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dante 2021. 1. 31. 11:17

호아... 2021년의 첫달도 오늘로 끝이 납니다.

한달 동안 제 안팎에서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에는 '임대'가 붙은 상점이 많아졌고

제 마음에선 어떤 이름들이 의미를 잃거나 사라졌으며

자꾸 눈과 비가 내려 지상의 낯을 씻었습니다.

 

새 달력을 달고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느라

새로운 생각을 하는 시간이 짧았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은 죽은 날과 같으니

이제라도 생生에 숨을 불어 넣어야겠습니다.  

 

책꽂이에서 <역설의 논리학>이라는 책을 뽑아

목차를 훑어봅니다. 수학 얘기입니다.

처음 치른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학은 0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 잘된 일이지만

당시에는 실패가 부끄러웠습니다.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수학에서 0점을 맞은 것이었고, 0점 맞은 것보다

부끄러운 건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집어든 수학책도 여전히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왜 플러스가 되는가?' 라는 제목에

매료되어 244쪽을 펼치니, '마이너스의 어려움'이라는 소제목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의 이름을 지울 때의 어려움 같은 것을

얘기하는가 하고 읽어보니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중에 이해할 수 있는 문장 몇 개가 반갑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는 '8 빼기 10'을 알지 못했다고 하며

스탕달도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에 관련하여 자서전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마이너스의 양을 어떤 사람의 빚이라고 생각했을 때, 1만 프랑의

빚에 5백 프랑의 빚을 곱하면 , 그것이 어째서 5백만 프랑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게 되는가?'"

 

투르게네프의 이해 불능, 스탕달의 질문은 시대를 뛰어넘어 바로

저의 것입니다. 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가

왜 플러스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플러스보다 마이너스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끝없이 가볍게 하여 어느 날 문득

저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오르고 싶으니까요.

   

 

   

모든 학문의 기초가 인문학이라는 칼럼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학에도 해당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수학을 가르쳐주는 분이 계시면 이제라도 찬찬이 배워보고 싶습니다.말처럼 비우고 버리기가 쉬운가요.그럴려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얀디 그냥 희망 사항으로만,그렇지 않아도 코로나가 우리 모두를 감량시키고 있어 자천타천으로 말라가고 있으니......

 
 
 

나의 이야기

dante 2021. 1. 28. 11:54

일년 전엔 귀하던 눈이 이번 겨울엔 제법 자주 옵니다.

아침 나절 작은 눈송이들이 무리지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내닫더니 천지가 금세 하얗습니다.

 

창가 난간에 쌓인 눈을 훑어 쥐어봅니다.

눈물을 품고 있는지 축축합니다.

축축한 만큼 잘 뭉쳐져 이내 돌이 됩니다.

 

좀 큰 덩어리로는 몸을 만들고 작은 덩어리로는 얼굴을 만듭니다.

사인펜으로 눈, 코, 입을 그려넣고 제라늄 마른 꽃잎을

머리 위에 얹습니다. 그렇게 보아서 일까요?

눈사람은 저를 닮았고, 빨간 꽃잎은 영락없이

제가 산책길에 쓰고 다니는 빨간 비니입니다.

 

눈사람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오늘 오후부터 주말까지 강추위라니

며칠은 견뎌낼까요?

 

문득 각오가 솟구칩니다.

꼭, 이만큼만, 이 꼬마 눈사람만큼만 하자.

그만큼 아름답자. 슬픔으로 오히려 단단해지자.

그만큼 견디자, 견딜 수 없게 되면 그처럼

깨끗하게 사라지자!

 

선생님이 만드신 귀여운 눈사람 보고 싶네요!
여기 남도에도 밤새 눈이 내렸다 금새 녹았습니다.
아빠보다 저를 더 따르던 손주 녀석이 훌쩍 커버린 뒤론 눈사람을 만들어보지 못했네요. 김시인님이 만드신 눈사람 녹기 전에 폰으로 찍어서 올려주세요~~~~^^

 
 
 

동행

dante 2021. 1. 26. 12:08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도 어렵지만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사상이나 이념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물론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요. 이익이 그의 사상이고 실천일 테니까요.

 

비전향장기수들은 사상을 바꾸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한 순교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새벽 그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종린 선생.

