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의 겨울 풍경
육군 훈련소 정문을 들어가면서 ‘이제, 내 의지대로 어디론가 갈 수가 없다’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했었던 기억.
대기병 시절 동료들이 사제담배를 사기 위해 부모님들이 쥐여주셨을 큰 금액의 돈을 담 밖으로 던지면 담배 한 갑만 안으로 던지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고 도망가던 아이들.
낄낄거리며 사라지던 웃음소리와 그 여름내 군기 세기로 유명한 30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뒹굴던 야외 훈련장의 누런 진흙 벌판, 이런 것들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남자들에게 논산은 그다지 썩 좋은 곳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몇 해 전 입대하는 조카를 훈련소로 데려다주러 한 번 와보았을 뿐, 갈 곳 많고 볼 것 많은 논산을 애써 외면하다가 많은 것이 사라진 이 겨울에야 길을 나선다.
종학당, 선영과 영당, 종가 고택 등이 있어 조선 시대 호서 지역 양반들의 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 중 사진 촬영 명소로 알려진 명재고택을 찾았다.


많은 것이 사라진 겨울이지만, 그럼에도 찾아온 사람들이 사랑채 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은 받으며 문화해설사가 들여주는 그 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앉아 배롱나무에 붉은 꽃이 미처 다 지기 전에, 저 굵은 느티나무가 예쁜 옷 갈아입고 눈처럼 비처럼 그 잎을 다 떨어져 내리기 전에 시간을 내지 못한 여행자는 자신을 책망하며 사랑채 오래된 나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본다.
이 명재고택 양편에는 노성향교와 노성궐리사가 있어 조선 시대 양반들이 후학들의 정신문화와 유교적 사회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향교의 문이 닫혀있어 담 너머로 본 기단 위에 전면 세 칸짜리 당당한 명륜당을 보며 지금으로부터 삼백여 년 전 유생들이 모여 낭랑한 목소리로 책 읽었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명륜당 위 대성전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5성과 승조 2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 등 모두 5성 20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재향 한다고 한다.
명재고택 뒤로는 노성산 중턱 전망대와 노성궐리사를 거쳐 다시 명재고택으로 돌아오는 ‘명재고택 사색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걷는 길을 조성해 놓아 걸어본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는 길을 걸어 도착한 노성궐리사 돌담 지붕 기와 틈 사이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풀들이 모든 것이 사라진 계절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아직 겨울은 많이 남았고 눈이 내리는 날도 있을 텐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성향교와 마찬가지로 문이 굳게 닫혀있는 궐리사는 공자의 유상을 봉안한 영당으로 승조 5현의 영상이 보관되어 있으며 공자의 영정과 공자상을 모셔져 있다고 한다. 궐리사 왼쪽 마당에는 2009년에 중국의 공자 후손들이 기증했다는 공자상을 비롯하여 맹자·증자·안자·자사 등 5성상이 서 있다.
이렇게 한 바퀴 돌아보면서 우리 조상들은 전국 330여 군현마다 반드시 향교를 세워 공자를 모신 대성전에서 제를 지내고 명륜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마음을 갈고 닦는 고고한 선비정신을 배우게 하였음에도 오늘날 무엇이 ‘물질적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나라가 되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설산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논산 명재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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