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기독교

Song Of Songs 2015. 1. 6. 08:19

   
저자 : 박혜란  | 출판사 : 아가페북스
판매가 : 13,000원11,700원 (10.0%, 1,300↓)
故 박윤선 목사의 딸이 이제야 말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오류와 순전한 복음 -한국 교계에서 숭상하는 목사의 딸로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의 신앙적 오류와 목사 가정의 내면을 가감 없이 정직하게 노출하다!-한국 교회의 병폐인 유교적 권위주의, 샤머니즘적 기복주의, 복음을 왜곡한 율법주의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꼭 읽어야 할 독자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 왜곡된 율법주의로 갈등하는 모든 성도교회지도자(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목회자의 자녀, 목회자, 신학생[더보기▶]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살핀다. 하나는 생애이고, 다른 하나는 업적이다. 전자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내부와 외부, 가정과 가정 밖에서의 인간관계다. 그리고 후자는 보통 직업을 통한 성과를 살펴본다.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는 이유는, 업적은 성장 배경과 살아온 방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애는 업적으로 열매 맺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거목, 정확히 말하면 한국 장로교회의 거목인 고(故) 박윤선 목사는 엄청난 금자탑을 쌓았다. 학자로서 국내 최초로 성경 전권 주석을 썼다. 교수로서 고려신학교와 총신대, 그리고 합동신학대를 고치며 수십 년 동안 많은 후학들을 양성 했다. 그리고 목사로서 바른 말씀을 전했다. 그는 전 생애를 한국 교회에 바쳐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의 삶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평이 없다. 목사는 양들을 잘 돌봐야 하지만 가정도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딛 1:6). 그런데 그의 가정사는 다소 베일에 쌓여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쌓은 그의 업적이 컸기 때문일까? 그 업적이 너무 커서 가정사는 무시 됐던 게 아닐까? 기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의 가정사도 공개 됐다. 학자, 목사 박윤선이 아니라, 인간 박윤선이 우리 앞에 서게 됐다.

'목사의 딸'

본서는 박윤선 목사의 딸, 일찍 세상을 떠난 첫째 부인의 둘때 딸이 그에 대해 쓴 책이다. 어느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던 가장으로서의 박윤선 목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슬프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동안 알려진 박 목사의 이미지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저자의 삶, 아버지 박윤선, 학자 박윤선이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와 둘째는 묶어서 살펴 볼 것이다.

