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건강

上善若水 2011. 8. 16. 16:43

[여행] 빚갚기 여행 - 아내로 부터 받은 선물.

 

잠빚이라는 게 있습니다. 잠을 줄여 일을 하더라도, 안잔 잠은 빚처럼 누적되어 결국에는 다 자줘야 피로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만성피로를 대변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끔씩 잠빚을 갚아주지 않으면, 과로사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서운 것은 대부업체 빚이나 마찬가지죠.

 

여행빚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을 때때로 다녀와 줘야 가족에게도 자신에게도 여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여행빚을 갚지 않으면 빚쟁이의 불행이 똑같이 재현 되는 것이죠. 가정불화라는 형태로...

 

지난 주말 사흘 연휴 토/일/월광복절 해서 가뿐하게 빚을 하나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행스케치"(www.toursketch.co.kr)라는 사이트에서 찾은, 담양/보성/통영/거제 를 2박3일 동안 돌아오는 단체관광 프로그램인데, 원래 1박2일 예약했던게 인원이 부족해서 취소하고, 2박3일짜리로 재예약 한 것입니다.

 

가이드 안내원의 첫번째 멘트가 "주로 와이프가 예약하고, 남편은 무슨 여행인지 모른 채로 따라만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그 남편이 딱 저였습니다. 순간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 마냥 찔끔했습니다.

 

아들을 위한 여행빚도 갚을 겸, 피곤에 찌든 남편에게 여유도 좀 줄 겸, 1박2일 가뿐한 여행을 만들고자 했던 아내의 사려깊은 시도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떠났습니다. 2박3일 후, 여행 끝나고 출근 전에 좀 피곤해할 각오를 하고...

 

하지만... 여행 내내, 가이드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니 정말 편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편하게 느꼈을 때에는 아마도 아내가 이것저것 부지런히 챙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내의 노고도 있었겠지만, 이번 여행의 프로그램상의 장점이 눈에 많이 들어 왔습니다.

 

내가 여행하는 스타일은, "Do everything yourself, embrace the challenges."였습니다. 여행 전에 매우 많은 고민을 해야 하고, 현지에 가서도 우왕좌왕 무수히 많은 선택과 에러들을 경험해 보는 것이 재미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들고, 힘이 딸리고 몸이 피곤해 지니 쓸 수 있는 전략이 아니더라구요. 좀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한 곳에 진득하게 좀 오래 머무는 것이 또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만, 돈과 시간이 무지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선택의 피곤함에서도 역시 자유롭지 않고요.

 

내 머릿속/기억속의 여행은 온갖 종류의 새로운 체험이지만, "매우 피곤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 건강 상태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으로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피로에 쩔어 있는 남편 혹사시켜서 과로사하면, 과부되지나 않을까 늘 걱정하는 아내는 현명하게도 매우 단촐한 여행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1박2일이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체로 하는 관광이라는 게, 돈만 치루면, 여행이 무척 가벼워지더군요.

 

내 도움 전혀 없이 여행가방 준비했던 아내에게 좀 미안하지만...

 

어쨌든 토요일, 아침(새벽!) 7시 반, 교대역에서 출발하는 스케쥴 때문에 6시경에 일어나서 일찍 서두르고 나니, 그 다음 부터는 거의 자동이었습니다. 가이드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탈 날 게 하나도 없고... 생각할 일도 없고...

 

심지어... 이튿날 출발 시간을 새벽 6시로(안내장에는 7시인데) 1시간 땡겨서 하는 것(허거! 새벽 5시에 일어나야!)도 적절한 타이밍과 적절한 가이드를 따르면 가능했습니다. 다른 팀들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그냥 별 부담 없이 가능했습니다. 전날 충분히 일찍 잘 수 있었으니까요.

 

사흘째에는 한 술 더 떠서, 출발 시간을 새벽 5시로 안내장보다 2시간이나 땡겼습니다. 그럼 당연히 새벽 4시반에 기상해야 하는 것이고... 놀랍게도 그것도 가능했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같이 여행하는 모든 사람이 5시 11분까지 승차해서, 5시 12분에 버스가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어린아이까지 끼어있는, 26명 되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더이상 코리안 타임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 역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그날 여행을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여행사 가이드의 노련한 시간 조절 능력과 가이드 방식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관심있는 제 눈에는, 여행사 직원들의 움직임도 흥미로왔습니다. 프로그램 구성도 그렇고, 2명 이상의 직원들이 공조해서 각종 예약을 처리하는 방식이 꽤 효율적으로 잘 조직된 듯 보였습니다. 여러사람이 움직이는 일에는 항상 뭔가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여행내내 전혀 말썽없이 거의 물흐르듯이 진행되었는데, 그게 어디 저절로 일어났겠습니까? 분명히 누군가는 부지런히 이리저리 연락하고 점검하고, 미리 예견해서 사전에 예비 동작을 취하고 그랬겠죠. 그렇게 바삐 움직인게 틀림없이 저는 아니고, 8살 난 제 아들도 아니니, 그럼 누구였겠습니까? 제 아내와 여행사 직원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날, 예정보다 2시간 이른, 오후 6시 30분쯤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여행 후의 엄청난 피로로, 밤 늦게 집에 도착해서, 만사 제쳐놓고 피로에 찌들어 잠들어 버렸다가, 이튿날 여행의 후휴증에 시달리는, 그런 일이 없어진 것이죠. 이런 게 가능했다는 게 ...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런 가뿐한 여행을 나만 모르고 있었나 싶습니다. 앞으로 자주 애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귀찮고 성가신 일들을 다 도맡아 해 준 아내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가뿐하게 느낀 것이 아닌가 하고, 재차 생각도 해 봅니다.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왕따시 만한 모기에도 몇방씩 물리고, 큰아들 작은아들 둘 데리고 여행했던 아내에게는, 아마도 이번 여행이 내가 느끼는 만큼 그렇게 가뿐하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여행 후에도, 빨래감 뒤치닥 거리 하느라 아내는 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한테 가뿐했던 여행이, 아내에게는 그리 가뿐하지 않았던 것이죠. :-< 아내를 위해서는 다른 뭔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上善若水. 2011-08-16.

 

 

담양의 대나무밭에서 오랫만에 여유를 음미해 봅니다.

 

안개낀 보성의 차밭이 더욱 신비해 보였습니다.

 

여행스케치(www.toursketch.co.kr)의 프로그램으로 아들놈에게 여행빚 한번 갚았습니다.

 

통영 동피랑 골목에서 천사는 날개를 얻었습니다.

 

통영 동피랑 골목에서 넉넉한 웃음도 얻어 갑니다.

 

통영 동피랑 골목, 날지 못하는 연의 슬픔을 니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