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高麗의 꿈 2013. 11. 3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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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의 ‘미래 예측’(forecast)이고 다른 하나는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이다. 미래예측이 ‘하나의 미래상’만을 보여준다면, 시나리오 플래닝은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복수의 미래상을 제시한다.-

-즉, 시나리오란 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 하에서 장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환경 요인을 분석해 복수의 설득력 있는 미래상들을 그려보고, 그러한 미래상에 따라 최적의 대응 전략을 수립·실천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의 인생 역시 한 편의 시나리오다. 유대계 헝가리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임산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1945년 그 곳에서 슈워츠를 낳았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모진 곳에서 그의 부모는 살아 남아, 6년 후인 1951년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기회의 땅’에서 소년은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줄곧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결국 렌셀러폴리테크닉대학(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에서 우주항행학(aeronautics)을 전공, 아폴로 계획에 로켓 엔지니어로 참여한다. 소년시절의 꿈을 이룬 그의 눈은 우주를 벗어나 먼 미래로 향한다. SRI인터내셔널과 쉘(Shell)을 거치며 시나리오 플래닝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88년,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 교수 등과 함께 글로벌비즈니스네트워크(GBN)를 설립한다.



그는 오늘도 많은 기업과 국가들을 위해, 끊임없이 미래를 대비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미래를 향한 그만의 최고의 무기는 뭘까. 그에게 묻자 “긍정의 힘”이라는 의외로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긍정의 힘을 믿었습니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유대인 수용소에서 태어난 나는 오늘 벤츠 승용차를 몰고, 몇백만 달러짜리 집에서 삽니다. 결국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 남아요. 그리고 성공합니다. ”

평균수명 140세까지 갈 수도…취업·은퇴 혁명적 변화 올 것”

“9·11 7개월전 테러예측 보고서 올렸더니 부시, 머리 아프다며 무시”

9·11 테러가 일어나기 무려 7개월 전인 2001년 2월. 미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 공습을 예견하는 보고서가 부시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였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늘날 미국 안보상 최대 리스크는 미국 심장부인 워싱턴·뉴욕의 주요 건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 공습이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될 수 있다.”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게 9·11 테러를 예견한 사람은 바로 미래학자인 피터 슈워츠(Peter Schwartz·62)였다. 당시 슈워츠는 미 의회에서 주관해 3년간 한시적으로 설치했던 하트루드먼 국가안보위원회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국가안보위원회는 전 상원의원 게리 하트(Hart)와 워런 루드먼(Rudman)이 공동 위원장을 맡아, 새롭게 들어서는 부시 행정부를 위해 미국 안보전략 보고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조직이었다.

그는 옛 소련의 붕괴를 예견하고, 1950년대 당초 군사전략에서 사용되던 기법인 시나리오 플래닝을 기업과 국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접목시키기 시작한 인물이다. 로켓 엔지니어 출신이기도 한 그는 미래 상용화가 가능한 기술에 높은 안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딥 임팩트(Deep Impact)’ ‘스니커즈(Sneakers)’ 등에 등장하는 신기술 관련 시나리오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슈워츠의 혜안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슈워츠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부시 대통령이 보고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딕 체니 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딕, (머리 아픈데)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주지(You take care of this, Dick.)’. 딕 체니 부통령은? 이 시나리오를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딕 체니 부통령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무시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중국’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테러리즘이 아닌, 중국, 중국, 중국, 중국이라 단정했습니다. 9·11테러가 나기까지 미 행정부의 관심은 온통 중국에만 쏠려 있었죠.”

그는 네오콘의 눈과 귀가 아직도 과거에 매몰돼 있다고 냉소했다. 네오콘들은 아직까지도 옛 중국, 즉 ‘죽은’ 마오쩌둥과 싸우고 있다. “이들은 마오쩌둥이 30년 전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웃음) 그래서 오래 전에 죽은 마오쩌둥과 아직까지 열심히 싸우고 있는 중이죠.”

■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경영 전략 세워

피터 슈워츠는 ‘하나의 미래’만을 예견하는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경영 기법인 ‘시나리오 플래닝’의 대가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시나리오를 만든 후, 각각의 상황에 따라 취해야 할 경영 전략들을 미리 세워 둔다.

그에게 ‘정확히 미래를 예측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원칙적으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게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예측이 빗나갔을 땐 더 큰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를 예언하는 이론은 설사 진실을 말하고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미국이 이라크전에서 실패한 것도, 결국 시나리오 하나만 들고 갔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들어가면 모두가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할 것’이라는 시나리오 하나만 갖고 이라크전을 시작했습니다. 막상 이 예상이 빗나가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가 시나리오 플래닝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실리콘밸리 탄생의 모태로 평가받는 SRI 인터내셔널에서부터였다. 이곳에서 그는 수많은 기업과 정부기관을 위해 미래 경영 전략과 관련된 시나리오 작업을 수행했다.

1982년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 그룹에 합류한 그는 시나리오 플래닝을 활용해 이 회사를 세계 에너지업계 정상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던 1983년, 그 누구도 감히 냉전의 종결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게 되리라는 ‘소련 붕괴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정·재계 사람들로부터 허황된 이야기란 평가를 받았지만, 로열더치쉘은 이 시나리오를 채택, 소련 붕괴에 대비하는 장기적 경영 전략을 수립했다. 그 결과 쉘은 업계 7위에서 단숨에 세계 최고 에너지 그룹 중 하나로 도약한다.

■ 마이너리티 리포트·딥임팩트의 사나이

그는 모니터그룹 계열 글로벌 비즈니스 네트워크(GBN)의 설립자이자 회장이다. 8월 15일, 한국모니터그룹 초청으로 방한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유머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로 쉴새 없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놨다. 갈색 눈동자는 시종일관 또랑또랑하게 빛났다.