1. 저자의 삶, 아버지 박윤선
- 무관심한 아버지

저자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경제적으로도 그런 것은 물론이고, 가정적으로도 그랬다. 경재적 불우함은 섦이 팍팍해서 늘 배고팠다는 뜻이다. 가정적이라고 하면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아버지에게 말이다.
지난 20세기 초반은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은 상태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가부장 사회였다. 유교에서 비롯된 남존여비 사상이 사람들의 의식과 삶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남편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 중 하나인 자녀에 대한 관심을 거의 혹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가정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인 경제적 책임만 겨우 졌다. 그나마도 등한시 한 남편들이 많았다. 번 돈을 아내에게 주기는커녕 주색잡기에 탕진 하거나 아내와 아이들을 수시로 야단치고 괴롭게 하는 남편들이 있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괴로웠지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당시의 문화이자 분위기였다.
저자도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공부에만 몰두한 아버지, 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물론 저자가 고백 했듯이 저자는 다른 형제들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는 유달리 저자를 아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정서 및 분위기와 비교하면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버지 박윤선은 저자와 형제들을 매우 엄하고, 권위적으로 다스리며 강압적인 태도로 대했다. 그것은 저자와 형제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의 엄한 다스림으로 저자와 형제들은 자신감을 갖지 못하여 소극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녀양육에만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경제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제 관념이 없었다. 생활력이 없었다. 돈에 무관심 했다. 자신의 공부에만 몰두했다.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생활이 무척 팍팍 했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몫은 전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바느질 등 여러 허드렛 일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경제적 책임까지 떠안았으니 그 고생을 어찌 다 말하랴!
아버지의 무관심은 형제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유학을 다녀오는 게 쉽지 않았다. 유학은커녕 대부분 기초 교육 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학을 몇 번이나 다녀왔다. 마음만 먹으면 자녀들의 교육은 어렵지 않았다. 하고자 한다면, 관심만 기울이면 자녀들도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의 교육에 무관심 했다. 자신의 연구에만 매진 했다. 아무리 유교 사상이 사람들의 정신에 뿌리 길게 박혀 있던 시대라 해도 최소한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을 쏟던 시대였다.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에도 무관심 했다. 아들, 딸 할 것 없이 무관심 했다. 오로지 자신이 정진하는 학문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물론 몇몇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돕기는 했다. 그러나 적극적이지 못했다. 충분하지 않았다. 아예 주지 않는 것보다 못한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자립할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자녀들은 스스로 길을 찾고 노력해야 했다.
저자와 형제들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마흔 여섯 어머니를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었다. 이것은 아직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할 자녀들이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 쳐진 결과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계실 때도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무관심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무관심은 아예 무정함으로 변했다. 모든 자녀들을 입양 보낼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를 잃은 자녀들을 사랑과 위로로 보듬었어도 그 아픔과 상실이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듬어 주기는커녕 아예 내쳐버릴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자녀들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계모를 들였다. 저자는 삼자를 통해 이미 다 결정된 그 사실을 우연찮게 들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는 계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이 퍼져 있다. 계모는 괴팍하다는 생각이다. 저자와 형제들에게는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새 어머니는 저자와 형제들을 자주 구박 했다. 어머니를 잃은지 얼마 안 된 어린 아이들에게 폭언과 저주와 폭압을 휘두르곤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사별한 전처의 자녀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저자의 형제들은 방황을 하기도 했고, 스스로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태어난 이곳, 고국에서는 물론이고 저 멀리 낯선 나라에서도 고생은 계속 되었다.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이 이어지지 않아서 큰 언니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똑똑한 둘째 오빠는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대학 문턱을 밟지도 못했다. 큰 오빠는 아버지의 인정을 한 번도 받지 못하여 계속 방황 했다. 형제들은 방황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 안타깝지만 아쉬운

저자의 고통을 누가 감히 평가 할 수 있으며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당사자 외에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저자가 어린 시절 겪은 고통과 여러움은 저자만이 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를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자는 그녀의 글과 감정을 결코 평가할 수 없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그녀를 누구도 뭐라할 수 없다. 저자가 겪은 일들은 소설이 아니라 전부 사실이기 때문이다. 삼자가 봐도 정말 괴로웠을 과거다. 저자의 감정과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는 뭐라할 수 없지만, 아버지를 저울질 하는 태도에는 아쉬움을 느낀다.
앞서 언급 했듯이 당시에는 어느 가정이나 다 그랬다. 그런 시대였고, 그런 문화였다. 가장의 무책임함을 누구도 지적할 수 없었고, 지적할 생각 조차 들지 않던 시대였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에 묵묵히 고통을 안고 살았다. 박윤선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필자의 조부를 들 수 있다.
조부는 가정에 무관심 했다. 자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조모가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다른 살림을 차렸다. 조부가 번 돈은 다 그 집으로 갔다. 그로 인해 조모는 남편 없이 홀로 대가족,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셨다. 조부의 어린 형제들을 돌보고, 자녀들을 먹였다. 오죽 했으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의 아버지가 조부를 찾아가 아버지 맞냐고 따졌다고 한다. 먹을 것 좀 달라고 구걸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가막히게도 돌아온 건 문전박대였다고 한다. 조부는 새 여자와 사느라 젊은 시절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조모가 힘들게 번 돈으로 마련한 집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새 여자에게 주려 했다. 결국 사기 당해서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남의 손에 집을 넘겨주고 쫓겨나야 했다. 집과 백 평이 넘는 땅을 하루 아침에 잃었다. 조부는 가정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새 여자가 도망을 간 뒤에야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필자의 조부를 헐뜯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가장의 무책임함이 이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가장도 분명히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은 박윤선 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이버지만 유별난 사람으로 만들었다. 특히 큰 아버지와 대비함으로, 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자신의 아버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시대의 산물, 자신의 아버지도 시대의 아들이었음을 얘기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 단 한 차례만 슬쩍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참으로 못난 사람인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박윤선 목사의 모습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시대의 보편적 산물이다. 그의 부족과 잘못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시대의 산물일지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박 목사를 옹호하려는 것도 저자를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아픔은 충분히 위로 받아야 한다. 그의 아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소회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실제 아픔이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의 공정치 못함은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저자는 아버지 박윤선을 너무 박하게 평가한다. 당연한 일이다. 자식으로서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했고, 누구나 누릴 권리가 있는 행복한 가정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실수를 저지른다. 자신의 아버지를 평할 때는 매우 신랄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지나치게 후하다. 가령 큰 아버지는 좋게 평가한다. 물론 좋게 평가할 만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큰 아버지의 내밀한 (가정에서의) 모습까지는 모르기 때문이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오빠다. 큰 오빠를 언급할 때는 연민이 가득하다. 큰 오빠가 자신의 가정에서 저지른 잘못들에는 매우 관대하다. 두번의 이혼의 원인이 큰 오빠에게 있고, 그도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음에도 전혀 비판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잘못의 원인을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덮어 씌운다. 그것이 부당하지는 않다. 큰 오빠가 그렇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가 간과하는 게 있다. 성인이 되면 그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성인이라 해도 어릴적 형성된 성격과 생활 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성격과 인생에 대한 가치관은 유아기와 유년 및 청소년기에 형성 된다. 그것은 가정, 부모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그때에 형성된 성격과 가치관은 성인이 되어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 삶을 지배한다. 한번 형성된 그것을 바꾸기 쉽지 않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 부모에게 일정량 돌아간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 아담의 원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아담에게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큰 오빠도 비판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저자는 큰 오빠의 잘못들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며 그를 옹호 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아버지의 잘못도 시대의 산물임을 인정하고 관대히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 내 형제는 이해하고, 나에게 영향을 끼친 아버지는 이해하지 않는 태도는 결코 공정하지 않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 저자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가 겪은 고통은 위로 받아 마땅하다.

