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나의 행복한 레쥬메

패션 큐레이터 2016. 3. 23. 18:45



매년 신세계 연수원에 간다. 19년 전 이곳에서 처음 신세계 입사 후 연수를 받았었던 공간이다. 예전엔 산악자전거와 새벽구보가 빠지지 않는 훈련이었는데, 요즘은 라이프스타일 읽기와 예술체험 등이 교육 프로그램에 들어있다. 많은 변화의 지점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안셀름 키퍼의 작품이 보인다. 여성의 드레스 위에 놓여진 책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마도 책의 연금술 시리즈였던 것 같은데, 안셀름 키퍼의 작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로비의 보이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의 작품에 눈길이 갈 수 밖에. 


드레스를 공부하는 것, 패션은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 이 조각작품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텍스트의 숲을 헤매어야 한다. 시각적 이미지만을 보면서 연구할 수도 없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옷에 담겨진 이야기를 복원하고, 혹은 재조합해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옷을 유통하고 제조하는 일도 이 두 과정의 지난한 미학적 고충을 겪어내야만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을 고른 건, 정말 신세계 그룹의 미래적 위상이나, 앞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통찰력이 결집된 상품기획과 패션의 메세지를 전달하기에 최적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신입사원들과 부장급 승진자들을 위한 강의를 해왔다. 이번에는 신세계 인터내셔널의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패션과 스토리를 주제로 이야기 했다. 복식사 연구자로서, 현대의 다양한 브랜드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위상을 찾아내고, 브랜드가 중요하게 지켜가는 의미들을 설명해내야 한다. 복식사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데 꽤 좋은 소스가 된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우리의 자리, 바로 위상값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스토리가 중요한 이유, 스토리와 정보가 어떻게 패션상품을 인지할 때 차이를 만드는지, 무엇보다 최근 미시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복원해, 실제 매장 디자인과 브랜딩에 차용하는 사례들도 살펴보았다. 각 시대의 패션과 문화가 우리에게 전달해준 가치와 미덕, 럭셔리 논쟁, 패션과 리빙개념의 결합, 이외에도 정말 많은 현대적 화두들을 복식사를 통해 끄집어내고,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수업을 이끌었다. 


패션은 거대한 이야기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건과 인물이 배경 속에서 엮어내는 의미들도 이야기를 통해 이해된다. 한 브랜드를 신화로 만드는 것도, 결국은 인간을 움직이는 이야기다. 함께 해준 신입사원들의 열기가 뜨겁다. 강의란 행위부터가 뜻을 풀어내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내가 만드는 이야기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을 청취하게 하게 이야기의 힘을 덧붙여 미지의 땅으로 가는 행위. 이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함께 열정을 갖고 나누어주는 이들이 있어, 최선을 다해 강의할 수 있었다. 함께 해준 신세계인터내셔널 여러분들께 감사함을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