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칠부능선 2022. 5. 21. 04:18

    맹인들의 호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맹인들 앞에서 시를 낭송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목소리가 떨린다.

    손도 떨린다.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의 시에서

    별빛은 위험한 모험이다.

    먼동, 무지개, 구름, 네온사인, 달빛,

    여태껏 수면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고기와

    높은 창공을 소리 없이 날던 매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읽는다 - 그만두기엔 너무 늦었기에 -

    초록빛 풀밭 위를 달려가는 노란 점퍼의 사내아이,

    눈으로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골짜기의 붉은 지붕들,

    운동선수의 유니폼에서 꿈틀거리는 등번호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낯선 여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싶다 - 이미 불가능한 일이지만 -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앉은 모든 성인聖人들,

    열차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작별의 몸짓,

    현미경의 렌즈와 반지의 광채,

    화면과 거울, 그리고 여러 얼굴들이 담겨진 사진첩에 대해서,

    하지만 맹인들의 호의는 정말로 대단하다.

    그들은 한없는 이해심과 포용력을 가졌다.

    귀 기울이고, 미소 짓고, 박수를 보낸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거꾸로 든 책을 불쑥 내밀며

    자신에겐 보이지도 않는 저자의 서명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