그의 삶은 영화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 미래사회의 모습을 재현하는 대중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책보다는 영화가 어떤 이슈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일으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보통 책은 몇 백만 부 팔리는 데 그치지만, 영화는 세계적으로 몇 억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는 ‘죽마고우’ 사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홍채인식시스템, 허공에 떠있는 PC 스크린, 수직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맞춤광고전광판 등 미래 신기술들에 관한 자문도 그가 해준 것이다. 그는 “모두 2050년경 실제로 실현 가능한 기술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또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다. 주요 테마는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라고 귀띔했다. “내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려고 해요. 미국으로 인해 중국과 미국 간 전쟁이 발생, 결국 세계 3차대전까지 가게 되는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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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에 관해 그가 준비해 둔 미래 시나리오를 위클리비즈가 들어봤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피터 슈워츠가 제시하는 인류의 미래 시나리오 몇 편을 들어봤다. 과연 이 중 어떤 시나리오가 ‘적중’하게 될까?



■ 시나리오1. 가능성에 도전하는 기업이 살아 남는다

―원론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죠. 왜 기업이나 국가가 당신의 시나리오를 사야만 하나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경영 환경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죠. 예를 들어, 우리는 현재 세계적인 금융 혼란(turmoil)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CEO들은 고민하겠죠. ‘과연 신규 인력을 채용해야 하나’ ‘우리가 연초에 세웠던 사업 계획들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하나’ ‘구조조정을 해야 하나’ ‘투자 포트폴리오를 수정해야 하나’ 등등…. 이외에도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신규 사업을 시작할 때입니다. ”

―새로운 제품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보편적으로 어떠한 미래 대비 전략이 필요한가요?

“눈을 크게 뜨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의 표정을 2~3초간 ‘즐긴’ 후 말을 이었다. ) 과연 어떤 기업이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 기술을 개발했을까요? 바로 AT&T예요. 1980년에 기술을 개발했지만 오늘날 이 회사는 휴대전화를 팔지 않죠! 왜 이렇게 됐을까요? AT&T 직원들은 휴대전화 기술을 개발한 후 ‘설마 이런 물건을 사람들이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겠어? 누가 과연 길거리를 걸으면서 전화를 하고 싶어할까?’ 생각했죠. 그래서 그들은 다른 기업에 싼 값에 기술 라이선스를 팔았어요. 바로 모토로라에! 모토로라는 이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산업을 창조해냅니다. 똑같은 기술을 두고도 서로 다른 미래를 본 거죠. 하나는 ‘불가능’, 다른 하나는 ‘가능’. 하나의 시나리오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면 그만큼 가능의 영역이 커지는 거예요.”

―특히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한 신제품을 출시할 때 시나리오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거군요.

“그렇죠. AT&T가 놓친 ‘대박 상품’ 중엔 인터넷도 있었어요. 1978년과 1987년 AT&T는 미국 정부로부터 인터넷을 운영해 달라는 제안을 받지만, ‘인터넷, 누가 쓰겠어? 과학자들이나 컴퓨터 전문가들이나 쓰는 거 골치 아프게 운영해서 뭐해?’라고 판단했죠. 그래서 정중히 사양하죠. 만약 당신이 이 기업의 주주였다면 휴대전화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기회를 놓쳐 버린 이 기업 경영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놓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경영진들은 늘 이런 상황에 부딪칩니다. 특히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놓게 될 때, 제품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될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지 등을 놓고 항상 고민하죠. 따라서, 똑같은 제품을 보고서도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기업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이는 정부에도 해당되죠.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른 국가들의 경제적인 도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안보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죠.”

■ 시나리오2. 최악의 상황은 전쟁·보호무역·기상이변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적인 안보 상황은 어떤가요?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정확히 100년 전인 1907년으로 돌아가보죠. 당시 세계적으로 비행기·자동차·전화기·전기 등 수많은 신기술들이 발명됐죠. 혁신과 더불어 국제 교류의 증가에 따라 세계 통합이 오는 듯했죠. 하지만 곧 두 번의 세계대전이 터지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2007년. 상황이 100년 전과 비슷합니다. 인터넷·휴대전화·태양 에너지 기술·바이오 신약 등 신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세계화 흐름은 급물살을 타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이러한 호황을 뒤엎을 수도 있습니다. ”

―호황을 뒤엎을 수 있는 가장 큰 리스크는 어디에 존재하나요?

“오늘날 최대 리스크는 전쟁이나 보호무역주의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보호무역주의가 곧 전쟁을 불러오기 때문이죠. 내 머리 속에 있는 최상과 최악의 시나리오는 각각 통합과 분할(fragmentation)을 주제로 합니다. 20세기를 보죠. 20세기 처음 50년은 분할, 나머지 후반부는 통합의 역사였습니다. 세계가 끊임없이 경제 통합의 길을 걷는다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분할되기 시작한다면, 많은 이슈들이 봇물처럼 터질 겁니다. ”

―세계 통합이 결국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이제, 경제적인 발전은 자원에 기대는 게 아니라 인재들의 두뇌에 기대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차지하는 게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아니에요. 그 대신 혁신의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거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나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머리를 맞댈 때 떠오를 가능성이 더 높아요. 오늘날 세계 경제는 정보와 지식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질수록, 전체적으로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

―그렇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불러올 수 있는 요인은 뭘까요?

“일단 나는 국내 정치가 세계화에 해(害)가 되는 상황을 가장 우려합니다. 이를테면 미국 디트로이트시 의원이 ‘이제 자동차 수입 장벽을 높여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할 수도 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원이 ‘동남아시아산 섬유 수입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죠. 표심을 의식하는 정치인들의 오판은 세계화에 상처를 낼 수 있습니다. ”

―그 외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면?

“단연, 환경 문제와 세계적인 전염병 문제죠. 이를 테면 조류 독감과 같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덮쳤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과 해외 비즈니스 출장을 포기했는지 목격했어요. ‘물’과 관련된 재앙도 문제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최근 2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매우 심한 장마(monsoon)로 인해 자신의 주거지에서 쫓겨났어요. 개인적으로 나는 방글라데시가 한 나라로서 수명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에서 이 나라는 곧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해수면이 조금만 높아지면, 방글라데시는 불모지가 될 겁니다. 1억6000만 명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뜻이겠죠. 이 사람들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한다면, 그 주변 지역이 혼란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

■ 시나리오3. ‘늙어가는 대륙’ 유럽이 걱정된다

―이들이 이동을 시작한다면, 이민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겠는데요.

