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dante 2022. 5. 14. 11:29

이 나라의 저명인들 중엔 텔레비전과 영화, SNS에서 하하호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엔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얼굴을 자주 손보아 '방부제 미모'를 자랑하는

배우들도 있고 명가나 명문대 출신임을 자랑하는 가수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면 늘

'그대들은 돈은 많은데 가오가 없구나' 생각합니다. 즉, '스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위로가 된 건 지난 7일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 씨 (1966-2022)였습니다.

일찌기 영화사를 쓴 그는 하하호호도 하지 않고 광고에 출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자리에서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엔 그의 큰 발자국만큼 큰 허공이 남고

사람들은 벌써 '거인 강수연, 대장부 강수연'을 그립니다.

아래 글에서 제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보았기에 옮겨둡니다.

 

우리들의 배우 강수연, 우리들의 스타 강수연,

삼가 명복을 빌며 그와 함께했던 시간에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rr18koTkIo&ab_channel=%EC%A7%80%EB%8B%88%ED%8C%A8%EB%B0%80%EB%A6%AC%5BGenieFamily%5D

 

 

 

네 죽음을 기억하라

김택근 시인·작가

 

평론가 이어령, 변호사 한승헌, 소설가 이외수. 그들을 향한 추도사가 아직도 허공을 맴도는데 강수연과 김지하의 부음이 들려왔다. 지난 11일 두 사람은 봄의 끝자락에 묻혔다. 그들이 떠났어도 이팝나무는 흰 웃음을 흩날리고 여기저기 꽃불이 옮겨 붙어 대지는 곱다. 저 봄빛은 투명해서 무덤 속까지 비출까. 북망산에도 소쩍새가 울고 있을까. 그들의 치열했던 삶은 죽음을 탄생시키고 그 소임을 마쳤다. 그들은 죽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배우 강수연의 큰 눈에는 도도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눈물이 가냘프지 않았고, 아름다움은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범접하기 어려웠다. 초봄의 ‘상큼한 도발’과 늦가을의 ‘처연한 순응’이 깃들어 있었다. 강수연은 그런 자신의 이미지를 잘 읽어내는 배우였다.

 

우리 젊은 날의 우상들은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그만그만한 크기로 작아졌다. 더러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잡담과 기담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렸고, 친근한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 편하게 살았다. 왕년의 스타들이 그렇게 닳아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좇던 왕년의 세월이 그냥 억울할 때가 있다. “저런 사람이 내 청춘을 장악하고 있었다니….”

 

강수연은 달랐다. 월드 스타의 명성을 함부로 팔지 않았고, 영화 밖에서 망가지지 않았다. 지혜롭고 강했다. 칩거 또는 은둔마저 계산된 것이라 여겨질 만큼 자신을 철저히 관리했다. 그래서 듬직했다. 그렇게 그는 한국영화의 자산이 되었고, 우리네 자부심이 되었다. 외국의 기품있는 여배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은근히 강수연을 떠올렸다.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배우가 있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는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시인 김지하, 한때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1970년대 지상은 유신독재의 세상이었지만 지하는 김지하가 지배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정신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체념과 절망을 베어버렸다. ‘오적(五賊)’과 손을 잡고 있던 어용지식인들은 ‘오적’이란 시가 발표되자 중천의 해를 쳐다보지 못했다. 이윽고 지상으로 올라온 김지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머무는 곳이 저항의 진원지였다. 김지하의 시는 민주주의의 깃발로 펄럭였다. 시를 읽은 이들은 타들어가는 땅에 희망을 심었다.

 

어느 날 김지하가 변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학생과 노동자의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신문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또 수구보수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독재자의 딸을 옹호하며 그의 당선을 도왔다. 그러자 함께 끌려갔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김지하를 노려봤다. 공(功)이 너무도 찬란해서 과(過) 또한 거대했다. 죽음을 맞은 그에게 공과를 가리는 일은 부질없어 보였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과 업적은 지면에 넘쳐났지만 직접 찾아가 그의 영전에 꽃을 바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작가 서해성은 죽은 지하와 산 지하를 함께 묻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하는 산 지하, 죽은 지하가 하나가 되어 떠나갔다. 분단과 군사독재시대는 지하라는 피 끓는 모국어를 얻었고, 여전히 더 억압을 뚫고 가야 했던 울분에 찬 그 시대는 또 지하를 내쳐야 했다. 그는 맨 척후에서 거대한 모국어로 서슴없이 독재와 싸웠고, 끝나지 않은 저항시대와 그 벗들과 불화했다. 지하를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나. 그가 모국어의 중심에 등재시킨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이 묻는다.”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고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죽지 않은 나를 미래 어디쯤에 세워두고 우리는 죽음을 향해 걷거나 뛰어간다. 그래서 시인 딜런 토머스는 ‘맥박 그것은 제 무덤을 파는 삽질소리’라고 했다.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간혹 멈춰서는 곳이 있다면 바로 장례식장이다. 망자 앞에서 비로소 죽음을 떠올린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가 돌아온 이는 없다. 죽음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른다. 죽음이 있어 삶이 곧고 의젓해야 하지만 살다보면 죽음을 내다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보자기에 자신의 삶을 싸들고 죽음의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계시지 않다면 남은 자들이 보자기를 풀어볼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죽음에 길을 물어볼 일이다.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5140300005

 
 
 

동행

dante 2022. 5. 9. 08:56

지난 주 오랜만에 명동에 나갔습니다.

