, 이세벨이 한꺼번에 살해당했고 예후가 왕위에 올랐다.

유다에서는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딜랴가 잠시 다스리지만 대 제사장 여호야다의 쿠테타를 통해 제거되고 젊은 요하스가 여호야다를 섭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요하스는 제사장 여호야다 생존시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여호야다의 사후 우상숭 배자로 타락한다.

남북 양국의 대립이 심하였으며 북왕국이 우위를 점하였다. 특히 유다 왕 아마샤는 이스라엘 왕 여호야스와 대결하여 벧세메스전투에서 대패하고 인질로 잡혔으며 이후 유다는 15년간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에 의해 다스려 졌다.

15년간의 인질생활에서 풀려난 아마샤는 궁정에서 암살을 당하고 그 아들 아샤라가 즉위하였으나 이 후 국세가 회복되지는 못하였다.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왕 때 융성기를 맞아 느보하맛으로부터 아라바 해까지 영토를 회복하고 요단 동편과 남부시리아 전역에 대한 통치권도 행사하였으나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멸망이 임박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뒤를 이은 스갸랴가 암살당하고 이후 북 왕국은 급속히 쇠퇴기로 접어들고 호세아왕 때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남 왕국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조공을 바치며 왕국을 유지하였다.

4. 사마리아 멸망부터 예루살렘 함락까지

이스라엘 멸망시기의 유다 왕은 히스기야였다.

처음에는 아버지 아하스와 공동통치를 하였는데 단독 통치기부터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고 앗수르에 반란을 꾀하였다.

이후 앗수르의 침공을 ‘주의 사자’의 활동으로 물리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들 므낫세는 앗수르에 신복하여 속국 왕으로서의 지위에 충실하였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와 이집트의 완충국으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기도 하였다.

요시아 왕은 종교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우상숭배를 철페하는데 앞장섰으나 점증하는 이집트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집트 왕 느고 와 므깃도에서 대결하였으나 패사하였다.

이후 유다는 이집트에 의해 왕위가 박탈되거나 세워지는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가 여호야긴 왕 때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충성을 바꾸었다가 다시 바벨론을 배반하자 BC59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 당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