“이민문제에 관한 시각은 세계 곳곳에서 엇갈립니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유럽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이 너무 다릅니다. 미국은 이민을 하나의 ‘자산’으로 보는 나라입니다. 미국인들은 모두 이민자들이죠. 이민자건 아니건,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르다’는 것에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죠. 미국 UC(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 학생의 47%가 아시아인들입니다. 캘리포니아 최고 대학에 이 정도의 비율이 있다는 것은 미국의 미래가 아시아 출신들에 달려 있다는 말도 되죠. 우린 그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주지사(아놀드 슈워제네거)도 오스트리아 출신이죠. 인텔 창업자 중 80%도 이민자 출신이었습니다. (웃음)”

―유럽은 어떤가요?

“유럽은 똑같은 이민 문제도 재앙(catastrophe)으로 여기죠. 이 대륙은 전통적으로 백인·기독교인들이 차지해 왔습니다. 일시적으로 유대인들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몰아냈어요. 이렇듯 미국과 유럽은 이민 문제에 관한 시각이 다르니까, 미래를 향한 시나리오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씀이신가요?

“미국의 경우엔 이민 문제에 관해 우려의 목소리는 있더라도 구체적인 행동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엔 매우 추한(ugly) 행동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옛 유고슬라비아의 ‘인종청소’처럼 말이죠. 유럽은 앞으로 이슬람인들을 쫓아낼 겁니다. 벌써부터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대륙을 뒤덮고 있어요. 덩달아 인도·파키스탄 사람들 역시 몰아낼 수도 있겠죠. 늙어가고 있는 대륙 유럽은 이민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해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한다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을 겁니다. ”

■ 시나리오4. ‘은퇴’라는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가 분다

―지적하신 대로 유럽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구 고령화 문제에 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국가 정부들이 국민연금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데, 각국 정부의 연금 문제는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오늘날과 같은 정년에 은퇴하는 게 불가능하게 될 테니까요. (이 시나리오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 생각해보세요. 나는 지금 60세가 넘었지만, 아직도 일 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냅니다. 아직까지 힘이 넘치고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죠. 50년 전만 해도 내 또래의 사람들이 이렇게 활동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좋아지면서, 기존 은퇴 연령에 일을 그만두는 건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

―이와 관련해 준비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면?

“나는 노후 억제와 관련된 IGF-1 등 성장 호르몬 연구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의 노화 관련 시나리오에 따르면, 10여 년 후엔 아주 획기적인 항(抗)노화 치료법(anti-aging therapy)이 발견될 것입니다. 평균 연령이 140세까지 갈 수도 있는 일이죠. (기자를 보며) 당신은 아마 지금부터 120년 더 살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의학 기술이 얼마나 비쌀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면 싼 알약 형태로 될 수도 있을 겁니다. ”

―하지만 모두 안락한 노후를 즐기고 싶어하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정년 퇴직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요?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사람이 신체적으로 건강하면, 곧 일을 찾게 될 겁니다. 은퇴라는 개념 자체가 1930년대에 와서야 생겼습니다. 그 전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일을 했습니다. 앞으로 정년 퇴직이라는 개념이나 채용에 관해서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70·80세에도 구직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예요. 세계적으로 이미 정년 연령이나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늦춰지고 있습니다. ”

■ 시나리오5.
유조선이 사라진다

―기술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계시는데요. 앞으로 가장 각광 받을 만한 기술을 소개해 주신다면?

“인공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생명체를 인공 합성하는 학문으로 합성생물학 또는 인조생물학이라고도 하죠. 생소하게 들리죠? 쉽게 설명해 볼게요. 이 학문은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변형해 하나의 작은 공장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공장이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죠. 예를 들어, 이 기술을 이용해 항(抗) 말라리아제를 만드는 연구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인데, 비용은 기존 화학작용으로 만들 때의 10%도 안 돼요. 이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에탄올과 휘발유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그렇다면 현재 에너지 산업에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날 수 있겠군요.

“몇 십 년 뒤 이런 미래를 가정할 수 있어요. 주유소에 간 당신은 주유기 대신 박테리아들로 가득 찬 탱크에 자동차를 갖다 댑니다. 그러면 물과 함께 자라나는 박테리아들이 휘발유를 만들어내고, 곧 이 휘발유로 주유를 하게 되겠죠. 이렇게 되면 원유 공급차나 원유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집에서도 휘발유를 생산하는 박테리아를 기를 수도 있을 겁니다. ”

―기업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에너기 기업인 BP는 UC버클리 바이오 프로젝트에 5년간 5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을 기반으로 한 어마어마한 산업이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죠. 이제 우리는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던 것들을 ‘제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무언가를 생산할 때 유해물도 남기지 않을 겁니다. 환경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겠죠. 생각해 보세요. 유해물을 배출해 이를 땅에 묻는 건 인간뿐입니다. 자연은 순환 구조를 통해 유해물을 결국 없애니까요.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고도로 통합돼 있죠. 우리도 자연의 구조를 따라갈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기술로 인해 인간의 더러운 발자국을 지울 수 있겠죠. 에너지도, 섬유도, 먹거리도 모두 지금보다 ‘깨끗하게’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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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워츠가 말하는 ‘대한민국의 시나리오’
“한국 경제 시나리오는 중국에 달려있어 중국이 태평하길 기도하라” 냉엄한 충고

        “북한은 바보같은 게임중… 리비아처럼 변할 겁니다”

“북한은 지금 바보 같은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결국 리비아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

피터 슈워츠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시나리오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해 묻자, 그는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가다피(Quaddafi) 얘기로 시작했다.

