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dante 2021. 6. 23. 08:31

자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런 경험은 해 보지 못했고

자고 나니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껏

011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사용했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이 '혹시' 하고

011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가 연결되어

기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제 전화번호의 '자동 변경'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으니 제일 먼저

염려가 됩니다. 누군가 오랜만에 전화했다가

당황하지나 않을지... 연말까지는 전화번호

변경 안내를 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누군가 당황하여 인터넷에서 제 번호를 찾을까봐

이 글의 제목에 제 이름을 넣었습니다.

 

제 번호는 앞자리만 010으로 바뀌었을 뿐

뒷자리는 그대로입니다.

 

상황, 환경, 조건 등의 변화는 대개 인간 관계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변화를 계기로 희미해지거나

지워지는 관계도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러니 관계의 유지를 위해 제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일일이 알리진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이 강제적 전화번호 변경을 통해

떠나가는 사람을 볼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 生은 꼭 그만큼

가벼워질 테니까요.

끝내 고수하시더니 수용하시네요?
지금 사회는 자본이 인간에게 복속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본에 복속되는 제도라서 어쩔 수 없나봅나다
그래서 우리의 개혁 방향이 자본의 인간 복속이 아닌가 합니다.억압 받는 민중이 자신의 민족이라고 토로한 토마스 페인이 많이 나와야겎죠? 단 한 사람의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의 제산보다 1000만배 더 값지다는 체게바라도 많이 나와야 되고.......
그러게요, 선생님,
'수용'이 아니고 '소피의 선택' 같은 것이겠지요. ㅠㅠ

 
 
 

오늘의 문장

dante 2021. 6. 19. 07:28

지난 며칠 사소한 글자들을 다루느라

정작 시는 읽지 못했습니다.

 

시를 읽지 못한 날들이 이어지면

바닷물을 마신 사람처럼 목이 마릅니다.

 

목마름 때문일까요?

허만하 시인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를

집어듭니다.

 

 

의자와 참외

 

마지막 교가처럼 비어 있는 방에 의자가 들어온다. 대합

실 지루한 시간같이 의자 위에 다시 의자가 얹힌다. 풀잎같

이 엷은 소학생 엉덩이 마지막 무게를 받치던 의자가 모로

누운 다른 의자의 무관심 위에 얹힌다. 쌓인 의자는 교실 벽

에 기대어 벌써 위험하다. 출격을 앞둔 병사들처럼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 조그마한 의자들. 폐교 하루 전의 교실보다

쌓인 의자가 고요한 것은 균형의 목표가 붕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 격렬한 소모를 예감할 뿐 어디에

실려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을 잃어버린 빈 학교 앞 리

어카 좌판에 의자 대신 노란 참외를 포개고 있는 행상의 손

길이 외롭게 붕괴와 싸우고 있다. 

 

      --허만하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읽으니 균형이 헝클어지고 균형의 목표가 붕괴라니 붕괴의 목표가 균형이라는 문구보다 더 헝클어집니다
시인의 관점이 얼마나 좌우 하는지 새삼 느낍니다.

 
 
 

오늘의 문장

dante 2021. 6. 16. 13:59

거리가 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지켜지는 예의가

낯익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흔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을 할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하지만

익숙한 일을 할 때는 건성으로 하다가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 관계, 환경...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조심하지 않아

사고가 나고 뒷걸음질 치기 쉽습니다.

 

2021년 여름은 제가 살아온 여러 해 중에 가장 편하고 편리한 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무례하고 시끄럽고 건성으로 가득한 해.

그래서 아래 글이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익숙함을 경계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가 오랜 지인인 상득용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축하하는 이유가 이상하다. 상득용이 말에서 떨어진 일을 축하한다는 것이다. 뼈가 어긋나고 인대가 늘어나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채 종일 신음만 내뱉고 있는 이에게 축하 편지라니. 찰과상으로 흉측해진 상득용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지 않았을까? 사리에 어긋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홍길주는 자신이 축하하는 이유를 써내려갔다.

 

상득용은 무인이다. 말을 자기 몸처럼 다루며 능수능란하게 타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본인도 말 타는 능력만큼은 자부하곤 했다. 홍길주는 바로 이 익숙함이야말로 낭패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말 타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고삐를 부여잡고 안장에 바짝 앉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갔을 테니 크게 떨어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워낙 익숙했기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한밤중에 험한 길을 내달리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낭패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경계는 그렇다 쳐도, 축하할 이유는 무엇일까? 홍길주는

<주역> ‘서합()’ 괘에 대한 공자의 해설을 끌어왔다. ‘서합’ 괘의 첫 효사는 “차꼬를 채워 발꿈치를 상하게 하니 허물이 없다”이다. 공자는 이를 “이익이 없으면 열심히 하지 않고 위협이 없으면 경계할 줄 모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작은 징벌을 받아 더 큰일의 경계를 삼는 것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당장은 낙마의 고통과 수치가 커 보이지만 이를 계기로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돌아본다면 더 큰 낭패를 미연에 막을 수 있을 테니 참으로 복된 일이다. 이것이 홍길주가 밝힌 축하의 이유다.

 

익숙함에 대한 경계는 낭패를 방지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공자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잃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면서도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여겼다. 부끄러움에 둔감하고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것 역시 익숙해짐의 결과다.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은 순간순간 별 생각 없이 익숙하게 던지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경계해야 할 대상은 아직 오지 않은 낭패가 아니라 우리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있는 익숙함이다.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6160300045#csidxf53a94bbed66b349780ab6875bb98d1 

지론에 동의합니다
그런데,한 가족처럼 익숙하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생면부지의 사람처럼 돌변해 철저히 이기적으로 대할 땐 어쩌죠? 저는 익숙했던 지나날이 다 위선이고 지금의 모습이 본성이라 여겨 화해의 제의를 받지 않고 평범한 관계로 대하고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행 못하는 저는 기독교인 자격이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