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인스퍼레이션

패션 큐레이터 2017. 10. 8. 19:50



1.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 미학을 고민할 수 있는 유쾌하고 흥미로운 전시였다. 서아는 미디어 파사드에 사용되는 빛의 움직임이 좋은 듯, 빛 아래서 런웨이 모델처럼 걷기도.



2.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은 아날로그를 의존하면 안된다는 그의 도전적인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한 시대를 규정했던 캐논을 참조 하는데 이때, 이 경우 디자이너가 이전 시대의 물질문화의 틀에 갖힐 수 있다는 말은 참 와닿는다. 우리는 흔히 온고지신의 힘을 이야기 하지만, 과거를 지나치게, 성찰없이 참조할 때, 지금 이 순간의 변화의 조짐을 타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리라. 



3.

전통과 인문학의 힘은 과연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카림 라시드의 모든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디자인이란 행위를 통해 한 시대를 소통하는 물질을 만지고 물질로 만들어낸 물품들은, 한 시대의 산물이고, 한 시대의 정신을 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것들 중 뛰어난 방법론, 미적 성취, 접근법을 캐논이란 이름으로 학습하지 않는가? 그 캐논을 답습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전 시대의 죽은 영혼의 물질들을 만지는 것은 아니겠는가? 


4.
지금 이 순간의 싱싱한 사유를 포착하려면 정보와 데이터, 인터페이스의 구성논리를 읽을 수 밖에 없다. 정보, 데이터, 연결성의 문제는 디자인을 넘어 우리의 삶을 설계하는 기본 자양분이 되었다. 서아 앞에서 디자인에 관한 그의 생각을 조근조근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함께 나눌 날이 오겠지 상상하며.



5.
물질문화에 관심이 많은 내겐 울림이 큰 전시였다. 그를 포장하는 큐레이터의 어휘는 마뜩찮지만 그가 주장하는 디지팝(Digi-pop)미학을 생각할 충분한 기회였다. 예전 팝 쿠튀르란 제목의 전시를 기획할 때 참여했다. 이때만 해도 전통과 현대패션의 의미를 확장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를 갖고 임했다. 전통 장인들의 손길과 현대 핸드백 디자이너의 작품을 결합시키는 작업이었다. 8개의 주요한 작업을 가지고 전시했다.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전시였다. 항상 과거와 현재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패션을 이용한 것 뿐이다. 전통과 현재가 만나는 과정에서 빚어낸 마찰음은 적지 않았다. 



6.

생각해보면 만들어진 제품들이, 과거에 지나치게 천착한 작품들도 많았고, 온고지신이란 미명하에, 과거를 지나치게 레퍼런스로 삼는 우를 범한 것이다. 되집어보면 이 당시 이런 경향들이 전시의 트렌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해도, 되돌아보면 그다지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었지 싶다. 디자인의 한국화, 혹은 한국적 디자인이란 이름아래 우리는 과거를 지나치게 차용하고 그대로 성찰없이 배껴쎴다. 



7.

과거에 만들어진 물질문화와 흔적은 과거의 한 시대를 풍미하던 라이프스타일을 담기 위한 그릇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우리가 살았던 삶과, 현재의 삶을 너무 동일시한 탓에, 혹은 과거의 문법을 지나치게 우선순위화 한 탓에 현대적으로 변용하는데 서툴렀다. 우리의 패션도 그랬다. 80년대 자칭 파리에 도전했다는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그랬다. 이제는 시간도 흘러서, 이미 서양패션의 문법을 내재화한 디자인들이 나오고 있고, 뉴욕과 파리, 밀라노의 패션위크에는 매번 한국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오른다. 



6.

그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을 보다가 피터 짐머만이란 현대미술작가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서재에 꽂힌 그의 작업들을 꺼내 보고 있다. 레진으로 거대한 화면을 채워가는 그가, 유동적인 물질의 흐름을 통제하는 그의 기법들을 다시 보고 있다. 한 줄의 글로 남길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작업에서 카림 라시드가 왜 그를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