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 sincere(동방의 등불)

동천년노 항장곡(桐千年老 恒藏曲) : 오동나무는 천 년이 지나도 늘 아름다운 곡조를 간직하고,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 : 매화는 평생 혹한에 꽃을 피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월도천휴 여본질(月到千虧 餘本質) :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으며, 유경백별 우신지(柳經百別 又新枝) :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 ~ 1628)

세잔갱작(洗盞更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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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Research

2013. 1. 4.

[살며 생각하며] 세잔갱작(洗盞更酌)




연말연시가 되면 ‘교수신문’이 한 해의 세태를 돌아보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발표하고, 또 새해에 기대하는 뜻을 담은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다른 몇몇 기관에서 별도로 올해의 성어를 선정하기도 한다. 중국·대만·일본에서 올해의 한자를 제시하는 것과 취지가 비슷하지만, 사자성어를 선정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중국에서는 2006년 국가언어자원관측연구센터 부속 미디어언어분석센터가 국내와 국제 두 부문으로 나눠 금년의 한자를 발표했다. 대만에서는 2008년 타이베이시 문화국 주최로 금년의 한자를 정했다. 일본의 경우, 1995년부터 한자능력검정협회의 회장이 한자의 날인 12월 12일에 교토의 유명 사찰 기요미즈(淸水)사에서 큰 종이에 한 글자를 휘호해 봉헌해 오고 있다. 2012년에는 올림픽과 노벨상에서 금자탑을 세웠고 소비세 등 돈에 관계된 일이 많았다고 해서 ‘쇠 금(金)’자를 선정했다고 한다.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금년의 한자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새해의 희망을 담은 말로 굳이 매년 성어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선승들이 오래된 공안(公案)을 가지고 참구(參究)하는 것처럼 하나의 경구를 몇 번이고 사용해도 좋으리라. 굳이 사자성어를 고르려 하다가 보면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도 잘 모르는 어휘를 고르게 될 우려가 있기도 하다.

나는 금년을, 지난 2009년 벽두에 문득 떠올라서 그랬듯이, ‘세잔갱작(洗盞更酌)’이란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잔을 씻고 술을 새로 따른다는 뜻으로, 소동파(소식)의 ‘적벽부’에서 나왔다. 세상을 냉소하지도 않고 새해에 대해 과도하게 기대하지도 않으련다. 일상을 되돌아보고 평온한 마음으로 새출발하고자 하기에 이 말을 다시 되새겨보려는 것이다.

소동파는 1082년 음력 7월 16일의 달밤에 황주의 적벽에서 지인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적벽부’를 지었다. 당시 그곳은 삼국시대에 조조와 주유가 대전투를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 손님이 퉁소를 불어 슬픈 곡조를 연주하더니, 적벽대전에서 활약한 영웅호걸들도 이미 죽어 사라진 것을 보면 인간사의 모든 것은 그저 덧없을 뿐이라고 한숨지었다. 그러자 소동파는, 천지의 무한한 운동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마음이 평온할 수 있으며 무진장한 보물인 자연은 주인이 없으므로 우리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다고 위로했다. 그 말을 들은 손님은 잔을 씻고 술을 새로 부었다. 그들은 다시 술을 마시고는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이 밝아 올 때까지 잠을 잤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들떴지만 13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국제 정세는 더욱 요동치고 국내 경제도 저미(低迷)할 따름이다. 재작년 4월에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서, 앞으로 학문의 큰 체계를 세우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세세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작은 글이나 매만지다 보니 두 해가 훌쩍 지나갔다.

세월은 소리 없이 가고 또 소리 없이 온다.

과거의 결심이나 희망을 기준 삼아 현재를 평가한다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또 현재가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생각하면 환락의 정점에서 오히려 서글퍼진다. 그렇기에 서진 때 도독형주제군사로서 양양을 다스리던 양호(羊祜)는 현산(峴山)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우주가 생겨난 이후로 이 산은 존재하고 있다. 종래, 나와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올라와 멀리 조망한 뛰어난 인사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져 소식을 알 수가 없다. 가슴이 아프다. 만일 죽은 뒤에도 정신이 남는다면, 혼백이 되어 여기에 올라오리라.”

정말로 인간이란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좁쌀 한 알과도 같다. 역사를 바꿔 나가기는커녕, 대다수의 사람은 도도한 물살에 휩쓸려갈 뿐이다.

하지만 소동파는 말한다.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되 결코 완전히 떠나지는 않으며, 차고 비는 것은 저와 같되 끝내 줄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천지도 한순간일 수밖에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

변하지 않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나도 다함이 없다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지, 그 사상을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기에 마냥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올해도 이런저런 일에 매달리다보면 또 훌쩍 지나갈 것이다. 다만, 시간의 흐름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몸을 내맡기도록 하자. 박인환이 애조(哀調)로 토로했던 말을, 그 말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러니 이 순간,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잔을 씻고 새 술을 따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자.

금년에도 나는 세잔갱작이란 말을 화두로 새해를 시작했다.

심경호 고려대 문과대 교수·한문학 문화일보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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