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잉걸 2005. 5. 8. 22:36
 

어떤 사람이 돈을 벌어 보겠다고 객줏집을 차렸다. 하루는 먼 길 가는 듯한 손님이 한 명 들었는데, 지고 온 돈짐을 주인한테 내놓으면서 “주인장, 이 돈을 좀 보관했다 주시우.”라고 말했다.


돈짐을 받아 든 주인은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주며, 손님 돈이니 농 안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라고 했다. 묵직한 돈짐을 받아 자기 농 안에 넣고 보니 객줏집 주인의 뱃속에서는 잠자던 욕심이 사납게 머리를 추켜들었다.


‘저 돈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객줏집 주인은 얼마 뒤 좋은 생각이 떠올라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주인은 아내에게 “여보, 당장 호박씨를 댓 되(다섯 되 - 옮긴이) 구해 오우!”라고 말했고, 아내는 영문을 몰라 “이 추운 겨울날에 호박씨는 뭐 하려고 그리 많이 구해 오라는 거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돈이 생기지. 큰 부자가 된단 말이요.”라고 대답하고 아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다시 “옛날부터 호박씨를 먹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돈짐을 맡긴 손님에게 호박씨를 까서 대접하면 돈짐을 잊어버리고 갈 게 아니오. 그러면 그 돈짐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고.”라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이 미덥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호박씨를 - 옮긴이) 구해 오라는 남편의 성화에 할수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남의 종자 호박씨(밭에 뿌리려고 따로 모아둔 호박씨 - 옮긴이)까지 긁어모아 왔다.


객줏집 주인은 식구들에게 빨리 호박씨를 까라고 재촉했다. 그러고는 까 놓은 호박씨를 가지고 손님 방에 들어가서 ‘호박씨를 많이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산다’며 호박씨를  권했다. 손님은 먹으면 먹을수록 고소한 호박씨를 주인이 권하는 대로 받아먹었다.


객줏집 주인은 온 식구가 손톱에 피가 지도록(피가 나도록 - 옮긴이) 깐 호박씨 댓 되를 돈짐 맡긴 손님에게 권했다. 그러고는 그 날 밤을 - 농 안에 넣어 둔 돈이 당장 자기 것이 되기나 한 것처럼 마음 속으로 청기와집(지붕에 파란 기와를 깐 집. 청와대는 아니니 착각하지 마시기 바람 - 옮긴이)을 열두 번이나 지었다 헐었다 하느라고 -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 돈짐을 맡긴 손님은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더니 짚신 감발을 하고 나서 “주인장, 어제 맡긴 돈을 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가슴 졸이던 객줏집 주인은 그 말을 듣자 온몸에 맥이 빠져 하마터면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손님이 돈짐을 찾아 지고 대문 밖으로 나서자, (화가 나서 - 옮긴이) 볼이 부어 있던 아내가 남편에게 “밤새껏 손톱에 피가 나도록 호박씨를 까 대접했는데 잊기는 뭘 잊었소?”라고 화풀이를 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 멍청히 있던 남편은 얼마 뒤 무릎을 탁 치며 “옳거니, 잊기는 잊었거든. 우리 밥값을 잊고 갔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아내는 코웃음을 치며 “그러니까 ‘남잡이가 제잡이’가 됐구먼요.”라고 했다.


*감발 : ‘감은 발’이라는 뜻. 먼 길을 걷기 위해 길다란 천을 발에 친친 감는 것.


*남잡이가 제잡이 : 남을 ‘잡는’ 자가 자신을 ‘잡는’ 자가 된다는 말. 남을 해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뜻이 같은 속담으로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다.’가 있다.


- 조선(이북)의 옛날 이야기


#옮긴이의 말 : ‘호박씨’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이야기는 서기 16세기 후반에야 만들어진 듯하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휴전전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다가 이제야 소개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