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 sincere(동방의 등불)

동천년노 항장곡(桐千年老 恒藏曲) : 오동나무는 천 년이 지나도 늘 아름다운 곡조를 간직하고,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 : 매화는 평생 혹한에 꽃을 피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월도천휴 여본질(月到千虧 餘本質) :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으며, 유경백별 우신지(柳經百別 又新枝) :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 ~ 1628)

당쟁의 시대에서 탕평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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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Research

2013. 1. 7.

[부일시론] 당쟁의 시대에서 탕평의 시대로


2013년은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는 첫해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현대 정치사에서 늘 되풀이되었던 반대 정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부정하는 정치문화 또한 시급히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영조의 탕평책을 주목하는 것은 현재의 정치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숙종시대는 여러 번의 '환국(換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쟁이 치열한 시대였다. 숙종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당쟁은 절정에 이르러 수많은 정치인들이 희생되었다.

영조, 당파 막론 온건·합리적 인물 등용

당쟁의 폐단을 직접 경험한 영조는 즉위 후 '탕평'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탕평은 유교경전인 '서경(書經)'의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편무당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平平)'에서 나온 용어였지만, 조선시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군자와 소인을 엄격히 분별하는 구양수의 붕당론(朋黨論)에 훨씬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숙종대의 학자 박세채(朴世采:1631~1695)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탕평론은 영조가 즉위 후 정치 현장에 직접 적용하면서 그 의미가 커졌다. 영조는 "탕평하는 것은 공(公)이요, 당에 물드는 것은 사(私)인데, 여러 신하들은 공을 하고자 하는가, 사를 하고자 하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폐부(肺腑)에서 나온 말이니, 만약 구언함을 칭탁해 이를 비판하는 무리는 마땅히 변방에 귀양 보내는 법을 쓸 것이다"고 하면서, 탕평을 '공', 붕당을 '사'로 규정하면서 탕평책 실현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탕평책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영조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을 등용하였다. 노론, 소론 측 강경파인 준로(峻老)와 준소(峻少)를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로(緩老)와 완소(緩少)를 중용하였다. 홍치중은 노론이었지만 완로의 입장을 지켜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등 탕평파들도 정국의 일선에 진출했다. 1727년(영조 3) 7월 4일 영조는 '당습(黨習)의 폐단이 어찌하여 이미 뼈가 된 신하에게까지 미치는가? 무변(武弁)·음관(蔭官)이 색목(色目)에 어찌 관계되며 이서(吏胥)까지도 붕당에 어찌 관계되기에 조정의 진퇴가 이들에게까지 미치는가? … 나는 다만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내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왕의 마음은 이러한데 신하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고까지 하면서 당습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742년에는 반수교(泮水橋) 위에 친필로 쓴 탕평비를 건립하도록 했다. 예비관료 집단인 성균관 유생들이 '탕평'의 이념을 항상 염두에 두어서 향후 탕평정치의 주역이 될 것을 희망해서였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있는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군자지공심(周而不比 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소인지사의(比而不周 小人之私意)'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내용에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탕평의 실천 여부에 두고 있음이 나타난다. 1772년에는 당심(黨心)을 버려야 한다는 취지로 특별히 만든 과거 시험인 '탕평과(蕩平科)'를 시행하였으며, '탕평채(蕩平菜)'라 부르는 '묵청포'는 탕평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처음 올라온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탕평책으로 정치 안정 후 경제개혁·문화 창달

당쟁의 과정에서 노론의 지원 속에 왕위에 올랐지만 영조는 누구보다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하였다.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은 것도 과거의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탕평책의 추진으로 안정을 꾀한 영조는 경제개혁과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750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역(軍役)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1760년에는 청계천 준천 사업을 완료하였다. 지리지인 '여지도서'와 지도인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속오례의' '속대전' '속병장도설' 등을 간행하여 조선후기 문화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조대의 정치, 경제, 문화 사업의 성과에 탕평책이라는 정치적 안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점은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박근혜 당선인이 탕평을 정치의 화두로 제시한 2013년 새해에 영조 시대의 탕평책을 역사의 거울로 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과부산일보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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