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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회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 홍성 이응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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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2020. 12. 12.

 

 한국의 회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 홍성 이응노의 집 

화가 이응노의 삶이 담긴 홍성 이응노 생가 기념관 

 





홍성 여행을 하면서 이응노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화가 이응노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응노생가기념관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단한 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우리 전통 한국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 분이라는 것을 알고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여느 기념관과는 다른 특이한 낙관 문양의 간판을 통해 이응노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화가 이응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지를 복원한 모습입니다. 이곳은 화가 이응노의 꿈이 시작된 곳, 희망과 열정으로 꿈을 키우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던 곳, 평화통일과 인류화해를 염원하던 그의 예술혼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는 팻말이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응노의집 앞에는 연못을 가로질러 산책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연꽃이 피는 여름철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응노기념관은 네모난 상자를 여기저기 세워 놓은 듯하면서도 운치가 있어 보였답니다.
 

  
정원의 의자와 나무들까지 하나하나 이응노 선생의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 건물은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이고, 왼쪽이 고암이응노기념관입니다.
 
이제 이응노기념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고맙게도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위로해 주기 위해서 지금은 입장료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응노기념관 앞에서 이응노 선생이 활짝 웃으며 반가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1904년에 태어나 1989년 돌아가실 때까지 격동의 시대를 산 이응노 선생은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내 그림은 모든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가슴을 찡하게 하는 글귀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평화로운 세상을 살지 못했습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복도에 알쏭달쏭한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제목이 문자추상이군요. 한자인지 한글인지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모여서 예술로 탄생하였군요.
 

  
전시관에는 화가 이응노의 유류품들과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평생 쓰던 그림 도구들과 섬세한 한국화들이 그분의 생애를 말해주는 것 같았지요.
 

  
이응노 선생의 출판물·원고·편지 등도 원본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 작품에서 다른 것을 보는지 몰라도 나는 한길을 걷고 있어요.
서민 생활의 애환에서 온 컴포지션, 글씨 또는 점 모양, 동적 인간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변화되고 있지만, 독창성을 찾다 보니 그리된 것뿐 내용은 같아요."
 
그분의 작품 세계는 사실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변모해 갔지만 늘 서민들의 애환을 그려왔다는 것이지요.
 

  
사실적인 풍경을 그린 '한강풍경 밤섬'이라는 작품입니다. 우뚝 솟은 봉우리 앞의 강에 돛단배를 띄우고 지게를 진 채 소를 몰고 가는 한가로운 시골 풍경은 전통적인 한국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950년대에 그린 '영차영차'라는 작품입니다. 1945년 3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응노는 고국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이합니다. 1946년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가의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아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무렵 작품들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특유의 강한 필치로 표현하였다고 해요.
  

  
이응노 선생은 1958년, 나이 55세의 나이로 세계 미술계에 나아가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를 주무대로 하여 반추상적 표현을 선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964년 파리 세르튀시 미술관 내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유럽인들에게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치면서 우리 한국화의 세계화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 강제소환돼 옥고를 치렀으나 후에 사면되었습니다.
 

  
이응노 선생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돌아가시기 전 10년 전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익명의 군중들이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군상'이 작품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나무에 새겨진 '군상'이라는 조각품들이 여기저기 전시되고 있어 그분의 말년 작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응노 선생은 정치적 이유로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서 8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을 공부하면서 화가로서의 큰 족적에도 불구하고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평화애호 정신이 반정부 활동으로 간주되어 인정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이제라도 이응노 선생의 높은 예술성과 시대정신의 가치가 재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응노 선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이응노의집 홈페이지를 둘러실 것을 추천합니다.

 

 

이응노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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