“리비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과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나라였습니다. 풍부한 자원이 있는데도 국민들을 가난에 허덕이게 하던 나라였죠. 국민들은 가다피라는 독재자가 쓴 ‘그린북(The Green Book·가다피의 통치이념을 정리한 책)’을 달달 외워야 했습니다. ”

슈워츠는 리비아의 상황을 반전시킨 주역은 가다피의 아들인 자이프 알 이슬람(al-Islam)가다피였다고 밝혔다. 아버지 가다피가 2003년 12월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한 데 이어, 과거 리비아가 저지른 항공기 테러에 대해 배상을 약속하는 등 일련의 유화책을 도입한 이면엔 자이프의 흔적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자이프는 영어에 능숙하고 유럽에서 교육받았죠. 사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축구 선수가 되려고 하기도 했어요. 많은 곳을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곧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

자이프는 아무도 리비아에 대해 알지 못하고, 리비아와 삶의 질 수준이 비교가 안 되는 ‘바깥 세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비아로 돌아간 그는 아버지에게 “뭔가 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자이프는 2년 전, 다보스에서 슈워츠가 회장으로 있는 모니터그룹 산하의 GBN(글로벌비즈니스네트워크)과 국가 개조 컨설팅 의뢰 계약서에 사인했다.

“북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될 거예요. 북한의 현행 지도부 행태가 영영 지속되진 못할 겁니다. 세대가 바뀌고, 그다음 세대가 밖에 나와 선진국들과 한국의 부를 맛보기 시작한다면, 분명 리비아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

그렇다면 그가 한국 기업들을 위해 준비해 둔 시나리오는? “결국 모든 것은 통합과 혁신에 달려 있습니다. 이젠 ‘어떻게 싸울까?’가 아니라 ‘중국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 그는 “한국의 가치사슬(value chain) 안에 중국을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면서 “서비스인지, 제품의 질인지, 디자인인지 한국이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한국이 수십 년간 스스로 독특한 혁신의 길을 적절히 찾아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국으로의 생산 기지 이전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웃 국가 일본의 경우엔, 이미 국내 생산보다 해외 생산을 통해 얻는 수익이 더 큽니다. 자국에서 생산된 제품 수출보다 해외 투자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거죠.”

그리고는 한국 역시 중국이 주는 거대한 기회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생각해보죠. 10년마다 중국 안에 두 개의 ‘한국’이 만들어질 겁니다. 인도에선 한 개 반이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인도와 중국의 성장 기회가 매우 크다는 겁니다. ”

특히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시장에서도 가깝고, 문화·역사적 유대도 깊죠. 물론 언어적인 장벽이 있을 수 있지만 한자를 쓰지 않습니까? 한국 기업들엔 행운입니다. ”

그는 한국이 갖는 최고의 무기로 ‘혁신’을 꼽으면서, 혁신이란 멈춤이 없는 과정임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은 지금까지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전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은 ‘썩기 쉽다(perishable)’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혁신하면, 곧 다른 사람들도 혁신할 겁니다. 한국의 혁신은 곧 다른 국가들의 모방 대상이 될 겁니다. ”

혁신은 중심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변두리(fringe)에서 나온다는 점도 강조했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Prius)’의 매출액은 대형 트럭 매출액의 10%도 안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혁신의 리더로서 도요타를 자리매김한 것은 트럭이 아닌, 프리우스였어요.”

그렇다면 그가 볼 때 한국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뭘까. 그의 대답에 또다시 ‘중국’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내부적 문제(intern al trouble)들에 휩싸인 혼란스러운 중국이 한국엔 최악의 시나리오예요.”

그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다. 오늘날 중국 인구 중 2억명은 경제 발전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10억이 넘는 인구는 아직까지 교육조차 제대로 못 받고 있고, 찢어지게 가난하다. “이런 상황이 너무 오래 방치된다면, 그 10억명이 중국 사회를 찢어 놓을(tear apart) 수도 있어요.”

환경과 에너지 문제 역시 중국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중국의 공해 문제는 이미 극도로 ‘위험한’ 수준에 달했고, 에너지를 향한 식욕 역시 무섭다. 중국의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맞추기 위해선 매주 1000메가와트급 파워 플랜트(power plant) 시설이 필요할 정도다. 중국이 이러한 이슈들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매서운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태평한 중국이, 곧 풍요로운 한국을 의미할 것입니다. 태평한 중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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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워츠가 보는 ‘기로에 선 미디어’

[TV] 아무도 안보는 광고… 방송사들 치열하게 생존 고민해야
[신문] 취재 기능은 줄어들더라도 편집 기능은 더 강해질 것

정보기술(IT) 발전과 다매체의 등장으로 격변기를 맞고 있는 미디어(media) 산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슈워츠는 미디어 산업이 현재 잔인한(cruel)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방송의 경우엔 산업 자체의 패러다임이 아예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미디어 산업, 특히 신문 산업의 미래 시나리오에 대해 진단해 주시죠.

“앞으로 일반 취재의 역할은 다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각종 정보들이 컴퓨터를 타고 어느 곳이든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편집의 기능은 분명 살아남을 겁니다. ”

―편집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나도 무수한 블로그(blog)들을 읽고 있지만, 거기에선 정보의 가치와 경중(輕重)을 한눈에 알아보기 힘듭니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꼭 알아야 할 것과 조금 몰라도 될 것을 구분하는 게 혼동돼요. 신문을 보면 이런 게 한눈에 들어오죠.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지 도움 받기도 하고…. 당신 에디터(editor)의 역할은 앞으로 살아남을 거란 얘깁니다. (웃음)”

―신문산업의 대응방식을 조언해준다면.

“신문사는 극단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곤 솔직히 살아나기 힘들죠. 뭔가 다르고 한 차원 더 높은 정보를 제공할 건지, 아니면 인터넷 사이트를 개편해 아예 속보 기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건지 선택해야 돼요.”

―방송은 미래에 어떻게 변할까요?

