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자료

해설사 2016. 1. 14. 00:24

삼척동자, 오척단신, 육척 장신, 팔척장신, 구척장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듣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키를 오척단신이라 그러고 어느 정도 커야 육척장신이라 그럴까?

그리고 그때의 척은 어느 정도의 길이기에 5척이면 짧고, 6척이면 길다고 할까?

우리나라의 척관법에 관해 많이 아는 편이고 우리나라의 예부터 쓰던 자의 길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 경우도 오척이라면 작은 키, 육척이면 큰 키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틈틈이 자료를 찾아봐도 도무지 자세한 치수가 보이지를 않고, 아니 찾으면 찾을수록 더 헷갈린다.

키에 관해 찾은 것을 대충 정리하면(1900년 이전 출생자만 정리, 그 이후는 일제에 의한 도량형이 바뀌어 30.3로 통일되어 의미가 바뀜)

 

 

삼척동자

3척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한나라 때의 도량형에 의하면 1척은 약 22 정도입니다. 그러니 3척은 약 66 정도죠. 얼마나 어린아이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3척동자도 다 안다고 하면 세상 사람이 모두 안다는 뜻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5척단신

서산대사는 5척 단신 사명대사는 9척 장신이다. 짐을 하나도 안 들어주고 앞서 가자 토라진다.

http://cafe.daum.net/domunsrory/KoMc/5046?q=5%C3%B4%B4%DC%BD%C5&re=1

 

팔척장신

팔척장신 초패왕

네이버 지식백과 숫자요 數字謠

 

구척장신

임진왜란 때의 충의공 정기룡장군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

골리앗

김좌진(동아일보 1930.02.13. 2면 사회 - 구척장신, 철기 이범석 회고록에는 칠척장신)

 

이중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키를 알 수 있는 경우는 성경에 나오는 골리앗으로 그의 키는 290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조상들의 키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옛날 한국인의 평균 신장은 얼마였을까? 삼국시대 한국인의 평균키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사료 속 고대 한국인의 키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매우 작지만 당시 주변국에 비해 컸다고 한다. 요즘 지상파 3사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고구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동쪽에 동이족이 있는데 동이족은 활을 잘 쏜다. 말을 잘 타며, 덩치도 크다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이 주변국에 비해 덩치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서울교대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가야인의 모습은 대체로 키가 크고, 뼈가 가늘며, 쭈그리고 앉아서 일한 흔적이 없는 큰키형민족으로 분석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서 출토된 성인 유골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7.4, 여성 150.8 조사됐다. 신라와 백제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또한 정확한 평균 신장을 알 수는 없지만 경주시의 고려시대 고분군을 발굴한 동아대 김재현 교수에 따르면 남자는 162.2, 여성은 156.97였다. 남성은 삼국시대(가야)인보다 작고, 여성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남성의 경우 161~166로 전해진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외국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의 한국이라는 책에서는 한국인의 평균키를 164라고 하였고, ‘우리 역사 바로 알기-임진왜란편에서는 한국 남성의 평균신장을 161~166로 나타내고 있다. 여성의 평균키는 150정도로 고대 한국인의 신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래의 자료로는

한국인 20~29세의 평균 키와 몸무게

1913년 남자 161~162, 55~56, 여자 147, 45~46

1940년 남자 166.12, 58.2, 여자 154.38, 52.14

1967년 남자 167.61, 58.9, 여자 156.63, 52.16

1980년 남자 170, 60, 여자 158, 52

1985년 남자 171, 63, 여자 160, 52

이상 동아일보 자료

 

200125~29세 남자 173.7, 69.7, 여자 160.9, 54.1

200925~29세 남자 173.8, 73.8, 여자 161.1, 55

이상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력실태조사

 

이런 자료와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조선시대의 정서를 감안하여 추정해보면 아마 성인여자의 평균 키 보다 작은 사람을 단신으로 성인 남자의 평균키보다 큰 사람을 장신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시 말하면 150이하를 5척 단신, 170이상을 대상으로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클수록 육척장신, 칠척장신, 팔척장신, 구척장신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 기준이 되는 자는 어떤 자였을까?

예부터 쓰던 한국의 자

황종척 黃鐘尺 : 각종 악기제조와 음률을 맞추는데 사용한 자

주척 周尺 : 측우기 등 천측기구와 거리. 토지 등을 측정하는 자

조례기척 造禮器尺 : 종묘, 문묘에 제사에 사용하는 기물을 제작하는데 사용한 자

포백척 布帛尺 : 옷감 등을 재단할 때 사용한 자

영조척 營造尺 : 성벽, 궁궐 건축에 사용한 자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자원봉사자 모임 http://cafe.daum.net/gogungdocent

 

그밖에도 쓰던 자들은

유척 鍮尺

당척 唐尺

곡척 曲尺

고구려척

 

유척

예전에, 암행어사 등에게 하사하던 놋쇠로 만든 자. 자막대처럼 곧고 바르게 일을 처결하라는 상징물이다. 관아에 있는 곤장 등의 형구의 크기가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지 잴 대나 암행어사가 직접 검시(檢屍)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함. 암행어사는 보통 2개의 유척을 받아서 나온다

    

길이 246mm, 12mm, 높이 15mm4각 기둥 형태이다. 4면 중 한 면에는 예기척과 *주척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포백척, 영조척, 황종척 등이 반자 씩 사용례와 함께 음각되어 있다. 이 자는 현대의 칠삼황동에 가까워 형상, 치수, 눈금표시, 표면유지 등 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 금속학적 요건을 고루 갖춘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진출처 http://hyala.tistory.com/575

 

당척

중국 고대 척의 종류로, 당척 1척이 약 0.924 - 1.345 곡척으로 약 28-31.35cm 정도이다.

