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칠부능선 2022. 5. 21. 03:51

    마음이 분주할 땐 시집이 좋다. 

    시집 열두 권의 선집이다. 옮긴이의 해설까지 500쪽에 가깝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진솔하고 소박한 수상 소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수상 소감의 맺는 말이다.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아무 것도 없다. 시인이 되긴 글렀나 보다. 

     

     

     

     

     

    *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더라?

    꽃인가, 아님 돌인가?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34쪽)

     

     

     

     

    * 양파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수라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의 알몸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아무리 깊숙이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또 한 거풀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도 양파, 네번째도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을 유지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의 푸가.

    메아리는 화성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는 

    세상에세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러운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과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양파가 가진 저 완결무결한 무지함은

    우리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