“기로에 서 있는 건 방송도 마찬가지예요. 최근 나는 미국의 한 유명한 방송사의 미래에 관해 컨설팅을 해줬습니다. 어떤 방송사인지 밝히긴 힘들지만, 이 방송사엔 향후 몇 년간 아주 혁명적인 구조 변화가 있을 겁니다. 17살짜리 내 아들은 단 한 순간도 TV를 보지 않아요. 늘 컴퓨터 앞에 붙어 있죠. 티보(TiVo·TV광고 시청시간을 시청자별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한 미국의 디지털비디오레코더 제조업체) 등이 등장하면서 TV광고도 사람들이 더 이상 안보죠. 변해야 할 시점을 놓친다면, 살아 남기 힘들 겁니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

 

조선일보 2007.08.31자 인터뷰 기사 


 

출처 : 민들레영토
글쓴이 : 민들레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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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高麗의 꿈 2012. 2. 24. 09:29

광개토태왕비문의 경우 태왕의 의롭고 공의로운 전쟁내용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비문의 해석에 있어 논란을 가져다 주는 요인은 비석의 내용을 파렴치하게 지나국이나 일제가 훼손하고 날조하는 바람에 중요한 한자들이 많이 삭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이나 한단고기 기록내용을 비교대조해서 태왕의 전쟁기록이 어떤 내용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단고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 관련 기록은 광개토태왕비문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이여서 사실성을 더해 준다. 왜 지나국의 동북공정론자들과 일본의 식민사관론자들이 [한단고기]를 위서취급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통해서 광개토태왕은 만주.한반도.일본열도.지나 북부지역까지 평정하여 모두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임나가라(대마도)에 고구려 연정을 설치하여 일본열도까지 평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이 때에 백제,신라,가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 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광개토태왕비문]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

"영락6년 丙申(*****)에 태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잔국(웅진백제)을 토벌하시어 軍(군)의 □□首( ? ? 수)를 공격하여 18 城(18성)을 쟁취하고 模盧城(모로성) 幹 利□城(간저리*성) 閣 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沙城(미사성) □ 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 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

*각주/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본진이 있는 웅진과 주변지역의 수 많은 성들을 토벌했다는 기록이다.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내용을 명확히 증거하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 왔다."가 그것이다.

[환단고기]를 아직도 위서라는 지나국과 일본국의 세작노릇하는 역사학자들을 단번에 고꾸라뜨리는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환단고기]기록에는 장수태왕의 연호가 건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그러한 기록을 사실로 입증했다. 대진국(발해) 황제의 연호에 대한 [한단고기-대진국본기]기록도 대진국 공주의 무덤발견으로 증명되었다.

발해는 대조영이 세운 국호가 아니라 당나라가 부른 국호임에도 아직도 한국인들은 발해라고 부르고 있다. 소중화 사대주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아서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이름은 대진국이다.그리고 일본 등에 보낸 외교국서에는 '고려'로 기록하여 (고)고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했다.

또한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에서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잔국이 웅진백제임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단고기를 내세우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광개토태왕이 지나대륙에서 백제와 전쟁을 한 것인양 곡해하고 있다.


보충사료▣ 광개토태왕비문과 크게 다르지 않는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의 기록내용

고구려 제19대 광개토경호태황은 재위기간이 391년~413년이며, 연호는 영락(永樂)으로 일명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사후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했다.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즉,공이 크며 성인과 같은 덕이 탁월하였다.

온 세상의 나라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하였다.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예로서 진열하고 예로서 하늘의 음악으로 연주했다.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각주/나이 18세에 태왕에 오른 광개토태왕.결코 나이18세가 어리다고 볼 수 없다.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같은 뇌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와 상관없이 교육을 통하여 뇌에 어떠한 내용을 저장시켜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의와 침략과 독식은 물리치고 공존번영할  수 있는 대동홍익주의를 심어 주는 일이다.18세에 태왕에 즉위한 광개토태왕의 뇌구조가 그랬다고 볼 수 있다.)

말을 타고 순시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하늘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인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광개토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  3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돌아 왔다.(*각주/이 기록에서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고 고구려 대방땅을 공격한 왜의 실체는 광개토태왕비문에 잔국으로 비하하여 기록된 웅진백제를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세력임이 명확해진다.)

이 때에 백제,신라,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일본열도 세력은)3국이 바다 섬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산 적이 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하였다.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고구려)골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즉 고구려 제19대왕이신 광개토대왕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였으며 성이 같다.옛날부터 웅습성이 있었다.지금의 구주의 웅본성이 그것이다.(*각주/[한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 기록에 "먼 옛날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이후 북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부여.흉노.선비족이 마한영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해서 많은 나라들이 생긴 것이다.)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 세력)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모두 열제의 명령에 통제되었다.(*각주/광개토태왕은 백제연방군를 정벌할 때 임나가라-대마도까지 복속하여 대마도에 고구려의 임나연정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이 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안라인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그것은 다라국이나 안라국은 고구려인들이 대마도 지역에 세운 고구려나라들이기 때문이였다.)[광개토태왕비문]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온 관계로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나, 광개토태왕께서는 신라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

*각주/신라를 침략한 백제연방군(가야포함 왜군)을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몰아 내고 백제와 일본열도를 잇는 대마도까지 정벌하고 고구려출신의 안라인에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을 통하여 10여년간 백제와 왜의 연합을 단절시키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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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는 서기 414년 태왕의 장례 때 태왕릉에서 동북쪽 200m되는 곳에 비석을 세웠다. 무려 1,600여년의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을 품고 지금까지 우뚝 서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새긴 비석은 한 덩어리의 각력 응회암을 쪼아 만든 것으로 불규칙한 방주형이다.

비석 매행마다 41자, 전부 1,775자이며 세월이 흘러 내려온 1600여년의 수와 비슷하게 현재 1,590여 글자는 판별하여 해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 개국의 전설과, 호태왕 일생의 업적과, 묘를 지키는 제도와 관련법령으로 나누어 있다. 호태왕비는 훌륭한 서법 예술품으로서 “해민족의 보물 ”이다.

그럼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영토와 국제적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아 보자.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하여 기반을 마련하셨다. 천제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으로 알을 깨고 탄강하시여 세상에 출생 때부터 聖德(성덕)을 갖고 태어 났다."

* 각주/고구려 개국시조 고추모의 혈통은 부여를 개국한 해모수(47대 고열가 단군의 친척)의 둘째 아들 고진(부여연방 고리국왕)의 손자 불리지(고모수-부여연방 옥저왕)가 압록하(요하강)을 순찰하다가 강무역에 종사하는 하백씨의 딸 유화의 미모에 반하여 사랑을 나누게 되어 임신한 아들이 고추모다. 부여법에 여자가 혼전임신을 하면 크게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집에서 쫓겨난 미혼녀 유화는 고추모를 임신한 채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서 불리지를 만나러 길림지역 웅심산을 찾아 갔으나 이미 죽고 없었다.