저자는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자신은 어렵게 공부를 하고, 형제들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학업을 잇지 못한 사실을 가슴 아파한다. 그 결과에 대한 원인인 아버지의 무관심을 몇 번이나, 여러 곳에서 계속 지적한다. 그 마음이 독자로서 충분히 공감이 갔다. 영특한 형제들, 아버지가 관심만 가져줬으면 제대로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은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형제들은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쉬움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배부른 바람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누린 사람이 얼마나 됐나?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으로 국가는 혼란스러웠고 국민의 삶은 너무나 팍팍 했다. 당장 오늘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할 시대였다. 교육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런데 저자는 아버지로 인해 형제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분하게 여긴다.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형제들의 교육과 유학의 길이 막혔음을 한탄한다.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도 힘들었던 당시에 아버지는 몇 번이나 유학을 다녀왔으니 저자의 기대도 당연히 컸을지 모른다. 자신과 형제들도 당연히 그에 준하는 교육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그래야 한다고 여긴 듯 하다. 물론 저자만이 아니라 어느 가정, 누구든 자식으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누려야 한다. 반대로 부모는 가능한 한 자식이 원하는 만큼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자식을 낳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자식의 자립과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부모가 그 책임에과 의미를 자지 않겠다면, 처음부터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 자식에게 합당한 양육과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들어 자식에게 봉양의 책임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책임 관계가 어떠하든 당시 시대적 상황은 어떠한 것도 충분히 허락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필자의 조모와 고모는 교육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초등교육만 겨우 받았다. 이처럼 당시에, 특히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를 거의 혹은 완전히 박탈 당했다. 여자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남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남자라 해도 길어야 고등교육까지만 받았을 뿐이다. 그 이상 대학과 대학원 교육은 돈이 있는 집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했다. 물론 돈이 없어도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곳까지 이르긴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소수였다.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쉽고 안타깝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보편적인 현실이었다.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식을 돕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버지 탓을 한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힘들게 교육을 받았고, 형제들 또한 그랬지만 잘못된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 혐의를 씌운다. 아버지가 조금만 도와줬으면 형제들은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누렸을 거라 말한다. 사실이긴하다. 그러나 동시에 앞서 언급한대로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얼마나 과한 바람인지 알 수 있다.

