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살던 고향 ◇─/마을유래비

황인홍 2017. 4. 5. 23:14









심천면의 유래


소백산맥의 허리쯤에 우뚝 솟은 백화산(白華山) 삼도봉(三道峰) 덕유산(德裕山) 등 천하 영산이 동에서 서남녁으로 아스라히 뻗쳐있고 가까이 서편으로는 마니산(摩尼山) 어류산(御留山) 국사봉(國師峰) 월이산(月伊山)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있는 우리 고장 심천은 산천이 수려하고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하여 예로부터 악성(朴堧) 선생 등 수다(數多)한 명공현사(名公賢士)를 배출해 온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천년을 두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상류 버들내(楊江川)가 영동천(永同川)을 끌어안고 다시 내려와 솔내(松川)와 합류하는 어름에 자리한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박하며 물 또한 맑고 깊어서 지프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으니 이는 정녕 깊은 내(深川)에서 유래 되었음이 분명하다.

고당개(高塘浦)의 고인돌, 노루골(獐洞里)의 선돌, 검촌(錦汀里)의 토기 등 선사 유물이 다량 출토된 고장, 삼국시대에는 신라 땅이면서 백제와 상계(相界)하여 치열한 전쟁을 치룬 군사요충지였던 우리 심천은 당시에 길동(吉洞) 영동(永同)땅으로 고려조에는 계주(稽州) 영상(永山)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도 상주목(尙州牧)에 속했던 군(郡) 현(縣)의 관할지역이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계산(稽山) 죽주(竹州) 영동(永同)이라는 이름으로 청주목(淸州牧)에 이속(移屬)되었던 영동의 서북단에 자리한 심천은 본래 서일면(西一面)의 상단구리(上丹丘里) 하단구리(下丹丘里) 구탄리(九灘里) 장동리(獐洞里) 고당포리(高塘浦里) 대초지리(大草旨里)와 서이면(西二面)의 마곡리(麻谷里) 지계리(枝界里) 그리고 남이면(南二面)의 이십천리(二十川里)가 관할지역이었다.

1895년에는 마을 이름이 일부 바뀌었고 경술국치(庚戌國恥) 후인 1914년에 일제의 군 · 면 폐합 시책에 따라 서일 서이면이 병합되고 남이면의 태소(太沼)와 이십천 옥천군 이내면(伊內面) 내동(內洞) 일부를 이곳에 편입시켜 심천면(深川面)이라 개칭하고 비로소 지프내 땅을 면소재지로 삼았다.

그 뒤 심천면은 심천리(深川里) 단전리(丹田里) 길현리(吉峴里) 구탄리(九灘里) 장동리(獐洞里) 고당리(高塘里) 마곡리(麻谷里) 기호리(耆湖里) 명천리(明川里) 금정리(錦汀里) 약목리(藥沐里) 각계리(覺溪里) 초강리(草江里) 용당리(龍塘里) 14개의 법정리에 20개 행정리 37개의 자연마을에 총 4,600명(남 : 2,302명, 여 : 2,298명)이 면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세기 초에 경부철도와 뒤이어 경부국도가 통과되고 앞으로 고속철도가 개통되는 이 시점에 한 세기를 보내면서 오늘 뜻 있는 면민과 출향인사(出鄕人士)가 함께 뜻을 모아 여기 뱃마터에 지프내공원을 아담하게 조성(造成)하고 고장의 지난 역사(歷史)와 유래(由來)를 빗돌에 새기나니 이는 새 천년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태어나는 후손(後孫)들에게 애향심(愛鄕心)을 기르고 고장의 무궁(無窮)한 발전(發展)과 평안(平安)을 기원(祈願)하고자 함에 있다.



2000년  1월  29일


심천면장 외 면민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