중국 훈춘에서 14년. 평양에서 13년. 남한에서 62년...
선생의 89년 힘겹고 외로웠을 생애를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딸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부고,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 타계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선생이 26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2차 송환 희망자였던 선생은 2017년부터 대장암으로 힘겨운 투병을 해왔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북측에 두고온 딸과의 재회를 꿈꾸며 송환을 기다려 왔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는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이 이끈 조국광복회 소속 유격대원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직전 일본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1946년에 숨을 거뒀다. 평양으로 옮겨온 선생은 1948년 항일혁명가 유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선생은 김일성 주석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학원에도 자주 찾아오시고 바로 옆에서 볼 수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인자하고 호탕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 대구팔공산 전투와 고지방어전 등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살아남아 소좌(소령)까지 진급했다.

 

선생은 1959년 6월에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내려올 당시 아내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된 딸이 있었다. 오래 머무르는 임무는 아니었다. 먼저 남파된 지하조직원에게 지령을 전달하고 곧바로 북으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위에서 올라오라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체류가 길어졌고, 남파 6개월 만인 그해 12월 체포되었다.

 

선생은 이승만 정권 말기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무기징역을 두 차례나 받았다. 대구와 광주, 전주, 대전교도소를 옮겨 다녔다. 선생은 2018년 7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간 이하 취급을 받을 때는 수치스럽고 반발심도 생겼습니다. 국가 법률로 수용시켰으면 규칙에 맞게 대해야 되는데 일반 재소자들보다 차별받고, 조금만 뭘 해도 수백 배 이상의 보복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배고픔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을 통한 강제전향 공작은 다시 상기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과 같은 기억입니다. 폭력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생각이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선생은 4·19와 5·16을 거치며 35년간 감옥에서 현대사의 격동기를 보냈다. 1993년 12월 병보석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았다. 다 죽게 된 몸으로 출소한 선생은 문익환 목사의 도움으로 전남 무안의 교회에서 건강을 추스르며 6년을 생활했다. 전향서를 쓴 적 없는 선생은 2000년 1차 송환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전향자로 분류돼 송환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교회에 나와 있는 사람을 비전향장기수라 인정할 수 없다는 일방적인 규정 때문이었다. 선생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2차 송환 희망자들과 함께 송환을 촉구하는 투쟁을 펼쳐왔다. 선생은 2007년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행사로 방북 길에 올라 딸을 만났다. “당시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복도 쪽에서 한 중년여성이 자꾸 쳐다봐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에 북측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딸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날 버스에 앉아 있는데 딸과 사위, 손자, 손녀가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뛰어내려갔는데 주위에서 막는 바람에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겨우 얼굴만 보고 와야 했습니다.” 선생은 중국에 있는 조카를 통해서 딸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있다는 것과 아내가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중국 훈춘에서 14년. 북의 평양에서 13년. 그리고 남한에서 62년을 살다간 선생은 끝내 딸 옥희씨와의 재회를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애틋한 일생은 자우녕 감독이 2019년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옥희에게’에서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선생의 빈소는 인천사랑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되었다. 추도식은 27일 오후 6시에 빈소에서 진행된다. 발인은 28일 오전 6시다. 유해는 화장된 후 서울 종로구 금선사에 안치될 예정이다. 문의:(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회장 김혜순) 02) 874-4063.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61133001&code=910303#csidx2b9c7ee18336a659fa078d5cf4b2573 

에고,김시인님께서 어떻게 이 분을 아시고 글을 올리셨습니까?
기술하신대로 저희 무안에서 사시는 동안 가끕 뵜었는데 깊은 사연은 나누지 못했습니다. 모셨던 해제용학교회는 제가 다니는 교회랑 같은 교단이어서 과정과 아픔은 공유했더랬습니다, 분단 조국하에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아픔인데 좀 더 인도적 차원에서 배려했다면 사랑하는 부인과 딸,외손주들과 못다 한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실 수 있었는데 공안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너지 못한 탓에 이렇게 반 인륜적인 임종을 대하게 되었네요.어서 빨리 평화협정 맺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삼가 고 박종린 선생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분단과 이별 없는 하늘나라에서 사모님과 해후하시고 기쁨의 나날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