3. 학자 박윤선

저자는 아버지가 잘못된 신학으로 형제들에게 하나님을 잘못 전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무서워만 하고, 그분을 제대로 즐거워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곳곳에서 아버지가 자기 식대로 하나님을 이해 했다고(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 비판한다. 아버지의 신학과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버지가 네덜란드에서 보낸 편지를 예로 들며 아버지는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더하여 아버지의 설교, 죽기내기로 기도하라는 말을 율법주의라고 평가한다. 아버지의 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다. 맥락과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잘못 됐다고 비판한다. 참으로 부주의한 태도를 보인다.
저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내 바른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가 아버지를 지적하듯이, 바르게 배웠다고 자평하고서 자신도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저자는 아버지의 신학과 신앙이 잘못 됐다고 그토록 비판하는데, 그와 똑같은 비판의 날을 저자에게도 세워야 한다. 일례로 저자는 형제들에게 벌어진 잘못된 일은 모두 아버지 책임으로 돌린다. 그리고 좋은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라 확신한다. 이는 참으로 감정적이고, 옳지 못한 판단이다. 섭리에 대한 무지다.

저자는 곳곳에서 아버지의 신학을 평가한다. 그런데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평가한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하는 몇 마디 말과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로 그 신학 전체를 평가하고 잘못 됐다고 매도한다. 저자가 신학에 대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런 평가를 그러려니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것도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아버지를 공정하게 평가 할 지식과 방법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저자가 아버지의 신학을 평가하려면 그의 사상과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있는 주석과 설교 및 저서들을 충분히 검토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저자는 고작 주석의 일부와 설교 몇 편,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난(기억은 부정확 하므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말과 편지를 통해 아버지의 신학이 잘못 됐다고 평가한다. 그것이 한국 교회에 큰 영향,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는 공정하지도 신중하지도 못한 태도다.
저자가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박윤선 목사는 정확하게는 한국 교회 전체가 아니라 장로교에 영향을 미쳤다. 학교로 예를 들면 고려신학교와 합동신학교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장로교에서도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버지가 한국 교회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매도한다. 더구나 한때 유행한(그리고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있는) 교회 성장이 아버지의 신학 때문이라고 평한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복 받아야 한다는 그 신앙관이 교회에 미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 교회사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부주의의 결과다. 교회 성장 운동은 미국에서 넘어왔다. 미국에서 유행한 교회 성장 운동을 당시 유학하고 돌아온 목회자들이 국내에 도입 했다. 그것이 70-80년 대에 한국 경제 재건 및 성장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유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교회 성장은 교단을 초월하여, 범교단적으로 유행 했다. 한 개인의 가르침이 잘못 돼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버지를 매도하기로 작정 했는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제대로 비판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제대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다. 아버지의 신학을 면밀히 들여다 보지 않고 단 몇 마디 기억으로 아버지의 신학에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사랑, 그리고 끝내 풀지 못한 아버지와의 화해를, 그로 인한 자신의 악감정을 투영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서운함을 본 서를 통해 표출하려는 듯 보인다. 아버지의 엄함, 권위에 눌려 한 번도 부려보지 못한 응석을 본 서를 통해 부려보려는 듯 보인다. 하고 싶었지만 결코 할 수 없었던 그 투정을 자신도 모르게 곳곳에서 내비친다.

