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동의 사계 ◇──/문화 유적지

황인홍 2017. 8. 3. 12:59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번지에 있는 난계 박연 선생의 생가입니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 중의 한 분인 난계 박연 선생은

세종대왕을 도와 음악을 정비하는데 크게 공헌했고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박연 선생은 1378년 8월 20일(고려 우왕 4년)에 지금 이 자리,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번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시묘살이를 6년이나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호랑이도 어린 박연의 시묘살이를 지켜주었다는 민담이 전할 정도입니다.

 

조선 태종 2년에는 조정에서 효자 정려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합니다.

또 박연이 가야금을 연주할 때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민담도 전해집니다.






아래는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 란 책에 실려 있는 박연의 일화 입니다.


대제학 박연은 영동의 유생이다.

젊었을 때에 향교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제학은 독서하는 여가에 피리를 배웠다.

이에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로 추중(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김)하였다.


제학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 왔다가 장악원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보이면서 잘못된 곳이 있는지 교정해 줄 것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리듬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 고 하였다.


제학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라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광대가 제학의 연주를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 고 하였다.


이처럼 박연 선생은 어릴적부터 피리를 불며 음악에 심취하였고

더욱이 음악적 성취를 위해서는 신분이 미천한 광대에게도 배움을 청할 만큼

소탈한 성격에 음악적 열망이 가득 찬 인물이었습니다.

 

박연 선생은 피리뿐만 아니라 비파, 거문고 등도 익혀서

매우 수준급으로 연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사회적 분위기는 음악적 재능은 관료로 나아가는 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박연 선생은 음악적 재능과 열망을 누그러뜨린 채 관료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여,

28세란 늦은 나이인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게 되었고,

1411년에는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하여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세종이 대군시절에는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세종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박연 선생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뒤

음악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습도감의 제조에 박연을 임명하게 되고

이 때부터 다시 음악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의 정리와 악보 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받았고

1427년(세종 9년)에는 편경 12매를 제작하여 직접 만든 12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하게 하였으며

3년 후에는 미비한 율관을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하는 등

궁중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습니다.



   




난계 박연 선생이 평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과 밀착된 그에 대한 세간의 질투와 경계로 인해 파직을 당하게 되는데요.


박연은 승문원(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관청) 자리에 대해

'호걸이 날 자리' 라고 별 의미없이 말을 하였다가 큰 모함을 받게 됩니다.

왕조에서 호걸이 왕가가 아니라 다른 데서 난다는 것은

역성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1433년에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은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기에

음악을 정리하는 일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었고,

머지않은 날 다시 복직되어 아악에 종사하면서 공조참의, 중추원첨지사 등을 지냈으며,

1455년 '성절사'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는 중추원부사 등을 맡았다가

나중에는 예문관 대제학에 까지 오르셨습니다.






세종이 죽고 난 뒤에도 박연은 문종과 단종 등 세 임금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3조에 걸쳐서 고위직 관료의 길을 걸었던 그에게도

말년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박연에게 크나 큰 불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셋째 아들 박계우가 억울하게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아들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며느리는 정난공신 홍윤성 집안의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역적의 아비인 박연 선생 또한 어쩔 수 없이 죽을 위기에 쳐하게 되지만

세 임금에 걸쳐 봉직한 원로라는 점을 인정받아 목숨만은 건진 채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 영동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막내 아들을 잃고 관직마저 박탈당한 박연 선생은

임금의 총애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초라하게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이 곳 고향으로 낙향하셨습니다.


그가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작별인사를 나온 지인들에게 불어 준 피리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일 정도로 구슬펐다고 전해 집니다.





낙향한 지 4년 만인 1458년 3월 23일

박연 선생은 81세를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연 선생의 유해는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안장되었으며,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고, 영조 43년에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박연 선생이 죽은 뒤 세조는 악학도감이 된 성임에게

'배워서 박연을 따를 수 있겠느냐?' 고 물을 정도로 박연의 재능을 높이 샀다고 합니다.






중국 '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 에 비견되기도 했던 박연 선생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서 시험 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는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음악가이자 관료로서 지금까지도 널리 추앙받고 있습니다.






박연 선생의 고향인 충북 영동에서는

매년 9월 말경이면

그의 호를 딴 '난계국악축제' 를 열어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올해는 9월21일부터 24일까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