31.1cm

 

송척

고려시대 삼국사기가 발간되던 당시에 쓰던 송나라에서 전래된 자

30.72cm

 

주척

중국의 모든 문물제도가 주대(周代)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유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주척은 가장 오래된 자로 모든 자의 기준이 되는 자를 말하는데, 주로 측량에 사용되었다.

세종 때 사기의 기록에 따라 황종척을 만들어 척도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주척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척도체계의 기준을 세웠다.

박흥수의 연구에 의하면 세종대의 주척 1척은 20.81cm이었으며, 영조대의 주척 1척은 20.83cm이었다고 한다.

 

 

영조척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척이라는 단위가 길이의 기본이었으나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이 있어 여러 가지 척이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조척은 목공과 건축에 사용하던 척도로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불렀다. 척도의 다른 체계들이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로 시대에 따라 변화를 많이 겪은 데 반하여 영조척은 그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특징 때문에 그 길이가 별로 변하지 않고 지켜져 와서 다른 척도 체계의 고증에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현재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황종척의 실제 길이는 34.10로서, 그것으로 환산하면 주척은 20.66, 영조척은 30.65가 된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척을 썼으나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에서 수입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남대문을 수리할 때 옥개적심에서 발견된 종보고재와 사태고재의 길이를 조사한 결과 태조 때의 영조척은 1척이 32.21였다. 1422(세종 4)에는 1척을 32.08줄였고 다시 1440년에 명의 표준 영조척을 가져다가 31.24로 개정했다.

이후 영조척의 길이는 계속 축소되어, 성종 때에는 31.19, 광해군 때에는 31.07로 줄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같은 시기에 다른 길이의 영조척이 사용되어 매우 문란해졌다.

 

 

 

조례기척

종묘 및 文廟 등의 각종 禮器를 제작하는데 사용하는 자이다. 세종 4년 의장제도를 조례기척으로 만들도록 하였다는 것을 통해 볼 때 의장 등의 특수한 경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례기척의 길이는 실물 조례기척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은 조례기척 자체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례기척의 실물과 세종실록의 도본 측정 길이와 다소 오차가 있다.

28.05 ~ 28.621cm

      

 

곡척

흔히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처음 가져와 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조선시대부터 썼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장유(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 (1643년 간행)에는 대목장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계곡집에 인용된 유자후의 재인전을 보면, 설계도면을 통해 건축을 총지휘하는 감독관으로서 대목장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배봉숙의 집은 광덕리에 있었는데 어느 날 목수 한 사람이 그 집에 찾아 와 품삯으로 빈 방을 빌려 거처하기를 청하였다. 그의 일은 짧은 자와 긴 자, 그림쇠와 곡척曲尺, 먹줄과 먹통을 갖고 하는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갈고 쪼개고 하는 공구가 없었다.> 이하 생략

출처 나무신문

   

 

목수들이 사용하는 직각으로 굽은 자로 곡척, 기역자라고도 한다. 길이가 다른 2개의 나무를 맞추어 만들었으며 긴 쪽을 장수(長手), 짧은 쪽을 단수(短手)라 한다. 세로자는 주로 손잡이로 사용했으며 가로자에 눈금을 새겨 사용하였다. 먹매김 할때 쓴다고 하여 먹자(墨尺)라고도 하며 미레자라고도 한다. 이 유물은 대형 기역자로 장수는 일부만 눈금표시가 되어 있으며 끝부분을 물결형태로 마감하였다. 단수는 3cm 단위로 10칸 구획하여 눈금을 표시한 후 ~숫자를 음각하였다.

가로: 48.5cm 세로: 30.3cm

출처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소장

 

포백척

포의 수취와 의복의 제작에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송대에 포백척이란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4왕실의 의장제도인 喪帷에 포백척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초기부터 널리 사용하였다. 이러한 포백척은 세종대에 새롭게 교정하였다.

 

세종대의 포백척은 大典칫수에 따라 교정하게 하면, 황종척·주척·예기척·영조척도 다 그 제도에 맞아 차이 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완성되고 나면 중외에 반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료를 고려할 때 영조 16년 척을 새롭게 교정할 때 이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현존하는 포백척은 영조 16년 이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주목되는 것은 덕궁 소장의 포백척은 호조포백척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488.75mm이고, 역시 창덕궁 소장 사각유척은 반척으로 246.18mm인데, 紙苧竹氈席皮物金絲樺皮繩索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양 포백척의 길이는 48.875cm49.236cm로 약간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포백척은 전기보다 후기로 갈수록 점차 늘어났는데, 전기의 경우 황종척의 비율 등을 고려할 때 약 46.66cm 정도이고, 후기는 유척과 사각유척을 고려할 대 이보다 약간 신장되었을 것이다.

