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자료

찾는이 2017. 6. 14. 18:52

포로기와 포로 후기

 

1. 포로시대의 사료

성경은 포로 생활 자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기록하지만 그 사건이후 고레스 칙령까지의 기간에 대하여는 거의 기록이 없다.

이 시대에 역사 서술에 도움이 되는 몇몇 고고학적 증거들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주요도시들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지만 북쪽 베냐민지역에서는 파괴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 시대의 자료들로는 성경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관점에서 씌어진 ‘바벨론 연대기’ ‘나보니두스 연대기’등이 있다.

2.예루살렘의 함락

BC 597년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으로 이송시키고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를 왕위에 올렸으나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이집트와 연합하자 바벨론은 2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시드기아를 체포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왔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성전과 궁전, 성벽 등은 물론 예루살렘의 완벽한 파괴를 명하였다. 도성파괴의 책임을 진 관리의 이름(느부사라단)을 적은 바벨론 토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3 .파괴의 범위

성경기록은 예루살렘의 물리적 파괴가 엄청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에레미아 애가는 이때의 도시 파괴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광범위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남은자들에 의해 예배는 성전이 있던 자리에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렘41;4-7).

4.유배의 범위

고고학적 그리고 문서 증거에 따르면 유배 후에도 유다사회의 기본구조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열왕기는 “ 성안에 남은 백성들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남은 무리들을 경호대장 느부 사라단이 사로잡아 갔으나 그 땅의 가난한자 중 일부를 남겨두어 포도원과 밥을 경작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25:11-12, 렘39:9-10)‘

에레미아는 BC597년에 발생한 유배에 대해 3023명의 포로를 기록하는 반면 열왕기 하는 전투부대원 7,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의 사람이 끌려갔다고 기록한다(왕하 24:14-17). 그리고 열왕기는 ‘온 예루살렘’이 유배 간 것으로 묘사한다.

학자들은 예레미아의 숫자는 남자들을 지칭하고 열왕기의 숫자는 남자, 여자, 아이들을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많은 사람이 죽어쏘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고 이해하는게 좋을 것이다.

유배자들은 강제로 끌려갔으나 노예는 아니였다. 유배 간 유대인들은 생존을 뛰어넘어 번성했으며 심지어 중요한 정치적 위치도 점하는 사람도 많았다.

‘무라슈 가족의 문서‘와 같은 성경이외의 문서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한다.

1) 남은 자들

모든 사료들은 바벨론 인들이 일부 유대인들을 고국 땅에 남겼다고 기록한다. ‘남은 자들‘은 “그 땅의 가장 가난한 자들”로 묘사된다(왕하25;12, 렘39;10,52;16)

예루살렘에 군대가 주둔하였고 유대인인 그달랴가 ‘남은 자들’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달랴는 미스베를 수도로 정하고주변국가로 도망친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 와 농사짓도록 촉구하였다(렘40장-43장). 그러나 그달랴는 이스마엘이라는 유대 왕족에게 피살되었고 이스라엘에 주둔하였던 바벨론군도 이스마엘 군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유대인 지도자 가레아의 요나단이 이스마엘과 맞섰으나 느부갓네살 군대가 진격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에레미아와 함께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2) 유배에 대한 의문

추방과 달리 유배는 유배 떠난 사람들과 유배를 마치고 돌아 온 사람들 간에 인종적 연속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유배를 마치고 돌아 온 자는 유배를 가지 않은 사람들이나 유배지에 남은 사람들보다 약속의 땅에 대한 특권을 가지게 된다.

유배생활의 귀환에 대한 성경 증언의 이념성 때문에 학자들은 강제이주와 유배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5. 바벨론의 함락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뒤 바벨론은 점차 쇠약해 갔다.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 때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메데를 병합하고 뒤이어 리디아를 병탄하였다.

바벨론은 고레스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으로 인해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해는 주전 539년으로 포로 이후 시대로의 전환점에 해당된다.

6. 포로 이후 시대의 사료

포로이후 시대에 대한 성경 증거는 포로 시대보다 훨씬 많다.

