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dante 2021. 7. 27. 07:51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현관문을 여니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와 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새벽 배송' 선물입니다.

 

제 힘으론 들일 수 없어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상자 얼굴의 글씨를 읽습니다.

'부드러운 복숭아'입니다.

상자를 열지 않아도 복숭아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습니다.

 

과대 포장이라면 질색하는 저를 위해

포장이 단순하되 신선한 복숭아를 찾아 보낸 수양딸...

저는 무엇을 했기에 혹은 무엇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홍복을 누리게 된 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머무는 새벽을 뚫고

저희 집 앞을 다녀간 사람... 그이에게도 감사합니다.

 그이의 하루가 너무 고단하지 않기를,

그이가 너무 늦지 않은 밤 피곤한 몸을 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고보니 땀이 제 온몸을 적셔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것은

'새벽 배송 선물'이 왔으니 새벽에 일어나 받으라는 소치입니다.

땀 때문에 새벽 잠을 잃었다고 속으로 꿍얼거렸는데,

땀 덕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역시 제 몸은 제 머리보다 현명합니다.

 

그런데 '새벽 배송 선물'을 가져온 그이는 어떻게 

이 공동주택의 입구를 통과해 저희 집 현관 앞에 선물을 두고 간 걸까요?

제 수양딸도 모르는 이 건물 출입구 비밀번호를 그이는 아는 걸까요?

그의 머릿속엔 얼마나 많은 건물 출입구의 비밀번호가 들어 있을까요?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옵니다.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와 함께 저희 집 현관 앞의 선물 상자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 위쪽 '7월 27일 00:24'를 보니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에 두고 간 것입니다.

새벽 두 세 시에 다녀간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다고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내시라고

답장을 보냅니다. 그이가 어떻게 이 건물의 출입구를 통과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감사가 궁금증을 이깁니다. 

 

'부드러운 복숭아'를 보내준 연진씨, 어둠을 뚫고 복숭아를

가져다 주신 분, 복숭아를 키워 주신 분, 복숭아 속에 들어앉은 시간...

다시 두루 감사하는 하루입니다.

 

그런데 큰일났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자꾸 눈이 감깁니다.

창밖 햇살이 무대 조명 같은데 졸음이 쳐들어옵니다.

어서 '부드러운 복숭아'를 먹고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수양 딸에게 제 철에 나오는 복숭아를 받으셨으니 좋으시겠습니다.
두루 감사드린 분들을 살펴보니 역시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숭아 한 상자가 김 시인님께 이르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야했으니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잉여가치가 직접생산자에게 보다 많이 돌아가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어서 맛있는 복숭아 드시고 찜통 더위 이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