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Zen(禪)-Meditation

피아212 2014. 12. 11. 12:48

 

 


 

 

선(禪)은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는 것은 일어나는 한 조각 구름 같고,
죽는 것은 흩어지는 한 조각 구름 같다.
떠 있는 구름은 본래 없는 것.
살고 죽고, 오며 가는 것도 그런 것.
그러나 늘 맑은 대로 머무르는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 항상 청정하여 생사(生死)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항상 청정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한 물건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생사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어떻게 생사에 걸림 없는 자유를 깨달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목표가 분명하면 생활이 밝아진다. "왜, 선(禪)을 수행하는가?", "왜 날마다 먹는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이다.

거기에는 주인과 객,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안과 밖은 이미 하나가 되고 너와 나의 목표, 행동이 같게 된다. 이것은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해서 거울처럼 맑다. 붉은 것은 붉게, 흰 것은 희게 보인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준다. 모든 것이 이 맑은 거울에 비쳐서 보인다.

그러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개는 '멍멍' 짖는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고 우리 또한 진리이다.

그러면 진리가 어떻게 바르게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것인가? 남이 배고플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부처님을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담뱃재를 어디에 털 것인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실천하면 우리의 평상심은 올바른 삶이 된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안다고 하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고 선(禪)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특별한 경험과 선(禪)을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禪)수행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를 뿐'을 실천하는 것이다.

옛날 조주(趙州)선사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니라."
"그러면 그것을 계속 간직하려고 애써야 합니까?"
"애쓰면 그르친다."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이 없다. 안다고 하는 것(知)은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의심 없이 도달하는 도는 허공과 같이 맑고 넓은데 어찌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조주선사는 크게 깨달았다. 조주선사는 무엇을 깨달아 얻었나?
선(禪)수행자들은 자주 '무엇을 지니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큰 잘못이다. 앞서 말한 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아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수행은 그 아는 것을 잘 소화하여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평상심이다.

그러면 왜 공안 365개를 만들었을까? 세상 사람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 치료제를 써야 한다. 조주(趙州)는 무엇을 얻었나? 입을 열어 말하면 벌써 실수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순수하고 깨끗한 답은 항상 앞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참 '나'가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도(道)는 위대한 어머니
비었어도 끊임없이
온 세상에 생명을 준다.
도(道)는 항상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한다.

도(道)는 어떻게 끝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가? 이것도 같은 관점이며 같은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적인 공안, 기독교적인 공안, 도교적인 공안, 선(禪)적인 공안이 실려 있다. 오래된 공안도 있고 새로운 공안도 있지만,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흥미로운 공안 이야기에 집착하거나 여러분의 견해에 매달린다면 그 공안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같이 맑아져서, 어떤 공안에 대해서도 저절로 정답이 나온다. 그것이 지혜(예지)이다.

여러분이 공안을 받았을 때 설사 그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다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 공안에 집착하지도 말고, 또 그 공안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며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쉬지 말고 정진하여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도(道)와 진리, 인생을 깨달아 매 찰나 찰나마다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교(敎)밖의 것을 따로 전하니,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된다.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숭산대선사]

 


Le Bouddha (The Buddha) / 르동



 

사월초파일(四月初八日)의 유래

이 날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 하여 불탄일(佛誕日) 또는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나,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석가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원래는 불가(佛家)에서 하던 축의행사 (祝儀行事)였으나

불교가 민중 속에 전파됨에 따라서 불교 의식도 차츰 민속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여러가지 불교 행사가 성했는데,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불교를 호국(護國)의 바탕으로 참여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불교행사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세시행사와 더불어 자연스 럽게 병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불교행사가 신라의 세시풍속으로 승화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월 초파일은 불도의 행사가 신라의 호국불교로 승화된 이래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민속과 동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와 고구려 본기에는 불도의 행사가 세시의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석가모니 탄생일을 팔관회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고려사 (高麗史)》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일, 15일 이틀간 을 저녁에는 연등(燃燈)을 하던 풍속이 있었으나 최이(崔怡)가 4월 8일로 옮겨서 하게 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축의행사로 전래되었다가 민간의 세시풍속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특정 종교를 이야기하려는 뜻은 없다.
다만, 시기상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는 즈음에서

싯다르타(Siddrtha)가 왜 '위대한 포기'를 했을까하는 문제를 좀 생각해보는 것도

오늘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안 샤카족이 세운 '카필라'의 '숫도다나(淨飯王)'왕의 태자(太子)였다.
그의 본명이 '싯다르타'였고 출가(出家) 구도(求道) 사문(沙門)으로는 '고타마(Gotama)沙門'이였으며,

득도(得道) 성불(成佛)하여 불려진 이름이 석가모니(Sakya-Muni-聖者)였다.
그는 왕자(王子)로서 부러울 것이 없는 신분인데 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했을까?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라훌라'라는 왕세자가 될 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그 길을 선택했다.

