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09

 

이 명박 대통령이 지난 주말 베이징에서 거꾸로 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했다고 구설에 올랐습니다. 네티즌들이 ‘다음’과 ‘네이버’ 등 포털에 게재된 대통령의 사진에서 태극이 뒤집힌 걸 발견한 겁니다. 비판이 잇따르자 곤혹스러워진 청와대가 언론사들에게 문제의 사진이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여 비난이 더욱 세졌습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사용되고 있는 태극기의 규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개막식 때 한국 팀의 기수인 장 성호 선수가 들었던 태극기, 박 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받는 시상식장에서 사용된 태극기 등의 네 괘가 규격보다 작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아 그런지 텔레비전 속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슬퍼 보입니다.

 

네티즌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 모르지만 거꾸로 달린 태극기 소식이 오히려 위안을 줍니다. 세계화를 좇느라 국어와 국사 등, 제 것 교육을 소홀히 해온 나라에서 이런 식의 잘못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살고 있는 네티즌들이 그 잘못을 발견하여 문제를 삼았다는 사실이 고마워서입니다.

 

제가 본 모든 미국 영화에는 성조기가 등장하지만 태극기가 나오는 우리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언젠가 미국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 미국은 역사가 짧은 이민자들의 나라여서 인위적 통합과 단결 노력이 필요하고,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곳곳에 국기를 게양하다보니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설명했습니다. 더불어 한국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 국가는 그런 식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의 수가 백만 명에 이르는가 하면, 정부가 앞장서서 반만년 역사를 깎아내리려하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해야 할 때,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원 전 2333년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이 이미 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이럴 때 대통령이 잘못된 태극기를 흔들며 웃는 일이 생겼으니 국민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좋은 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인 박 영효 등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만들었으니, 태생 자체가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을 상징합니다. 우주와 자연의 생성원리를 나타내는 태극의 빨강은 존귀와 양(陽)을, 파랑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며, 사괘의 건은 천(天)·춘(春)·동(東)·인(仁), 곤은 지(地)·하(夏)·서(西)·의(義), 이는 일(日)·추(秋)·남(南)·예(禮), 감은 월(月)·동(冬)·북(北)·지(智)를 뜻한다고 합니다.

 

대통령이든 국기 제작자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높은 분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실용주의자들이 그 실수를 핑계로 국기를 바꾸자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일본 국기처럼 거꾸로 드나 바로 드나 상관없고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는 국기로 바꾸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애국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혼신의 힘으로 거대한 장벽 같은 러시아 선수들과의 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여자 핸드볼 팀, 이 대통령이 뒤집힌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했던 바로 그 팀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애국은 힘든 일입니다. 이번 광복절부터 우리 국민 모두 태극기 바로 알기 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부터 새로이 우리 국민이 되는 사람들까지, 태극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생각하고, 건곤이감으로 인의예지를 공부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극기가 슬픈 얼굴로 보이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