당시 부여는 해모수왕조가 끝나고 흑룡강지역의 부여연방의 고리국 왕의 아들인 고두막이 한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부여연방의 단군에 올랐고, 해모수의 손자였던 해부루가 부여연방의 단군직을 고두막에게 넘기고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가섭원 부여(동부여)를 세운 시기였다. 유화는 자신을 의탁할 곳이 고추모의 직계친척인 해부루 밖에 없었기에 동부여로 찾아갔고 해부루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해부루는 아들이 없어 양자로 삼은 금와를 왕으로 삼았다. 금와는 해부루와 혈족인 고추모가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위해서 고추모를 제거되야 할 대상이였다.

유화는 이를 눈치채고 동부여를 떠날 것을 고추모에게 권유하고 오이.마리.협보 등을 데리고 고추모를 송화강(엄리대수)을 건너서 부여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 때 부여의 단군은 아들이 없던 고무서 단군이였다. 고무서는 망명한 고추모가 비범한 인물로 알아 보고, 부여의 통치를 맡길 후계자로 정하고, 이미 사별하고 홀로 된 둘째 공주 소서노와 혼인을 시킨다. 그러나, 고추모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부여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다시 남하하여 압록강지역의 토착세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상의 나라이름인 고리(고려)라 정하니 고씨의 <구려>다. 이러한 배경으로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했다."고 비문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고고리로 고씨의 고리국이라는 의미다.'해'는 한자로 '고'다. 해모수=고모수/해추모=고추모

고구려는 단군조선 말기에 5가 공화정의 승인을 받아 단군에 직위한 해모수의 혈통을 직접 받았고, 부여7대 단군에 직위한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추모의 나라였기 때문에 외세의존성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단군조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고추모의 다물국시를 계승하여 자주국방을 토대로 주변 나라들을 하나 하나 복속하여 만주의 패권을 장악해 나가면서 지나대륙으로 진출하였던 것이고, 300만 지나세력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추모왕께서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고 수레를 타고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臨津(임진:나루터)에서 추모왕께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나를 위하여 거북을 떠오르게 하여 다리로 연결하여 강을 건너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라고 소리치시니 곧 거북이가 떠올라 교량을 만들어 주어 강을 건넌 후에 거북이는 흩어 졌다. 이에 비류곡 忽本(골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각주/마치 이집트군에게 쫓겨 홍해 앞에 서 있는 출애굽 이스라엘 민족의 다급함과 같다. 동부여를 탈출하여 부여로 망명할 때 건넌 엄리대수는 지형상 동부여가 오츠크해와 접하는 연해주 지역이기 때문에 연해주 서쪽지역에 위치한 부여로 망명을 하려면 송화강 밖에 없다.

부여에서 남하한 고추모 세력은 처음에 비류강가에서 지내다가 忽本(골본) 서쪽 산(오녀산)에 성을 쌓고 고구려를 세웠다. 비류강(혼강)위의 오녀산성은 100미터가 넘는 난공불락한 험준한 바위성으로 700년 고구려의 토대을 암반위에 다졌다. 고추모께서는 개국훈시에서 사람은 3신1체 조물주께서 창조하신 존재라면서 정치란 사람을 평안케 하는 일이고, 병력이란 침략을 저지하는 수단임을 명백히 하면서 지상낙원이였던 단군조선의 모든 땅과 정신을 침략자들(지나세력)로부터 회복하는 다물정신이 국시임을 선포하였다.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추모왕은 세속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즐거워 하지 않으시자 하느님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시니 왕은 반갑게 맞이하시었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 가시며, 세자 유리왕을 걱정하시며 <도로써 잘 다스려 나라를 부흥시켜라>라고 말씀하셨다."

*각주/편모 슬하에서 자라나 한 평생 고난과 시련,그리고 정치적 박해로 점철된 고추모가 고구려 태왕에 오르자, 동부여에서 혼인한 예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 왔다. 소서노는 고구려의 권력내분은 당시 한나라의 침략을 용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대릉하 하류지역에 고구려 제후국을 세우니 어하라다. 고추모는 2대 태왕에 즉위하는 유리에게 도(순리=양심)로써 고구려를 잘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온조는 어하라를 떠나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와 부천을 거쳐 서울 한강지역에 위례성을 쌓고 십제를 세웠다. 비류가 어하라 왕에 즉위했으나 민심이 따르지 않자, 소서노와 비류도 나중에 인천 소래포구로 들어 왔다. 비류는 동생 온조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보고 자책감에 빠져 자결하였고, 소서노 또한 아들 온조를 만나기 위해 위례성으로 들어 가는 도중에 숨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온조세력과 비류세력과의 권력싸움과정에서 빚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류가 어하라왕에 오르자 민심을 상실했다는 [환단고기]기록내용은 고구려 권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구려에 대적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나 추정된다.

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시조께서 창업하신 국가 기반을 다지셨다. □ 제 17대 世孫(세손)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 태왕(호태왕)께서 베풀어 주신 은택과 하느님의 위세와 武勇(무용)에 힘입어 四海(사해: 천하 사방)을 掃除(소제=평정)하여 □□태왕께서 바라시던 나라는 질서가 안녕되어 가업에 종사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백성들은 넉넉한 재물로 잘 살게 되었다. 하늘과 같은 큰 은혜를 끝없이 베풀어 주시고 갑자기 돌아 가신 후 九州(9주)의 백성들은 슬퍼하며 酒宴(주연)을 올리며 항상 잊지 못하고 있다가 駕葉國(가섭국)으로 甲寅年(갑인년:서기 414년) 9월 29일 乙酉(을유)일날 就山(취산:산능)에 移葬(이장)을 하고 이 능에 비석을 세우고 碑銘(비명)에 훈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였다. "