고레스의 칙령과 유대인의 고토귀환을 언급한 역대기, 그리고 포로 이후 시대에 관한 광범위한 증거를 기록한 에스라- 느헤미아서가 있다.학개, 스가랴, 말라기도 이 시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경 이외의 사료로는 고레스실린더, 베히스툰 비문, 우드쟈호레스피 비문, 엘레판틴의 아람어 파피루스 등이 있다.

그리고 헤로도투스, 크세노폰, 크레시아스 같은 그리스 역사가의 증언도 참고할 만 하다.

7. 초기 포로 이후 시대

1) 고레스 칙령

포로들이 dP루살렘으로 돌아가 느부갓네살이 파괴했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고레스 칙령으로단게적인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이 시작된다.

성경본문은 선택적이어서 성전재건을 목적으로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의 지도아래 귀환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고레스의 외교정책에 관한 다른 사료들에 의하면 고레스가 이타적 동기로 행하였거나 유다나 유다의 하나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였다.

1879년에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원통 모양의 쐐기 문서가 발견했는데 이 문서를 고레스 실린더라고 한다. 이 문서는 외국의 종교를 회복하는 정책이 유대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민족에게도 적용되었음을 밝히고 잇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 공동체는 그 칙령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음도 사실이다.

2) 세스바살과 스룹 바벨의 정체와 역할

세스바살은 에스라에만 언급된다. 그는 고레스 칙령에 따라 귀환한 첫 번째 유대인들 중 하나이며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바벨론의 신전에 안치한 성전집기들을 예루살렘으로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세스바살은 고레스에 의해 예후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학개와 스가랴, 에스라-느헤미야에서 자세히 언급된 스룹 바벨은 고레스 칙령 직후 예후드로 돌아 온 무리들 가운데 하나엿지만 에스바살의 무리보다는 시간적으로 뒤인듯 하다. 스룹 바벨은 대제사장 예수아와 연관되어 있으며 (스 2장, 3장) 스룹 바벨과 예수아는 제단을 재건하고 공식적인 제사를 재개한다.

이때 “유다와 베냐민의 적”들이 찾아와서 성전제사에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제안하나 거절당하게 된다. 적 들은 성전재건을 방해 하였고 건축사업은 오랫동안 중단된다.

성전재건은 다리우스 2년(BC520년)에 가서야 재건되지만 이번에는 유프라데스 동편지방의 총독 닷드내의 반대로 중단된다. 그러나 다리우스가 고레스 시절의 문서를 검토한 후 성전 재건이 완수 되어야 한다고 판결 함으로서 주전 515년에 성전이 완성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과정의 주관자이며 그분이 페르시아를 이용해 유다를 회복시키셧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3) 포로 이후 시대의 예후드 총독들과 그 이웃들

성경은 예후드의 총독으로 세스바살 과 스룹 바벨, 그리고 느헤미야를 거명하고 있다. 역사적 증거들은 그 밖에 엘나탄, 여호에셀, 아사이 ,바고이 등이 역사 항아리에 찍힌 인장을 통해 확인되거나 엘레판틴 파피루스에 언급되어 있다.

4) 시민 - 성전 공동체

귀환 시대의 사회- 정치적 관계에서 자주 주장되는 이론으로 포로 이후 시대의 예후드 사회를 시미- 성전 공동체로 규정한다.

페르시아 지방 예후드와 유배지에서 돌아 온 공동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다(Weinberb)

그러나 예후드 지방 안에 유대인 공동체와 나머지 사람들이 차별적으로 대우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이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5) 성전 건축

고레스 칙령은 성전에 집중한다. 고레스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바벨론인들이 파괴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도 제공하였다.

성전은 경제적 위기와 반대자들의 방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다리우스 황제 시대에 스룹 바벨의 영도아래 건축이 제개되어 성전이 파괴된 후 68년이 지난 주전 515년에 완성되었다.

6) 초기 포로 이후 시대에 누가 예후드의 적들이었나?

에스라 4:1-5은 유다와 베냐민의 적들이 성전재건에 동참을 거절 당한 뒤 앙심을 품고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학자들은 그들을 북왕국으로 유배 온 외국인들의 후손으로 지방종교를 받아들였고

주전722년 앗수르에 의한 유배 이후 사마리아에 남았던 북방지파의 후손들과 결혼한 사람들로 본다. 주전586년 이후에는 유다 땅에 남았던 남방지파 사람들과도 결혼했을 것이다. 스룹 바벨은 586년 이후 그 땅에 남은 사람 중 인종적으로 혼합되고 종교적으로 혼합적인 사람들과만 갈등한 것으로 보인다.