총평

이 책은 두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이 책은 에세이의 성격에 충실해야 했다. 자신의 가정사만 보여주고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만 토로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그러면 신학자 박윤선이 아니라 인간 박윤선을 재조명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됐을 것이다. 인간 박윤선에 대해, 박 목사를 높게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그의 부족을 부끄러워 하고 가리려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죄를 저지른 다윗을 성경에서 빼버릴 것인가? 도리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신학교, 특히 박 목사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있는 신학교에서 그의 부족을 거울로 삼아 제 2의 아버지 박윤선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들에게 지식만 가르치는데 머물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을 배양하고 교회와 가정,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본서의 가장 큰 아쉬움은 아버지의 신학을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평가한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신학이 잘못 됐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답을 제시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게 있다. 자신이 제시한 답이 아버지가 추구하던 칼빈신학, 아버지도 그것을 주장 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가령 칭의 논쟁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행위를 이야기 하는데 그 부분은 아버지의 칼빈신학이 이미 충분히 논하고 있다. 다만 칭의 문제가 부각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칼빈신학, 아버지는 삶의 문제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매도한다. 이는 명백한 오해다.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인상으로 아버지의 신학을 평가한 것은 큰 실수다. 아예 평가하지 않거나 하려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후에 평가했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대된 평가를 하지 않았으니, 신학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은 저자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박 목사의 딸의 말이기 때문에 누구의 말보다 공감과 신뢰가 되고, 게다가 신학을 박사까지 공부 했으니 더욱 지지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평가하려면 신중하고도 면밀하게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저자의 지적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아버지가 시대의 아들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신자는 시대의 한계에 머물지 말고, 성경대로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참으로 옳은 주장이다. 아무리 입으로 바른 지식과 삶을 얘기해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면 그에 따른 병폐가 생간다. 그것을 박 목사가 보여준다. 다만 여기에도 지적 할 점이 있다.
저자는 시대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가정에서 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했음을 무척 아쉬워 한다. 이는 마땅한 지적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에게는 너그럽다. 저자의 주장처럼 시대가 그렇다 하더라도 신자는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저자도 비록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좋진 않더라도 아버지를 이해했어야 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성경으로 계속 지적 하는데, 저자도 그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가슴 아픈 지난 날이지만,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 성경으로 아버지를 교정하기만 하고 자신은 그것에서 쏙 빠뜨린 저자의 태도는 결코 옳지 않다.
물론 저자는 자신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납하며 순종하려 했다는 얘기를 곳곳에서 한다. 아버지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거짓 없는 진실한 바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 서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단지 자식으로서의 바람이자, 자식으로서의 태도로만 보여진다. 성경 말씀에 순종의 태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비판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예상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무력화시키려는 안전 장치 이상일 수는 없다.

독자는 본 서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먼저,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저자와 그 형제들은 그 자체로 위로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자식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거의 혹은 전혀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만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라도 아버지를 원망하고 탓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누구도 뭐라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그에 대해 독자는, 특히 박윤선 목사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해서도 안 되고, 비판 혹은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식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과 마땅히 할 수 있는 원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를 비판한다면 그 비판하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독자는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평에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를 비난 - 특히 박 목사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에 있는 측이 - 할 필요는 없다. 박윤선 목사가 자식들에게 잘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적 문화로 인한 당시 남자들의 보편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박 목사가 백번 잘못 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행동을 비호하거나 미화 할 필요도 없다. 시대정신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씀에 반하는 정신들을 거부하고 말씀대로 행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우리 시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정신은 어떠한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살펴봐야 한다.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시대정신을 꿰뚫을 안목과 그것을 깨뜨릴 용기가 없다면 성경을 더욱 읽어서 안목을 기르고, 기도함으로 담대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저자의 한숨과 박 목사의 부족함에서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본 서의 독자 중 목회자는 자신은 가정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교회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아내와 자식에게 소홀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봐야 한다. 교회에 대한 섬김이 가정에 대한 방관을 결코 지지해 주지는 않는다. 가정도 교회의 일부다. 가정도 교회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의 가정 또한 잘 돌보고 섬겨야 한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녀를 잘 양육 할 책임이 있다. 부모는 자녀를 잘 돌보도록 하나님께 임명 받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아픔과 비극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녀들을 잘 돌봐야 한다.
목회자의 자녀들은 본 서를 통해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역을 존중하고, 인간적인 부족함을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역에만 집중하는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하면 사역에 더욱 집중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것을 지키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뭐라 할말이 없습니다. 충격이 가시질 않아서 정리가 안되는군요.
충격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회자 가정이 여전히 많은데... 교회마다 성도들이 신경을 써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당대 세상의 시대정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건가요?
'시대정신이 그랬었기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는 얘기는 반만 맞는 얘기라고 봅니다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는 말씀하신 부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대정신을 거슬러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아래(총평에서 인용).

"... 시대정신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씀에 반하는 정신들을 거부하고 말씀대로 행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우리 시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정신은 어떠한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살펴봐야 한다.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시대정신을 꿰뚫을 안목과 그것을 깨뜨릴 용기가 없다면 성경을 더욱 읽어서 안목을 기르고, 기도함으로 담대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저자의 한숨과 박 목사의 부족함에서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총평을 다시 한 번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