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dante 2021. 10. 16. 23:42

시월 한가운데에 들어선 겨울 같은 추위가

옛날을 소환합니다. 책장을 기웃거리다

전혜린 (1934-1965)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집어 듭니다.

전혜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속이 싸해집니다. 

 

'이런 완벽한 순간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는 소제목에 이어지는 문장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p. 97,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삼중당문고

 

제게도 가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오늘 동네 횡단보도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갑작스런 추위도 하늘의 아름다움을 지우진 못합니다.

아니 추위는, 아름다운 문장 아래 그어진 밑줄처럼

하늘과 녹슬고 있는 나뭇잎들을 강조합니다.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늘 검은 옷 차림이던 대학생 딸에게 검은 색을 입지 말라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전혜린이 검은 옷만 입었지. 검은 옷만

입는다는 건, 속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다는 거야... 그러지 마.

검은 스타킹도 신지 마. 네 다리는 나무젓가락 같아서 검은 걸

신으면 더 가늘어 보여..."

 

아버지 떠나신 지 6년이 넘었고 나무젓가락 같던 제 다리가

통통해진 지는 더 오래되었지만, 그때 달래듯 말씀하시던

아버지 스승의 눈빛은 오늘 본 하늘처럼 선명합니다.

완벽한 순간, 그 순간 때문에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

 

 

 

 

완벽한 순간들만 이어져도,미진한 순간들먼 이어져도 세상은 심심하겠죠?
불완전한 긴 터널 끝에 맛보는 완벽한 순간들은 사막의 오아시스로 생의 원을 완성 시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