其辭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 叉躬率住討 □富山 負山 至鹽水上破其丘部洛 六七百當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五□ 遊觀土境田獵而還

"그 업적을 말하면 영락 5년 乙未(을미)년에 태왕은 碑麗(비려/거란)가 쉬지 않고 침략함으로 몸소 군사를 통솔하고 토벌하여 □富山(부산)과 負山(부산)의 鹽水(염수) 위에까지 이르러 그 부락 6-700을 파괴하고 牛馬(우마)와 양때를 얻은 것은 이루 칭할 수 없었다. 돌아 오시는 길에 수레를 타고 □平道(평도)를 지나 東來(동래)의 □城(?성)과 力城(역성)과 北豊(북풍) 五□(5성)을 유람하시면서 국토의 경계를 관찰하시고 수렵도 하시고 환도하시었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以 倭以 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 爲臣民以

"百殘(백잔:한성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다. 倭(왜)는 辛卯年(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 파괴하고 백잔(한성백제)과 신라를 臣民(신민)으로 삼았다."

*각주/백잔은 한성백제를 의미한다. 또한 倭(왜)는 당시 잔국(웅진백제)에 복속한 한반도.일본열도의 해상세력을 총칭한다.왜가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의미는 백제가 개국된 웅진의 백제가 서남해 해상세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백제연방에 편입시키기 위해 신라를 위협하는 등 남한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왜>를 일본열도의 해상세력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일본열도의 해상세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지배집단(웅진백제)을 이해해야 왜의 실체가 밝혀 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잔국으로 비하되어 표기된 웅진백제와 왜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비문내용을 보면 왜의 실체가 명확해진다.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잔국토벌에 나선 기록이 그것이다.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

"6년 丙申(*****)에 태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잔국(웅진백제)을 토벌하시어 軍(군)의 □□首( ? ? 수)를 공격하여 18 城(18성)을 쟁취하고 模盧城(모로성) 幹 利□城(간저리*성) 閣 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沙城(미사성) □ 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 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

*각주/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본진이 있는 웅진과 주변지역의 수 많은 성들을 토벌했다는 기록이다.[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내용을 명확히 증거하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 왔다."가 그것이다.[환단고기]를 아직도 위서라는 지나국과 일본국의 세작노릇하는 역사학자들을 단번에 고꾸라뜨리는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환단고기]기록에는 장수태왕의 연호가 건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그러한 기록을 사실로 입증했다. 대진국(발해) 황제의 연호에 대한 기록도 대진국 공주의 무덤발견으로 증명되었다.

其國城賊不服氣敢 土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 遺刺迫城橫 □使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白一千人細布 □歸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御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그 나라 城(성)의 도적들은 광개토태왕의 기풍에도 감히 百殘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성난 노도와 같은 위세로 아리수(한강) 강을 건너 승리를 거두었다.城(성)을 종횡으로 압박하자 刺史(자사)를 사신으로 파견하고 백잔과 그의 왕(아신왕)은 곤경에 처하자 남녀 1,000명과 비단을 헌납하면서 대왕을 찾아와 금일 이후는 영원한 노예가 되어 복종하고 태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서약을 시켰더니 自進(자진)하여 사죄함으로 御錄(어록)에 남기고 赦免(사면)해 주었다. 그 후는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순종하였다. 이에 58성과 촌마을 700과 將帥(장수)와 殘兵(잔병)과 왕의 동생과 아울러 대신 10명과 법사도 도읍으로 돌아 가도록 하셨다."

*각주/웅진백제를 궤멸하고 한성백제를 정벌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고 국내성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다. 광개토태왕의 백제정벌로 백제유민들과 서남해 해상세력(왜)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를 하게 되어 일본사에서 인구가 가장 급증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웅진백제가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한반도에는 한성백제만 남게 되었다.웅진백제는 일본열도를 지배하며 일본천황가의 주인이 된다.한성백제가 일본열도의 웅진백제(일본천황가)에 태자들을 볼모로 보낸 것은 동족으로서의 협력과 약속이행에 대한 친선관계유지에서 나온 것이다.그래서 한반도백제부흥전쟁 때 일본열도의 웅진백제가 도운 것이고 한반도 한성백제가 망하자,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웅진백제세력과 합하여 일본국을 개국한 것이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영락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 기마부대를 편성하여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각주/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서천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북쪽지역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에 있었다. 토욕을 토벌한 것은 당시 지나 북부지역에서 흥기하는 북위의 기선을 제압하고 북위 후방의 토욕이 북위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고성에서 나온 조치였다.북위는 결국 고구려 귀족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장수태왕 떄는 북위의 왕족의 족보를 고구려에 보내고, 고구려 귀족의 여성이 낳은 아들이 북위왕이 되어서는 고구려 개국성조 고추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북위 궁궐안에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제후국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위들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온 관계로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나, 광개토태왕께서는 신라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

*각주/신라를 침략한 백제연방군(가야포함 왜군)을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몰아 내고 백제와 일본열도를 잇는 대마도까지 정벌하고 고구려출신의 안라인에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을 통하여 10여년간 백제와 왜의 연합을 단절시키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통제했다.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한 이유는 신라가 이뻐서가 아니라, 신라를 백제를 겨냥한 군사방어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신라구원으로 고구려는 100여년간 신라를 제후국으로 삼아 왕을 친고구려계 인물로 삼았고, 신라는 고구려를 상국으로 삼아 고구려 태왕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고대 은나라 왕들이 산동지역의 태산에 올라 단군조선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와 동일했다. 실제로 경주지역에서는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기용 청동솥이 출토되어 사실성을 입증했다.

