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살던 고향 ◇─/마을유래비

황인홍 2017. 6. 16. 17:31

회 동 리 유 래 비


우리 마을 회동리는 본래 영동현 동동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동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궁동(才宮洞) 장평동(長坪洞) 장내동(墻內洞)을 병합하여 영동면(읍)에 편입되었다.

회동리는 황해도 회령사람이 와서 살았다하여 행정리명으로 정해졌으며 이후 자연마을로 회령(會寧:황해도 회령댁이 살았다한다) 담안(墻內:옛날 이진사댁의 담안에 있는 작은 마을) 마평(馬坪:마우뜰-말을 키웠던 곳) 재궁골(齋室이 있었음)이 있다.

우리 마을에는 자랑스런 열녀의 행적을 기리는 '이소사열녀비'가 현재 마평(馬坪:마우뜰)에 소재하고 있는데 19세기 말엽의 인물로 본관은 경주이씨이며 제주고씨인 고재복의 아내이다. 남편이 중병으로 죽게되자 이씨부인은 목을 매어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 25년(1888) 9월에 정려되었으나 6.25때 소실되어 1980년에 유인 경주이씨 효열비(孺人 慶州李氏 孝烈碑)를 세웠다.

또 우리 마을을 교육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대때부터 당 지역에는 농업중학은 있으나 인문중학이 없어서 인문중학의 설치를 갈망했다고 한다. 드디어 1946년 10월 10일 영동중학교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되어 개교준비를 착수했는데 가교실을 회동리 공회당으로 정하였다. 입학식은 제1학년 2학급 104명으로 회동리 가교사에서 11월 6일 거행하고 그후 11월 20일에 회동리 공회당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6.25사변 이후 영동에 고아원이 설립되었는데 최초 설립 장소 역시 우리마을 회동리였다고 전한다.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금붕어 양식사업 및 현재 영동군의 주소득작물이 된 포도를 1956년 故 정구영씨에 의해 영동군 회동리에서 처음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전국 최고의 포도 주산지로 성장하게 이르렀으며 대를 이은 물레방앗간 역시 회령의 故 이규달씨와 마평의 권동완씨가 운영을 했었다.

회동마을의 주민들은 조선시대 선조가 피난길에 상수리나무에서 열매를 채취하여 묵을 해 먹은데서 유래된 '도토리묵'을 전국에서도 제일가는 맛으로 승부를 걸어 자녀들의 학비를 충당했으며 영동읍 소비의 약 70%를 공급하는 채소 주산단지로 선진영농을 실천한 자랑스런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을 주민들은 재래식 영농을 탈피하고 과학영농으로 시설채소 포도 등을 조성하여 높은 소득에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있는 '모범마을'이다.

인심좋고 살기좋은 이곳 회동마을은 깨끗하고 쾌적한 자연환경과 산자수려한 풍경속에서 서로 화합하고 오순도순 인정이 넘치는 살기좋은 마을임을 알리고 자랑스런 선조들의 얼을 이어 후한 인심과 화합정신을 본받아 대대손손 우리 후예들은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을 것이며 영원히 고향발전을 위해 인화단결된 모습으로 유서깊은 마을의 역사를 후손에게 알리고자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비(碑)를 세웁니다.


2004년 11월 12일

회동리 주민 일동   글쓴이  서 승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