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경제

한진수 2008. 5. 24. 22:04

농부가 주식을 사면

주식시장에 재미있는, 그렇지만 뼈가 있는 속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농부가 주식시장 이야기를 하면 주식을 팔아야 한다'는 속설입니다. 정보에 비교적 어두운 농부가 주식을 사고 싶어할 때면 이미 주가가 오를 만큼 올랐고 하락장이 예상되므로 팔아야 한다는 경험 법칙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들어맞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땅을 담보로 주식을 샀던 농부들

1929년 10월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묻지마 투자가 전국을 휩쓸고 있던 미국에서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농사는 뒷전이고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아 주식을 샀던 농부들이 길거리로 나앉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은행이 담보로 갖고 있는 땅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돈을 값을 능력이 농부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이 엄청난 부실 여신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은행으로 전이된 공포

1년 정도 지난 1930년 12월 11일에 뉴욕의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은행이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약 50만 명이 예금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포가 주식시장에서 은행으로 전이되었습니다.

다른 은행에 예금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돈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에 맡겨 이자를 받으려다가 오히려 원금마저 날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한 사람들은 은행으로 달려가 자신의 돈을 찾겠다고 아우성쳤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공포에 휩싸여 은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의 연쇄도산

여러분도 알다시피 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해주고 대출 이자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입니다. 따라서 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 대부분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놓고 있으며 은행 금고에는 극히 일부분의 돈만 남겨놓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자기 돈을 먼저 찾겠다고 은행으로 달려가면 아무리 튼튼한 우량 은행이라고 하더라도 예금 인출 요구를 들어줄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금한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공포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금 대량 인출 사태, 뱅크런

이로 인해서 불량 은행뿐 아니라 우량 은행들까지 덩달아 줄줄이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1931년 한 해 동안 2,3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1930년부터 1933년 사이에 금융기관의 1/3이 문을 닫았다고 하니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금융기관을 의심하고 자신의 돈을 먼저 찾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을 뱅크런(bank-run)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은행에 다급히 뛰어가기 때문에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예금 인출 사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은행 도산에서 기업 도산으로

고객들을 달래려고 해도 예금 인출 요구가 끊이지 않자 은행들은 기업에게 해준 대출을 긴급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신규 대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여파가 기업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대출에 어려움을 겪은 기업들은 공장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재고가 쌓이고 장사가 안 되던 상황에서 자금 사정마저 여의치 않자 기업의 연쇄도산이 속출하고 실업자들이 길거리로 대량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까지 공황이 전파

이러한 공포의 전이 및 확산 현상은 미국 국내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은행과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자 다급해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게 빌려주었던 자금과 채권을 긴급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났는데 다른 나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황의 공포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유럽까지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 되면서 미국 대공황은 세계 대공황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전 강의 #53에서 언급했던 패닉의 전염성을 실감할 수 있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은행에도 보험을 도입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의 연쇄도산이 사람들의 뱅크런에 의해서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예금보험제도입니다. 예금에 보험을 도입한 것입니다. 1933년의 일입니다.

보험이란 사람들이 평소에 보험료를 조금씩 내다가 특정 위험이 발생할 경우 보험회사가 그 처리비용을 지불해주는 제도입니다. 예금보험제도도 이와 같습니다. 평소에 보험료를 조금씩 내던 은행이 고객의 인출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게 될 때, 보험회사가 대신 예금을 지급해주는 제도입니다.

예금보험은 법에 의해 운영되는 공적 보험이며, 이 기능을 담당하는 보험회사는 민간기업이 아니라 정부 기구라는 것이 일반 보험과 다른 점입니다.

예금보험제도 이후 은행 안정 되찾아

예금보험제도가 도입된 이후 사람들의 근거 없는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은행이 부실해지더라도 보험회사가 대신 자신의 예금을 지급해주므로 사람들은 부화뇌동하여 뱅크런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은행의 연쇄도산 현상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은행의 안정은 미국의 대공황 극복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97년에 도입

우리나라에도 예금보험제도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된 것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늦은 1997년이었습니다. 경제 위기 직전입니다.

우리나라에 예금보험제도가 이처럼 늦게 도입된 것은 이 제도 자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은행들은 도산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정부가 은행의 부실을 막아주었기 때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은행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정부는 일부 은행에 문제가 발생해서 어려움에 처하면 은행에 지원을 해줌으로써 부실 은행이 발생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은행의 도산이나 예금의 지급 불능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금보험제도 자체가 불필요했던 것입니다. 은행의 보험료 대신 국민의 세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은행 지원은 불공정 행위

우루과이 라운드(UR)가 시작되고 WTO 체제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민간기업인 은행을 지원해주는 것이 불공정 행위이기 때문에 자유무역과 공정 거래를 기본 철학으로 하는 WTO 정신과 세계 경제 질서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와 정부가 은행을 지원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처럼 예금보험제도 도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에 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우리나라 경제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일인당 5천만 원까지 보호받아

현재 우리들의 예금은 예금보험제도에 의해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통장을 보면 "이 예금은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보호됩니다"라는 문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예금의 보험회사의 역할을 하는 곳은 예금보험공사입니다.

다만 명심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원금과 이자를 합하여 일인당 5천만 원까지만 보호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억 원 예금한 사람은 은행이 도산했을 때 최대 5천만 원까지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보장 금액에 상한선을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10만 달러까지, 캐나다는 6만 캐나다 달러까지, 그리고 일본은 1천만 엔까지 예금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예금 전액을 보호해주면 은행의 안전성이 더 높아지고 국민들은 더 안심하게 될 텐데 왜 정부는 예금의 일부만 보장해주는 예금부분보장제도를 시행하고 있을까요?

우량 은행을 선택할 책임은 본인에게 있어

여러 은행 가운데 도산하게 될 은행을 선택해서 예금한 것은 본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금주의 개인 실수까지 정부가 모두 다 책임지고 보상해줄 수는 없다는 취지입니다. 최대 5천만 원까지만 보호해주니까 우량하다고 생각하는 은행을 잘 선택해서 예금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5천만 원은 은행당 그리고 일인당 상한선입니다. 만약 2억 원의 돈을 갖고 있다면 4개의 은행에 5천만 원씩 분산 예치하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 4개 은행이 동시에 도산하더라도 각각 5천만 원씩 해서 모두 2억 원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한 은행에 4명의 가족 이름으로 분산 예치해도 2억 원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대 5천만 원이지만 수십억 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전액이 예금보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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