十四年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 相遇王 幢要截 蕩刺 倭寇潰 敗斬 煞無數

"14년 甲辰(갑진)에 왜(백제 해상세력)는 궤도를 벗어나 약정을 지키지 않고 帶方界(대방계)를 침입하여 □石城(석성)에 수많은 선박(배)를 연결해 놓고 平穰(평양)의 □에서 왕과 서로 만나 줄 것을 요청하면서 幢旗(당기)에 칼을 꽂아 찌를 듯이 방탕한 짓을 하기에
倭寇(왜구)를 궤멸시켜 참패시키고 무수히 참살시켰다. "

十七年丁未敎遣出騎五萬 □師□合戰 斬煞湯盡所稚鎧鉀一萬餘領 軍資 器械不可稱數 還破沙□城 婁城城

"17년 丁未(정미)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후연)과 전투를 하여 다 참살시켜 소탕하고 갑옷 1만여 벌과 군수 물자와 기계를 칭할 수 없는 숫자를 노획하고 沙□城(사( )성),과 婁城(루성)의 城(성)을 파괴하고 돌아 왔다. "

*각주/지나국이 비문을 훼손했다면 이 기록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기록내용과 짝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즉, 광개토태왕은 17년 초에 후연을 정벌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가져 가고,고국원태왕의 황후와 태후를 인질로 끌고 가 할아버지 고국원태왕에게 온갖 모욕을 주었던 모용왕조를 도륙하고 고구려출신 고운을 왕으로 세우고 돌아 온 기록이다.고운이 왕이 된 북연은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다는 의미다. [삼국사기]"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북연의 왕 고운이 시어사 이 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고운의 조부 고화는 고구려인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 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 보가 고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었다."

卄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 屬民中 叛不貢王 躬率往 討軍到 餘城而 餘城國변 □王恩 普處於是旋還 叉其慕化隋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立婁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20년 庚戌(경술)년에 동부여의 옛 추모왕의 속민 중에서 반란을 하였거나 조공을 받히지 아니한 왕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토벌하시고 나머지 다른 城(성)과 다른 국왕은 곳곳을 돌면서 은혜를 베푸시고 환국 하셨다. 또한 (호태왕)의 은덕에 감화되어 따라 온 관리는 미구누압노,비사마압노, 사누압노, 숙사사압노, □입누압노, 이다. 무릇 공격하여 파괴시킨 성은 64개이고, 마을은 1400개 이었다."

守墓人 烟戶 賣句余民國 烟二 看烟三 東海賈國 烟三 看烟五 敦城( ) 四家盡爲看烟 ( )城一家 爲看烟碑利城 二家爲國 烟 平穰城 民國 烟一 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住 婁人國 烟一 看烟십二梁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連 卄二家 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 韓穢 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 岑韓五家爲看( )句牟客頭二家爲看烟永底韓一家爲看烟舍조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家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各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弓利城國烟二看烟( )( )( )城國烟六看烟<11字缺>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一閏奴城國烟二都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전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三穰城卄四家爲看烟( )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句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宴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

守墓人(수묘인) 烟戶(연호)는 賣句余民國(매구여민국)과 東海賈國(동해매국)의 敦城(돈성) ( )( )城. 碑利城(비리성). 平穰城(평양성) 婁人國(루인국)의 梁谷(양곡), 梁城(양성) 改谷(개곡) 新城(신성) 南蘇城(남소성) 韓穢(한예)의 沙水城(사수성) 牟婁城(모루성) 豆比鴨岑(두비압잠) 句牟客頭(구모액두),永底韓(영저한) 舍조城(사조성) 耶羅城(야라성) 炅古城(경고성) 客賢韓(객현한),阿旦城(아단성) 雜珍城(잡진성) 巴奴城(파노성) 模盧城(모로성) 牟水城(모수성),幹弓利城(간궁리성) ( )( )( )城. <11字 **** 缺결> 豆奴城(두노성) 奧利城(오리성) 須鄒城(수추성) 百殘(백잔) 南居韓國(남거한국),大山韓城(대산한성) 農賣城國(농매성국) 一閏奴城國(일윤노성국) 古牟婁城(고모루성),전城(전성) 味城(미성) 就咨城(취자성) 穰城(양성). ( )那城(나성) 那旦城(나단성),句牟城(구모성) 利城(리성) 比利城(비리성). 細城(세성) ****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 敎言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酒掃 吾로慮舊民轉當리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 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삽看烟三百都合三百家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생존시에 시조왕과 선대왕에 대하여 하교하신 말씀은 먼 옛날과 근래에 쟁취한 신민국의 백성들에게 “묘소를 지키는 법”과 酒掃法(주소법)을 교지로 말씀하셨다. <내가 염려되는 것은 오래되면 환경이 좋지 않아 백성은 당연히 옮겨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만년 후에 세력이 약해지더라도 묘소만은 안전히 지켜야 된다. 다만 내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취득한 곳에 침략자가 쳐들어 오면 韓,穢(한.예)에 령을 내려 대비하고 酒掃法(주소법)은 교지와 같이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敎令(교령)에 따라 韓,穢(한.예)에 220가구를 취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으나 염려한 것과 같이 법칙을 잘 알지 못하여 다시 옛 부터 지켜온 백성과 새로 110가구를 취하여 都合(도합) 330가구를 守墓(수묘)하여 看守(간수)하도록 하였다."

*각주/광개토태왕은 광개토태왕비를 지키는 사람들로 韓,穢(한.예)인들을 삼았다는 것이다. 즉, 해머리땅 사람들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광개토태왕의 뿌리의식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광개토태왕이 군대깃발에 새긴 #문양자체가 벌써 해와 물을 상징하는 해머리땅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만약 지나인들로 지키게 했다면 오늘날 지나국이 어찌 말할 것인가? 광개토태왕은 지나왕이고 고구려는 지나나라였다고 주장할 것이 아닌가? 광개토태왕은 훗날(오늘날)까지 염두에 두고 비를 해머리땅 사랑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이다.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羌錯 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烟戶 不合羌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천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시조 上王(상왕)부터 先王(선왕) 이래로 묘소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 할 것 같아 碑石(비석)에 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烟戶(연호)한 것이니 착오 없어야 한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시조왕과 先王(선왕)의 묘소에 다 碑石(비석)을 새우고 그 碑銘(비명)에 烟戶(연호)를 기록하였다. 守墓人(수묘인) 제도를 착각하거나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거나 금일 이후부터 서로 매매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비록 부유하여 풍족한 사람이라도 역시 매입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법령을 위배하며 매입하는 자는 제정된 수묘 법령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해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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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즐
글쓴이 : 민족영웅해무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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