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길/경기도길

산나드리 2021. 7. 19. 08:43

여행일정 :

     5:40 신중동역 - 7:22 의정부역 7:38 72번 - 8:40 포천시청 9:11 89번 - 10:12 관인문화체육센터

     초과리 오리나무 - 10:52 초과2리 89번 - 11:17 성동5리 - 성동리산성 - 11:58 성동5리 1386번 

     12:11 만새교리새터 - 용주조경선생묘 - 1:06 만세교리새터 138-5번 - 1:26 자작2통

     자작리고인돌, 자작리유적지 - 1:50 자작2통 72-3번 - 2:04 주공3단지태봉마을 - 송우리태봉

     2:32 송우6리시장앞 138번 - 3:13 의정부역 - 4:51 신중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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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문화체육센터 : 현지에 와서야 의외의 정보를 얻는수도 있다. 초과리 오리나무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제외하고 있었는데 포천시청버스정거장에 89번 버스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포천시청에서 9:10분 버스를 타고 관인까지 가면 돌아 오기까지 35분의 여유가 있었고 더구나 이 버스는 바로 오리나무와 인접한 초과2리에 정차를 하기 때문에 시간상 가능하였다. 요새는 살인적인 더위로 인하여 연속적으로 걷는 일정보다 그동안 여행에서 빠진 곳을 연결하여 오늘의 일정을 잡았다. 

 종점이 가까워 오니 버스안에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초과2리 버스정거장에서 하차벨을 눌렀으나 기사는 오늘도 건너 뛰어 문화센터 앞에 내려 준다. 계획으로는 초과2리에 내려서 오리나무를 둘러보고 문화센터로 해서 시간이 되면 관인도 둘러볼 에정이였으나 반대로 되어 버렸다.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을 안길을 돌고 돌아 오리나무를 찾아 간다.

초과리 오리나무 표시판은 곳곳에 세워져 있었으나 천연기념물 표시는 되어 있지 않으니 지정되기 전에 세운 모양이었다. 초과리 오리나무는 2019년 9월5일 국가천연기념물 제55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 군시절 우리 사무실 옆에 오리나무가 있었는데 가지가 얼마나 약한지 아름드리 가지도 사람이 올라타면 뚝뚝 부러져 나가곤 하여 연약한 나무로 알고 있었으며 이렇게 크게 자라는 지도 몰랐다. 오늘 이 우람한 모습을 보니 그동안 오리나무에 대한 인식이 편견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벌판 한가운데 올로 우뚝 서 천둥 번개에도 버티어낸 모습이 당당하기까지 하였다. 일필휘지 휘갈기듯 한 흰구름이 깔린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더 한층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초과2리 : 오리나무를 둘러보고는 초과2리로 나왔다. 거칠 것이 없는 벌판이라 도로변에서도 멀리 초과나무가 잘 바라다 보인다. 주위에 햇빛을 피할 그늘이라고는 버스정거장 밖에 없으나 더위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경기도 까지는 버스앱이 되어 있으니 여유가 있었다. 

성동5리 : 버스 안은 냉방이 되어 시원하였다. 역시 손님은 나 혼자였다. 성동5리도 버스정거장이 둘인데 역시 이곳에서도 두번째 성동5리 버스정거장에서 내려 준다. 이곳 역시 예전에 길 건너편에 있는 태봉석조물을 볼 때 왔던 곳이다. 그때는 도로공사 중이어서 어수선 하였으나 오늘은 이쪽에 인도도 만들어져 한결 편하였다.  

길 건너편에 태봉석조물이 보인다. 그러나 중간에 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가 이곳에는 없어 멀리 돌아가야 한다.

성동5리 : 이곳에도 역시 버스표시판이 세워져 있으나 버스가 정차를 하지 않으니 정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성동리산성의 정확한 들머리를 모르니 이곳에서 마을 안길로 찾아 들어 간다.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 오니 산길이 이어져 올라 가고 오른쪽으로 넓은 분지가 있었고 그 뒤 봉우리가 성동리산성일 터인데 여하간 도로길을 따라 올라 간다.

능선 조금 넓은 공터에서 도로길은 왼쪽으로 휘어 내려가고 오른쪽으로도 산길이 휘감아 나가는 저 앞에 표시판이 보인다.

성동리산성 : 바로 제대로 찾아 온 성동리산성 표시판이었다. 이곳은 영평천이 흐르는 곳으로 지리적으로 포천에서 철원지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 서면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에로부터 이곳에 검문소가 있었던 곳이다. 도로가 게속 산허리를 돌아 나가고 이곳 표시판에서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산성 정상 : 정상에는 군부대 시설 흔적이 있었으며 역시 철원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길이 한눈에 들어 오는 요충지로 지금은 전망대로서 끝내주는 곳이었다.

성동5리 : 다시 성동5리 버스정거장 까지 되돌아 나와 더음 버스를 기다린다. 이곳도 버스가 뜸한 편이나 산정호수에서 나오는 1386번 직행버스가 1시간에 1대씩 다니고 다니고 있다. 내려오면서 앱을 보니 조금 후에 도착을 하니 서둘러 뛰어 내려와 간신히 버스를 탄다. 

만세교2리 : 만세교리2리 버스정거장에 내린다. 길 건너편에 용주조경선생의 묘소 가는길을 알려 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장자산업단지의 건물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 낸다.

