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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향교와 개천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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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2021. 10. 22.

태안향교와 개천절의 의미

역사의 교육을 가을에 되새기다


우리 민족에게 10월은 특별한 달이다. 개천절인 10월 3일은 단군이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단군조선을 세운 날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며, 이화세계는 ‘이치로써 세계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이롭게 하는 이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존재하게 하는 교육일 것이다. 교육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 태안의 주산 백화산에 가을이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란 말이 있다. 아무리 귀한 진주구슬도 실로 잘 꿰어야 목걸이라는 보배가 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분야별 내용들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이론이 행동의 가치성을 부여받는 것이 교육이다.

가족의 구성원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도 홍익(弘益)이념과 다르지 않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가족도 이화(理化)로써 행복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천절은 하늘이 열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이 시작되는 날인 셈이다.

▲ 태안향교 명륜당 마당에서 본 은행나무와 가을 풍경

가을의 그림자가 땅위에서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그려진 구름을 타고 과거로 밀려간다. 구름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은 태안향교의 홍살문에 빨래처럼 걸쳐있다. 가을이 태안향교에 가득하다. 3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태안향교의 마당 담장에 있는 은행나무 잎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도 가을이 묻어난다.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무지(無知)한 교육의 시간들은 신기루다. 어쩌면 탐욕의 프리즘으로 바라 본 교육의 스펙트럼과 신기루는 너무나 닮아있다. 빨간색에서 보라색으로 분산되는 스펙트럼의 무지개는 미래의 희망을 보여주는 신기루처럼 아쉽다.

▲ 태안향교 홍살문

우리민족의 교육에 대한 체계성을 살펴보면 그 시작은 기원전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수준에 도달한 고구려가 왕경에 태학(太學)을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든지, 이어 백제가 박사를 두고 신라가 대학(大學)을 세웠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 때이다.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들을 교육시켰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으로 그 뒤 1003년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태안향교 표지석
▲ 태안향교의 유래를 적은 글

사람들은 독립성을 지향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과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교육은 사람끼리 소통하는 방법과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준다. 교육을 받으면서 인성(人性)을 쌓고 지식을 함양시키면서, 인류가 미래에도 우주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남을 살리는 인류애는 교육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교육의 정책을 펼 때는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다. 백년을 바라보고 교육에 대한 정책을 펼쳐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 태안향교의 외삼문 모습

우리 한민족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시작되었다.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은 반만년을 이어오면서 교육에 대한 많은 이정표를 제시했다. 지구가 탄생한 46억 년에 비교하면 5천 년은 찰나와 같은 시간이다. 그 찰나와 같은 시간 속에서 인간들은 탐욕과 무지가 맞물리는 톱니바퀴가 되어 역사의 공간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지나간 무지(無知)의 시간들을 버리지 못하고 가을바람에 수런거리는 갈대처럼 무질서하기만 하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를 일깨워야 할 교육이 자국주의로 역사를 왜곡하고 확증편향된 논리로 이기주의를 만들고 있다.

▲ 태안향교의 내삼문

고려시대의 향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鄕校)로 거듭났다. ‘향교’란 지방의 학교를 말한다. 중국의 주나라 때 향(鄕)은 지방의 행정구역의 명칭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했다고 한다. 향교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공부했다. 유교(儒敎)란 공자가 동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정리한 것으로 사서오경을 말한다. 사서란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를 말하고, 오경은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말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중국의 유교사상은 우리민족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건국이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 태안향교의 명륜당 모습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택했다. 조선시대 드라마를 보면 서당에서 훈장이 ‘공자 왈 맹자 왈’을 선창하면 학동들이 따라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유교의 전형적인 교육방식은 지루한 암기였으며 주입식으로 이루어졌다. 과거의 이러한 유교사상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불교사상을 배척하지 말고 불교와 유교의 사상들을 통합해서 조선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쉽다.

조선시대 유교사상을 기초로 한 교육은 권력과 돈이 있어야 배울 수 있는 차별성을 갖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제도는 향교를 신분상승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만들었고, 정치권력의 인맥을 위한 양반들의 사교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 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한 것을 보면 향교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 태안향교 바로 옆에 자리한 예절관

조선시대는 사람들의 신분을 양반과 천민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향교에서 교육을 밭을 수 있는 특권은 양반들 몫이었다. 양반은 천민들을 노비로 부릴 수 있고 노비의 목숨은 양반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인간을 양반과 천민으로 구분하고, 천민들을 짐승처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어떤 특권의식도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석전대제를 알리는 태안향교 현수막

국가는 태평하고 국민이 편안하기를 염원하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뜻을 가진 태안 땅. 태안향교의 뒤에는 초록의 물감으로 백화산을 그려냈고, 바로 옆에는 태안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여기는 분명 교육의 터전으로는 명당임에 틀림없다.

▲ 태안향교 명륜당과 동재 사이 출입문

태안에 처음으로 향교가 창건된 것은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으로 대장군 김중구가 문무지략을 겸비한 인재였기에 그에게 진을 맡게 하였다. 대장군 김중구가 지은 향교는 사양동(현재의 샘골지역)에 모옥(초가집)으로 세워졌으며, 덕산에서 생원 최상운을 학사로 초빙하여 향교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태안향교 창설의 시초이다.

▲ 태안향교 전체 배치도

하지만 사양동의 초가집 향교는 백화산에 살던 호랑이가 자주 침범하여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태안향교의 교토인 태안읍 동문리 323-1번지로 이전하였다. 그 후 숙종 46년인 1720년에 향교에 화재가 발생하자 현재의 태안읍 동문리 725번지로 이전하게 되었다.

▲ 태안향교 동재 앞에서 바라 본 외삼문

세종이 기와로 증·개축하였고, 1901년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동무(東??)·서무(西??)·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중국인 21위와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태안향교 명륜당 지붕의 건축양식

태안향교는 현재 석전대제(釋奠大祭) 때 문을 열고 평상시에는 대문을 굳게 잠근 채 세월의 풍파를 힘겹게 견디고 있다. 석전대제는 유교의 창시자인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인과 성현들을 추모하는 행사인데, 매년 봄, 가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을 택하여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해 향교에서 동시에 석전이 봉행된다. 우리나라 석전의 역사는 1600여 년 전인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최초의 국립대학인 태학이 설립될 때 석전대제도 함께 봉행했다고 전해진다.

▲ 석전대제를 준비하는 모습
▲ 동재와 서재 사이에서 석전대제를 준비하고 있다

태안향교는 1997년 12월 23일에 충청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태안군이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판본 19종 104책, 사본 5종 6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 태안향교 대성전의 모습

현재 태안향교는 1년 365일 중 360일 이상 대문을 걸어 잠그고 미련스럽게 묵직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교육의 본질인 소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쉽다. 무엇이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홍익이념이며 이치에 맞는 것일까?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은 소통하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지난 역사를 교훈삼아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 평상시 닫혀있는 태안향교의 모습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나드리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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