 

 

황종척

세종 7년 경연강의를 통해 황종척을 이해한 왕이 옛 중국 음악과 도량형의 관련성에 대해 감탄하고 예문관 유사눌과 집현전 정인지, 봉상사판관 박연, 등에게 명하여 황종척을 만들게 하고 구악을 정돈케 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세종 7년에 정비의 단서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고, 황종척은 세종 15년에 이르러 해주산 기장을 이용하여 교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소장 황종척은 사각으로 된 鍮尺으로 제작된 솜씨가 매우 정교하며 다른 면에 주척·조례기척·영조척·포백척 등이 새겨 있다. 조선시대 다섯 표준척을 한 개의 사각기둥에 적절히 배치한 것은 관에서 척을 제작하여 관청과 각 지방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다. 사각 鍮尺의 황종척은 제작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관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척의 길이보다 신빙성이 높다. 또 다른 창덕궁 소장 유척인 황종척은 戶曹 黃鍾尺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이도 관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양 황종척은 半尺171.76mm·173.04mm로 각각 측정되었으므로 1척의 길이는 각각 343.52mm·346.08mm이다. 황종척의 길이는 약 34.48cm 정도였다.  

[출처] 도량형 환산/단위변화|작성자 피엔에스맨

      

 

고구려척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측량용 자인 고구려척(사진)의 실제길이가 35.6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을 발굴중인 한양대 박물관은 지난 7월 이곳 저수지에서 사상 최초로 발굴된 폭 1.1~1.5의 고구려척을 컴퓨터로 실측조사한 끝에 이런 결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고구려척의 길이는 발굴사례가 없어 고대 중국, 일본의 문헌이나 벽돌 등의 측량기록을 바탕으로 35, 35.6, 36설 등이 제기됐으나 이번 실측으로 논란이 종식돼 고대건축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쪽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고구려척의 한 눈금은 0.4746, 한 마디는 2.3733가 되며, 한 자는 35.6001 되는 것으로 판명됐다고 설명했다.

   

 

유태용 연구사는 두번째와 세번째 구간에 세부 눈금표시가 없지만 첫 마디 눈금의 거리가 일정하고, 조선시대까지 전통자는 첫마디에만 눈금을 표시하는 관행이 지속되는 만큼 고구려 척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런 점을 토대로 검토하면서 불합리한 자를 하나씩 제외시켜보면

20~22cm인 주척을 먼저 제외

이유 5척이면 100~110cm의 키를 난장이라고 불러야 되지만 단신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120~132cm의 키를 육척 장신이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음

 

두 번째로 고구려 척 제외

5척이면 178cm 지금도 그 키라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데...

 

같은 이유로 고구려 척보다 더 긴 포백척을 세 번째로 제외

같은 이유로 고구려 척보다 약간 짧은 황종척을 네 번째로 제외

 

그러면 남는 것은 비슷한 길이의 영조척, 송척, 당척, 조례기척이 남는데

당척은 조선시대 때 썼다는 기록이나 유물이 없다고 하므로 다섯 번째로 제외

 

여섯 번째로 각종 禮器를 제작하는데 사용하는 자였던 조례기척도 일상에서 사람의 키를 제기에는 안 어울리므로 제외

 

남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간혹 쓰였던 송척과 목공과 건축에 쓰던 영조척이 남았는데, 하필이면 2가지의 길이가 거의 비슷하다.

송척은 30.72cm, 영조척은 30.65 ~ 32로 평균 310.28밖에 오차가 안 난다.

그렇다면 거의 안 쓰는 송척보다는 자주 쓰는 영조척으로 재었을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현재 쓰는 자가 아닌 조선시대 때의 영조척을 기준으로 하면 정확하게

삼척동자는 93내외,

오척단신은 155이하

육척장신은 186내외

칠척장신은 217 (최홍만의 키가 얼마인가요?)

팔척장신은 248

구척장신은 279라고 하는 것이 어울려 보인다.

 

 

비밀댓글입니다
고맙습니다
삼척동자의 뜻이 그 척이라고는 생각못했었네요 ㅋㅋ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비밀댓글입니다
1m=3尺 1척은 33.33cm
전봉준이 키가 칠척이 채 안되었다라로 했는데
그럼 217이 채 안되었다라는 말인가?

진덕여왕이 키가 7척이 넘었다라고 했는데
그럼 217이 넘었다는 얘기인가??

동자가 무슨 키가 1미터 가까이 되나??
동자 뜻을 모르는가??

열나게 싸놨는데 완전히 틀려부렀네 그려
1척이 22센치 정도가 맞겠네
늘 궁금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인데.
다양한 근거로 유추를 해주시니 이해가 되네요.
옜날 장수들은 정말 컸었던 것 같네요.
확실히 거인족은 있었다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