그 번민(煩悶)의 숙제가 된 동기는 부왕을 따라 농경제(農耕祭) 행사 참석 때,

농부의 쟁기끝에서 꼼틀거리는 새 생명을 한 작은 새가 쏜살같이 날아와 그 벌레를 쪼아 물고 올랐다.
그러나, 곧 큰 새가 나타나 벌레를 문 그 작은 새를 차고 올랐다.
여기서 태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참한 현장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강한 회의에 빠졌고

해가 저물어 환궁(還宮)할 것도 잊은 채 깊은 사색에 빠졌다.
이것을 두고 기록에는 '염부수(閻浮樹) 아래의 정관(靜觀)'이라고 한다.

태자는 모든 것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동문 밖에서, 등굽은 백발노인에서 인간의 늙음을.
남문 밖에서, 신음하는 병자에서는 그 고통을.
서문 밖에서, 상여의 행렬에서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그런데, 마침내 북문 밖에서는 평온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한 출가 수행자를 보았고,

드디어 거기서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북문 광경의 체험은 인간 싯다르타에게는 새로운 삶의 대한 열쇠였고 행복의 출발이었다.

구도자가 된 '고마타' 사문은 스승 편력을 매우 선택적으로 엄선하여 사사(師事)했다.
어떤 사문은 생천(生天)을 위한 불합리한 고행을,

또 다른 두 스승님들은 의식 집중을 위한 모든 정신 활동의 정지를 통한 무효(無效)한 고행 방법을 보고는 그것으로는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런 관습의 타성에서 탈출하였다.
'정신이 육체에 갇혀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고행을 강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었다.

고행(苦行)과 미로(迷路)에서 벗어난 사문 '고타마'는 마침내,

생로병사의 고통의 원인은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깨달아 성불하였다.
내심의 깊은 성찰에 잠겨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는 도리를 관찰하였다.
"나는 일체의 승자(勝者)이며, 일체의 지자(智者)이다.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渴愛)가 다하여 해탈하였다."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곧, 내가 부처란 말이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일은 곧 자비행(慈悲行)이다.

중생 없는 부처님은 그 이름이 있을 수 없고 중생 없는 부처님은 그 존재가치도 없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왜 자꾸 싸우기만 하는가? 포기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내 안에 빈자리가 없다. 비지 않기 때문에 부를 수도 들일 수도 없다.

이것은 철학이 없어 무명(無明)하고, 사랑이 없어 자비행(慈悲行)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해마다 초파일인 불기 몇 년이란 의미의 축제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정신적 빈곤상을 어떤 원력으로서 자비행을 베풀고 깨우치려는지 궁금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 일은 사찰이 크고 장엄하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보(三寶)에 대한 신뢰와 중생의 신심이 올바로 발현되어야

그것이 부처님의 산화공덕이 되어 이 사바세계를 더욱 정토(淨土)케 할 것이다.

부처님 고행상

석가모니 부처님의 16세 시절의 모습


나무아미타불...


,·´″"`°³о성불하십시요_()_ ,·´″"`°³о

 

 

 

피아212 ♪♥

불두화(佛頭花) - 해조음(海潮音)

래듣기 릭==>>

그립다 그립다 님의 향기가 그립다
천년을 목놓아 날 부르는
작은 꽃 흰머리 불두화야
님찾아 닮아갔니 아님 누굴 닮았니
나 그대 그리워하며 홀로 천년을 사느니
그대와 마주하고서 난 하루를 살리라
그립다 그립다 한송이 흰머리 불두화야

그립다 그립다 님의 빛깔이 그립다
천년을 돌아와 날 바라는
밝은 꽃 흰머리 불두화야
한송이 흰님찾아 닮아갔니 아님 누굴 닮았니
나 그대 잊지못하여 홀로 천년을 사느니
그대와 함께하고서 난 오늘만 살리라

그립다 그립다 흰머리 불두화야


천년의 가르침


      천지는 영원한 것 이지만
      이 몸은 두번 얻지 못하며



      인생은 단지 백 년이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기 쉽다.
      .

      다행이도 그 사이에 태어난 몸이니
      삶을 누리는 즐거움을 몰라서는 안되고
      또한 헛되이 사는 근심을 품지않아도 안된다.
      .

      사람이 늙어서 젊은사람을 보면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된다.
      또한 영락해서 남의 영화로움을 보면
      榮枯盛衰의 허무함을 느낀다.
      .

      그로 인해
      영리를 위한 다툼이나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
      사람들이 태어나기전에
      어떤 모습이였을까를 생각해보라.

      또 죽은 뒤에
      어떤 모습이 될것인가를 생각해보라.
      .

      그러며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사라져
      한 조각 혼성만이 고요하게 될것이다.
      .

      그리하여
      무례에 처연하여
      천지창조 이전에
      절대경지에서 노닐게 될것이니라.
      .

      세월은
      본래 길고 오래지만
      마음이 가뿐사람은 짧다 한다.
      .

      땅은 본래 넓지만 속된사람은 좁다하며
      풍파와 설원은 본래 한가로운 것인데도
      일에 바쁜사람은 조용히 느껴 보지도 않고서
      부질없다고 한다.
      .

      속임수를 잘쓰는 사람을 만나면
      성심으로 감동시키고
      포악한 사람을 만나면
      온화한 기운으로 감화시킨다.
      .

      사악에 기울어져
      사리만을 꽤하는 사람은
      大義名分과 기개절조로서 격려한다면
      이 세상에서
      바로잡지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