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살던 고향 ◇─/마을유래비

황인홍 2017. 6. 3. 21:13










백자전리(잣밭골)는 동은 황간면 금계리, 서는 구촌리, 남은 산저리, 북은 덕진동에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해발 996m의 백화산이 웅장한 자세로 지켜주고 있고 동남에는 금강의 지류인 송천(초강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용산면의 동단 중앙에 왕기산과 북산으로 둘러 싸여진 아담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본래는 황간현 서면 지역으로서 옛날 잣나무가 많이 있었던 마을이므로 백촌 또는 백자전리라 불려왔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화리의 덕진동을 병합하여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에 용산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68년 10월 1일 행정리동이 백자전리와 덕진동으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조선조 영조 중엽에 본관이 永山人 부원군 金吉元의 아들 우찬성 金宗敬의 12대손 金履澤이 청화리에서 처음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다음으로 金萬澤 金潤澤 金基澤 형제가 정착하였으며 다음에 본관이 星州人 孤隱 李智活의 6대손 李景楷 후손이 이주하였으며 본관이 密陽人 部將 朴尙武 후손과 본관이 文化人 進士 柳基中이 와서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영산김씨 동족을 위주로 제주고씨 개성김씨 김해김씨 의성김씨 밀양박씨 울산박씨 밀양손씨 순흥안씨 강릉유씨 문화유씨 경주이씨 성주이씨 경주최씨 남양홍씨 등이 살고 있으며 영동군내 50호 이상 동족부락 5개 마을 중의 하나로 영산김씨 동족부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농지는 앞 개천이 잡아 댕기는 형상이라하여 댕개, 곡식을 담는 뒤주처럼 생겼다하여 뒤주골, 북같이 생신 산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북징이골, 왕이 날 명당이 있다 하여 왕산터라고 하는 구릉 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토지가 척박하고 한근하여 담배, 양잠, 채소 등을 중심으로 밭농사가 발달되었으나 주식량인 미곡이 부족한 본 마을의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1974년에 金英憲이 노력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마을앞 송천에 양수장을 시설 농업용수를 공급받게 되어 개답이 이루어지고 논농사가 발달하게 되었다.

1990년에 경지정리가 되어 기계화 영농기반이 조성되고 인삼과 축산업을 하는 농가가 많아지면서 잘 사는 마을이 되었다.

왕기산에는 병조참판을 지내신 永山人 金 諒의 웅장한 묘소가 있고 마을에는 영산김씨의 제각인 旺山齋가 이조시대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고 용산면에서는 처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자전교회를 1926년에 金東旭이 설립 현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장고개에는 약 200년 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흔히 이곳까지 나와서 손님을 전송한다고 하여 送別亭 느티나무라고도 한다. 동구 앞 연못은 왜정시 우리의 선조들이 가족의 배고픔의 한을 달래주기 위하여 노역을 제공하고 노임으로 양곡을 지급받던 사업장으로 오래 길이고자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93년에 복원 정비하여 낚시놀이터로 가꾸었다.

연못 서편 노송밑에 돌로 된 원탑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설날 그믐에 마을의 평안과 풍작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던 제장이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허물어지고 없어졌다.

이 마을에서 구한말 항일투사 孤松 金鍾懋, 서예의 대가 장릉 參奉 龍崗 金應淵(해서, 전서, 예서 등의 서법을 두루 잘 썼다고 영동군지에 수록되어 있음), 현재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장 柳洲鉉,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장 崔鳳浩, 육군 준장 金尙憲, 행정서기관 金東華, 金東和, 경찰 경정 金陸憲, 면장 金億憲, 지방행정사무관 金在憲 등이 배출되었다.

이곳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 봉사하며 부모에 효도하고 서로 돕고 사랑할 때 잣밭골은 더더욱 발전하리라.


서기 1994년 1월  일

                                                                 지은이  又正  金 東 邦

                                                                 글쓴이  泉谷  裵 甲 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