산업단지가 생기기 전에는 이 포천천을 건너는 한바위교가 주길이었으나 지금은 산업단지를 오가는 장자교가 생겨 이 다리는 한적한 마을길로 변하고 말았다. 다리 저 멀리 오른쪽에 신도비 건물이 모습을 드러 낸다.

조경 신도비 : 이 비는 1910년(순종 4년)에 건립되었으며

 신해년(1671, 현종12) 2월 2일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공암(孔巖) 허목(許穆)이 비문을 지었고, 9세손인 진사 조종석(趙鍾奭)이 글씨를 썼으며, 8세손인 승훈랑동몽교관 조언식(趙彦植)이 전액을 하였다.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행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문간공 용주 조선생 신도비명병서"

 

이 안내문에 조경선생 묘소와 별묘가 포천시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으나 유적42호는 조경선생묘라고만 특정되어 있었다. 묘소는 이곳에 있는데 별묘는 ?.  확인을 해보니 신북면 가채2리 494-4번지(포천축협사무소정거장 600m 지점)l에 별묘가 있었다. 이 또한 18.5.7 포천여행시 인평대군묘를 보고서 채산사로 가는 길에 있음을 알았으니 그때도 모르고 지나친 곳이다.

도로 왼쪽 안에 있는 재실 영모재(다음지도에서)

조경선생 묘로 들어가는 산길 입구

갈림길 표시판 

조경선생 묘 :

본관이 한양으로 정충장군 조수곤 - 직산현감. 공조좌랑 조현(~1606) - 봉사 찬성공 조익남(~1613) - 문강공 조경(1586~1669)로 이어진다.

161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성균관에 입학을 하였으나 친분이 있었던 이이첨이 광해군 폭정에 동조하자 대과를 단념하고 거창에 은거를 한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유일로 천거되어 관직에 복귀함. 1624년 이괄의난 때에는 공주산성까지 피난을 가는 인조를 수행하한 후 고창현감. 경상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을 하다가 이듬해에 형조좌랑. 목천현감등을 지냈다. 1626년(41세)에는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하고 강화론을 반대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후에 이조.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1658년 기로소에 들어가고 1695년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는 소과(생진시)인 사마시에 합격을 하면 하급관리에 임용되고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부여된다. 대과(대개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로 나뉘며 초시는 과거의 1차시험으로 지방에서 실시되며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33명을 선발하여 전시에 응시한다. 전시는 과거의 최종시험으로 어전에서 실시하며 1인자를 장원으로 참상관 종5품이상에 등용하며 기성관리가 장원시에는 4등급을 상향한다. ***

   특채는 기존의 관리를 요직에 추천하는 천거가 있으며, 본인의 학덕이나 선조의 공훈에 의한 음서로 관직에 등용되는 절차로 조경선생이 유일로 천거된 것은 특채에 해당될 것이다. 조경선생은 1626년에 정시문과에 장원을 함으로 유일의 핸디캡을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유일로 정승반열에 오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영의정 내암 정인홍(남명 조식의 수제자), 좌의정 우암 송시열, 좌의정 미수 허목(남인 실학파), 좌의정 현석 박세채(소론의 영수), 우의정 명재 윤증(송시열의 제자로 소론의 영수), 좌의정 수암 권상하(기호학파 계승자)등이 있다.  

만세교2리 새터 :

자작2통 : 자작리고인돌은 이미 다녀왔으나 그 당시에는 자작리유적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오늘 다시 찾아 왔다. 

예전에는 이곳에 포천천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이 새로 지어져 아직 간판도 달지 않은 상태였다.

자작리 지석묘, 자작리 유적지 : 예전에 왔을 때는 자작리 지석묘 주위에 잡초가 우거져 제대로 볼 수가 없었으나 오늘은 고인돌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덮개돌은 상당히 큰 반석이었다. 자작리 지석묘 옆에 유적지 표시판도 함께 있었다. 예전에도 같이 있었는데 그때는 문화재답사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던 때라 그냥 지나치고 말아 오늘 다시 온 것이다. 

포천 자작리 유적지 : 역시나 구석기 유적지는 현장에 왔었다는 흔적 밖에 남길 것이 없었다. 이곳도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여 볼것이 전혀 없었다. 

자작2통 :

태봉마을 앞 : 송우리 태봉은 송우리 중심가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 사방 어디서도 오를 수가 있으나 내가 타고가는 버스는 태봉마을을 거쳐가기에 이곳에서 내려서 태봉을 찾아 올라 간다. 행복한교회 옆 태봉공원에서 숲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으나 어디에도 안내판이 없어서 그냥 길을 따라 올라 간다.

바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없었으며 태봉을 중심으로 산허리를 돌아가는 둘레길이 있었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간다.

숲길 앞으로 공터가 나오고 정자가 있었으며 숲길은 계속 능선을 따라 돌아 가나 이곳에서 왼쪽으로 정상 능선을 따라 올라 간다.

송우리 태봉 :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바로 송우리 태봉 정상 이었다. 정자 지붕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 돌로된 태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소생 정희왕녀의 태를 태운 재를 묻었다고 하여 태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태항은 도굴되어 분실되었다고 한다. 태항을 보관하였던 커다란 돌만이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려갈 때에는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내려 간다. 역시 어디에도 숲길 안내도는 보이지가 않는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니 이쪽에도 태봉을 돌아나가는 둘레길이 있었다. 오른쪽길을 따라 돌아 간다. 

 

ㅈㅆ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