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dante 2021. 5. 12. 08:40

새벽 어둠의 두께나

해 뜨기전 하늘을 보고

하루의 날씨를 짐작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운 건

수십 년 본 저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

 

하늘은 대개 얼굴이 마음이지만

사람의 얼굴과 마음 사이엔

해에게서 달에 이르는 

죽음 같은 길이 있으니 

 

 
 
 

동행

dante 2021. 5. 9. 08:14

어제 낮과 밤을 뿌옇게 지웠던 황사가 오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비사막의 모래를 실어온 것도 바람, 

시야를 다시 사진 속 풍경으로 되돌린 것도 바람,

새삼 바람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때론 스승이고 때론 친구인 책은 가끔 저를 놀래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빛 도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 후 바람의 위대함에 감탄하며

펼친 책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만난 겁니다.

 

그 책은 존경하는 문창재 선배님이 쓰신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입니다.

무심코 펼친 180쪽에 '백세청풍'이 있었습니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이 구절의 '따스한 손길'은 14대 심수관을 뜻합니다.

아시다시피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심당길(沈當吉)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심씨 문중의 후손들이 전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에 따라

각자의 본명 대신 심수관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청송 심씨인 심당길은 1598년 12월,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근교에서 피랍돼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훗날 사쓰마 도기(薩摩燒)를 개창했다고 합니다. 

1873년 12대 후손 심수관이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 쌍을 출품해

사쓰마 도기가 서구에 알려졌고, 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문창재 선배님이 만난 분은 바로 이 14대 심수관으로, 본명은 오사코 게이사치(大迫惠吉).

1964년 14대 심수관이 돼 심수관 가를 이끌다가 2019년 6월에 별세했습니다.

현재는 그의 장남인 가즈데루(一輝)씨가 15대 심수관으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백세청풍'은 '영원한 맑은 바람'을 뜻하는데, 문 선배님이 심수관 가에서 보신

글씨는 송나라 학자 주자(朱子: 주희)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이 글씨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50233

 

세상은 날로 탁하여 과연 '백세청풍' 같은 것이 있는지, 있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가지만, 대개 중요한 것들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겐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의' '천복' '사필귀정' '백세청풍'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다를 겁니다.

전 세계에 '백세청풍'을 믿는 사람이 백여 명뿐이라 해도,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이 '백세청풍'의 증거입니다.

 
 
 

동행

dante 2021. 5. 7. 07:15

살아 있어서 좋은 점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묘비나 지방(紙榜)의 망자 이름 앞에 '학생 學生'이 쓰이는 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배움을 그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배울 기회가 있다는 것,

이 기회에 감사합니다.

 

어젠 신문에서 영어 단어 하나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임의진 목사님이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임의진의 시골편지'에서 '페트리코 (petrichor)'라는

단어를 처음 본 것입니다.

 

'영어로 밥 먹고 산 지 한참인데 이제야 이 단어를 만나다니!' 하는

부끄러움도 컸지만, 모르던 단어를 알게 된 기쁨이 더 컸습니다.

게다가 그 단어는 제가 라테보다 좋아하는 '비 냄새'를 뜻하니까요.

 

임 목사님의 글에도 나오지만, 'petrichor'는 '바위'와 '돌'을 뜻하는

그리스어 'petra'와 'petros', 그리고 '신들의 혈관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īchōr'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비가 대지를 만나 풍기는 냄새는 영혼에까지 스민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래서, 비 오는 날 땅이 젖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임의진 목사님께 감사하며 글을 옮겨둡니다.

 

임의진의 시골편지]콧구멍 킁킁

임의진 목사·시인


입력 : 2021.05.06 03:00 수정 : 2021.05.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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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큰 코를 가져 놀림을 받기도 했던 러시아 소설가 고골은 단편소설 <코>를 남겼다. 자다 깨어보니 코가 없어진 황당 사건. 관리이자 자칭 소령님 코발료프의 이야기. 누구는 예뻐지기 위해 코 성형수술을 한다. 코가 높아지면 눈도 덩달아 높아져 외롭게 될지도 몰라. 

 

술을 탈탈 마시는 주정뱅이 아저씨는 코가 포도주만큼 빨개. 피에로도 빨간 코를 치켜들며 까불고 댕긴다. 코는 냄새를 맡으려고 달린 기관이지. 갖가지 냄새를 맡는데, 뭔가 사회적으로 구리고 썩은 냄새까지도 맡는다. 돈이 되는 부정한 일에 합세하는 걸 ‘냄새를 잘 맡는다’ ‘코를 들이민다’라고도 말한다.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비 냄새가 참 좋았어. 영어 단어에 페트리코(Petrichor)라는 게 있는데, 돌을 의미하는 ‘페트라’와 신들이 흘린 피를 뜻하는 ‘이코’가 합쳐진 말. 마른 땅이 비에 젖으면 풍기는 냄새가 ‘페트리코’다. 비 온 날 아무 일도 않고 멍 때리며 쉬는 걸 ‘비숨’이라고 한다. 여기에다가 비 냄새까지 보태지면 눈꺼풀이 내려앉고 곧바로 졸리기 시작.

 

봄 들판 시골엔 독특한 냄새가 있다. 예전 퇴비 내고 밭에 뿌려두면 온 동네에 똥내가 진동해. 차를 몰 때 창문을 열고 달리곤 하는데, 논밭에서 나는 냄새가 암만 구수해도 결국 창문을 올리게 된다. 잠시 그러다말겠지 기도해. 인간군상조차 인성이 모나고 악취가 심한 자들이 귀촌하여 다정하던 이웃 간의 인심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농촌의 주인공 세대가 바뀌면서 냄새도 바뀌고 있다. 개들은 콧구멍 킁킁대고 냄새로 세상을 읽지. 옛날 깐날 호랑이는 악인의 냄새를 맡고 산을 넘어 밤새 오두막을 노렸단다. 이제는 호랑이도 없고, 코발료프만 살아가는 세상. 맘 편히 비 냄새를 맡고 살아가면 세상 누구보다도 복 받은 인생.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5060300095&code=990100#csidx63b59511588e2d5bd60c15ff6ee1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