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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공주 역사 인물' 중봉 조헌 의병장의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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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2021. 6. 12.

성품이 무척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공주목 교수 겸 제독관이 되어 공주와 인연을 맺게되어...

 

 


공주시청에 들렀더니 2021년 6월의 공주 역사 인물로 중봉 조헌 의병장이 선정되어 화면으로 비춰주더군요.
예전에 금산 칠백의총에 갔을 때 조헌 의병장과 칠백의사가 함께 묻혀 있는 커다란 묘소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공주와도 관련이 있다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헌 선생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지요.



조헌은 1544년(중종 39)에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22세에 성균관에 진학하여 공부하다 1567년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572년(선조 5)에 교서관 정자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진출했고 이듬해 교서관 저작으로 승진하는 등 문신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헌은 성품이 무척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해요. 선조 임금에게도 수차례 상소를 올려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기를 반복했다고 해요. 그 무렵 조헌은 이지함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천민 출신 학자 서기와도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1586년(선조 19) 조헌은 공주목 교수 겸 제독관이 되어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직선적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조헌은 또다시 상소를 올려 개혁 정책이 하루빨리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선조와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조헌은 충북 옥천에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시절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6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의병단을 구성하고, 공주의 고마나루에서 출정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592년 8월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운 조헌은 충청남도 금산전투에서 관군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700여 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의 종용사에는 조헌을 비롯한 700 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우와 의총을 허물고 강제로 팔아버렸는데 광복 후인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습니다.



조헌은 사후 충청도 최초의 사액서원인 공주 충현서원에 추배되었으며, 1734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에는 중봉 조헌의 자그마한 사당인 표충사가 있습니다. 조헌사당은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2, 369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좁은 골목길에 있고 주차할 곳도 없으므로 곡남2리 마을회관 옆 공터에 차를 두고 조금만 걸어가면 됩니다.



성문 모양의 다리 안내물이 설치된 수심대교를 따라 유등천을 건넙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길가에 큰 나무들이 지켜주고 있는 사당 건물이 보입니다. 그런데 문이 굳게 잠겨 있군요. 그 흔한 홍살문도 보이지 않습니다.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아봅니다. 장독대로 가린 마당 건너에 태극문이 보이고 그 뒤로 자그마한 사당이 보입니다.



최근에 단청한 것으로 보이는 아담한 조헌사당입니다. 임진왜란 때 금산성 전투에서 칠백여 의사와 함께 순절한 중봉 조헌을 향사하는 사우입니다. 돌아가신 후인 1604년(선조 37)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조헌사당은 원래 복수면 곡남리 장등산에 창건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건물이 허물어졌다고 해요. 일제강점기에 각도의 향교와 유림들의 모금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현재 이곳에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조헌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헌사당 뒤에는 커다란 바위와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위도 보호하고 있군요.



바위의 아래쪽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심대(水心臺)라고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 더 자세히 보시지요. 수심대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심대는 조헌사당 뒤쪽에 자리하면서 오랜 세월 풍상을 이겨낸 소나무들과 함께 조헌 사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심대라는 이름은 조헌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새겼습니다.

수심대라는 이름은 유등천 상류에서부터 굽이쳐 흐르는 냇물 양쪽으로 3개의 마을이 마음 심(心) 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헌은 임진왜란 이전에 옥천에 살면서 이곳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후손들에게 이곳에서 살라는 유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사당을 건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시에서 2021년 6월의 역사인물로 선정된 조헌 선생은 원래 문관이었습니다. 성품이 강직하고 불과 같아서 임금도 불편해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주변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었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앞장서서 의병을 모으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돌아가신 후에야 그분의 진정한 애국심을 알게 되었고 곳곳에 그분을 모시는 곳이 생겨났습니다. 고향인 경기도 김포시에는 조헌 선생을 배향하는 우저서원이 있으며 조헌 추모비와 사당 등이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충청남도 금산에는 칠백여 명의 의사가 함께 묻혀 있는 칠백의총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주 충현서원에도 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먼저 예측하였고 전쟁이 발발하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조헌 의병장 자취를 찾아보며 그분의 높은 뜻을 기립니다.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대로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조헌사당>

 

소재 : 충남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