8. 중기 포로 이후 시대 :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는 서로 다른 두 시대에 관한 정보를 준다. 하나는 최초 귀환으로부터 성전 재건까지의 초기 포로 이후 시대(BC538-515)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라 귀환부터 느헤미야 아래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는 때까지의 기간이다.

에스더 이야기는 그리스어 이름인 크세르크세스로 알려진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르 통치3년에 시작된다. 에스더 이야기는 에스라-느헤미야에 묘사된 두 시대 사이에 위치한다.

에스더는 제3의 하나님의 백성, 즉 외국 땅에 남아있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한다. 그들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 즉 디아스포라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당시의 사회와 역사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인정하지만 에스더 이야기의 역사성은 부인한다. “이야기의 현실성에 근거해 그것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것은 사실의 개연성을 역사와 혼동하는 것이다”라는 이유 때문이다.

성경본문에 따르면 에스더는 크세르크세스 통치 7년부터 12년까지 그의 왕비였다. 그러나 그리스 사료에 따르면 그때 황제의 부인은 아메스트리스였다.

에스터가 아메스트리스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증명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에스더의 이야기가 반드시 증명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너무 억지스럽다.

9. 후기 포로 이후 시대

후기 포로 이후 시대에 대한 중요한 사료는 에스라- 느헤미야 이다.

특히 에스라 7장부터 느헤미야 13장까지가 이 시기의 주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순서와 사명들

일부 학자들은 에스라의 연대를 달리 계산하여 느헤미야 이후에 에스라의 사역을 위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라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에스라의 사역이 1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며 성경본문이 이야기하는 아닥사스다 통치 7년이라는 말을 아닥사스다 1세가 아닌 아닥사스다 2세의 통치 7년에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해석하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에스라가 주전458년에, 느헤미야가 주전 445년에 사역을 시작했다는 견해가 전통적 견해이며 다수 견해이다.

2) 페르시아 정치적 문맥에서 본 에스라와 느헤미야.

아닥사스다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점증하는 위협으로부터 제국의 국경을 보호하기위해 예후드를 강한 우방국으로 간주하고 지원했다. 이 지원을 통해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정비하고 그것의 권위를 재 확인 할 수 있었다.

신학자 벌퀴스트는 제국의 서쪽에에서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사라졌을 때 페르시아인들은 더 이상 관대한 특권을 예후드에 제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3) 누가 후기 포로 이후 시대의 “예후드의 적들” 이였나?

성경 본문에 따르면 “ 강너머”성벽재건이 반란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페르시아 지방의 관리들은 성벽재건 작업을 중단시켰다.

아닥사스다는 통치 20년에 마음을 바꾸어 예루살렘 성벽과 다른 훼파된 건물들을 재건하겠다는 느헤미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나아가 강 너머 지방의 관료들이 느헤미야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성벽재건의 방해자 산발랏, 도비야, 게셈은 어떤 인물인가?

성경과 기타 사료(엘레판틴 문서)에 따르면 산발랏은 사마리아 총독이였고 도비야는 암몬의 총독이였다. 이 두사람과 연합한 제3의 인물이 아랍사람 게셈이였다.

이집트 텔 엘-마스쿠타에서 발견된 은 용기에 “게셈, 게달의 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게달의 연합 혹은 연맹민족은 시리아 사막에서 북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었다.

페르시아시대에는 팔레스타인 남부와 델타지역까지 흩어져 있었다. 게달과 팔레스타인과의 연결은 왜 게달 사람 게셈이 느헤미야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4) 신구약 중간기로 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는 엘리트지도자의 시대에서 공동체 중심의 시대로, 공간적 거룩성의 개념에서 통전적 거룩성의 개념으로, 권위적 구두 전ㄴ승시대에서 구건위적 문서 전승의 시대로 이전하였음을 보여 준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정경의 범위안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된 가장 후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는 여기서 일단 끝나고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신약시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