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dante 2022. 4. 22. 10:11

한승헌 변호사님이 지난 20일에 돌아가셨음을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부음을 접하는 순간 세상이 기우뚱하는 것 같았습니다.

 

2015년이었던가요? 제가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를 진행하던

tbs 교통방송의 남산 사옥 1층 로비에서 변호사님을 뵈었습니다.

인터뷰에 출연하시기 위해 변호사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1층 로비 카페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뵈었지요.

 

그때 이미 여든을 넘기신 어른이셨지만 변호사님은 소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응시하시며 엷지만 밝은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셨습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가 변호사님을 존경하오니 사인을 한 장 해주십시오 하고

A4 용지 한 장을 내밀자, 변호사님은 우아한 필체로 '선과 악이 모두 스승'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써주셨습니다.

 

아이의 방에 갈 때마다 아이가 액자에 넣어 걸어둔 변호사님의 필체를 접하며

평안하시길 기원했는데... 아흔도 되시기 전에 총총히 떠나셨습니다.

 

보통 한국인들과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변호사님...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요?' 하고 투정하면 '살 만큼 살고 가는 것이니

요란들 떨지 마시오' 하시고, '변호사님 말씀 듣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하면

'내가 할 말은 다 내 책에 있으니 책을 사보시오' 하시며 웃으실 것 같습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제가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한 변호사님에 대해 썼던 칼럼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기사는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https://blog.daum.net/futureishere/967

 

 

'산민' 한승헌 변호사 별세…“변호사는 인권 수호가 본분”

한승헌 변호사. 정지윤 기자

60년간 법정과 사회에서 인권 신장에 기여한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일 밤 9시쯤 별세했다. 향년 88세.

 

1960년대 군사정권 때부터 다수의 시국사건을 맡아 ‘시국사건 1호 변호사’, ‘인권변호사’로 불린 고인은 자신의 호인 ‘산민(山民)’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1호·2호로 불리는 것은 빵집 이름 같고 “변호사라는 말 속에 이미 인권을 지키는 직분이 들어있다”고 했다. 군사정부의 ‘눈엣가시’로 찍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고인은 1934년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법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지만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1960년부터 5년간 통영지청,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일했다. 그러다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변호사가 됐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본격화하던 때다. “정부가 미워하는 사람을 변호”할 일은 많았는데, 막상 나서는 사람이 적었다. 고인은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시국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처음 맡은 필화사건은 1966년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사건이다.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가 주인공인 소설은 미군 병사의 성폭력 등 만행을 소재로 삼았다. 검찰은 반미 감정을 조성한다며 ‘반미용공’으로 몰았다.

 

고인은 이후로도 언론인, 작가, 교사 등이 연루된 필화사건을 많이 맡았다.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민중교육 사건, <즐거운 사라> 사건 등이다. 대학 때는 학보사 기자였고, 1960년대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이력이 영향을 미쳤다. 검사로 일하던 1961년 첫 시집 <인간귀향>을 냈고, 1967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두번째 시집 <노숙>을 냈다. 고인은 “검사 초임지가 문인들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통영”이라며 “문인들과 많이 친하니까 필화사건 당하거나 하면 그 인연으로 법정에서 변론하고 한 것”이라고 했다.

 

필화사건을 자주 맡다보니 어느새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가 됐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정권은 1974년 봄 유신 반대투쟁을 하던 민청학련을 겨냥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학생의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에도 5년 이상의 징역을 처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들 사건으로 253명이 구속됐다. 197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고인과 조준희(2015년 작고)·홍성우(2022년 작고)·황인철(2010년 작고) 변호사 등이 이 사건을 맡았다. 재판을 맡은 군법회의는 요식 절차였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의 사형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군법회의는 군 검찰관이 구형하는 대로 “한 푼도 안 깎아주고” 판결했다. 당시 고인이 남긴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은 후에 ‘정찰제 판결’이란 말로 회자됐다.

 

고인이 직접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고 사형제를 비판하는 수필 ‘어떤 조사(弔辭)’를 <여성동아>에 기고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129명의 변호인단이 고인을 위해 변론했다. 이 일로 8년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

 

이후 자신의 호를 딴 출판사 ‘산민사’를 차렸다. 고인의 서예 스승인 검여 유희강 선생은 ‘근재산민(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라)’이라며 ‘산민’이라는 호를 내렸다.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의 호 ‘가인(거리의 사람)’과 유사하다. 고인은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시기 주변에 ‘재조(판·검사)도 아니고, 재야(변호사)도 아니니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저작권법을 공부해 국내 최초의 저작권 전문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이른바 ‘1세대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86년 시국사건 변호사들이 모인 정법회(정의실천 법조회)를 만들었고, 2년 뒤 이를 모태로 민변이 발족했다.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 걸린 현판 글씨도 고인이 썼다.

 

고인은 어려운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2007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로스쿨, 국민참여재판 등을 법제화하는 데는 고인의 유머감각이 적지 잖은 역할을 했다. 고인은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국회가 법안 ‘발목’을 잡는다는데, 저는 ‘손목’을 잡고 싶어서 이렇게 왔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산민객담> 등 유머 글을 묶어 출판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냈다. 정년 65세 규정에 묶여 자신은 1년만에 임기를 마치면서, 후임을 위해 정년을 70세까지 연장했다. 감사원 위상과 독립성 확보를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고인은 2014년 10월부터 경향신문에 [의혹과 진실-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5일이다. 유해는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