명동성당 파밀리아홀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가는 길, 오는 길, 결혼식... 두루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작년 어느 날인가 갔을 때 텅 비어 있던 명동 중앙로가

노점상들과 행인들로 북적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스크림과 석쇠구이 꼬치를 파는

노점들 주변엔 먹느라 바쁜 사람들이 많았고, 달고나를 만드는 상인 앞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여럿이었습니다.

 

결혼식도 여러모로 새로웠는데, 몇 해 전 혼례와 공연을 위해 새로 지은

파밀리아홀은 성당보다는 개신교 교회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혼례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도 신부님이라기보다는

목사님 같았습니다.

 

그동안 신부님과 목사님을 접하며 느낀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목사님들은 대개 힘을 주어 말하지만 신부님들은 힘을 빼고 말하고,

목사님들은 높낮이가 드라마틱하지만 신부님들은 대개 높낮이 없이

잔잔한 어조로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의 신부님은 목소리에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어조의 변화도

다양해서 신부님이라기보다는 목사님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나중에 피로연장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으며 그런 느낌을 얘기하니

친구들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한 친구는 "젊은 신부님이라 그래.

요즘 젊은 신부님들은 그래" 하고 얘기했습니다.

 

저로선 젊은 신부님들도 선배 신부님들처럼 힘을 빼고 잔잔한 어조로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개신교 목사님들과 차별화가 될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강조하는 '평화'에 더 잘 어울릴 테니까요.

 

신부님이 큰 목소리로 미사를 집전한 것을 '실수'라고 하는 거냐고요?

아닙니다. 신부님의 큰 목소리가 낯설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그날 신부님의 '실수'는

그분이 '사랑'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말을 인용할 때 나왔습니다.

그분은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에 나오거든요.

 

대단치 않은 '실수'를 굳이 정정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실수로 인용한 문장들이

그대로 퍼져나가 다시 인용되는 경우를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신부가 방송 작가라 하객 중에도 방송 작가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신부님의 말씀을 그대로 재인용할까 걱정됩니다.  

 

젊은 신부님들 중에는 개신교에 비해 조용한 가톨릭교회의 분위기가

요즘 사회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역동적인 미사와 강론을 지향할지 모르나

풍조가 그럴수록 성당만큼은 도심 속 호수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이 변화에 들이는 노력만큼의 노력을 강론 준비에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어쩜 제 견해와 비스므레해서 웃었습니다. 내용이 알찬 강론은 잔잔해도 가슴을 여미게 하지만 내용의 부실을 잔 기술로 커버하려는 오버 액션은 그냥 실증이 나니까요. 그러나 제가 농민운동의 현장을 누비면서 강연할 땐 내용도 깐깐하게 준비했고 속도와 고저를 조정해서 농민들의 우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더랬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께선 개신교 목사님들보다 낮은 톤으로 강론해 주셨음 좋겠습니다! 그래야 진실에 가까우니까요~~^^

 
 
 

동행

dante 2022. 4. 22. 10:11

한승헌 변호사님이 지난 20일에 돌아가셨음을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부음을 접하는 순간 세상이 기우뚱하는 것 같았습니다.

 

2015년이었던가요? 제가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를 진행하던

tbs 교통방송의 남산 사옥 1층 로비에서 변호사님을 뵈었습니다.

인터뷰에 출연하시기 위해 변호사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1층 로비 카페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뵈었지요.

 

그때 이미 여든을 넘기신 어른이셨지만 변호사님은 소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응시하시며 엷지만 밝은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셨습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가 변호사님을 존경하오니 사인을 한 장 해주십시오 하고

A4 용지 한 장을 내밀자, 변호사님은 우아한 필체로 '선과 악이 모두 스승'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써주셨습니다.

 

아이의 방에 갈 때마다 아이가 액자에 넣어 걸어둔 변호사님의 필체를 접하며

평안하시길 기원했는데... 아흔도 되시기 전에 총총히 떠나셨습니다.

 

보통 한국인들과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변호사님...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요?' 하고 투정하면 '살 만큼 살고 가는 것이니

요란들 떨지 마시오' 하시고, '변호사님 말씀 듣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하면

'내가 할 말은 다 내 책에 있으니 책을 사보시오' 하시며 웃으실 것 같습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제가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한 변호사님에 대해 썼던 칼럼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기사는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https://blog.daum.net/futureishere/967

 

 

'산민' 한승헌 변호사 별세…“변호사는 인권 수호가 본분”

한승헌 변호사. 정지윤 기자

60년간 법정과 사회에서 인권 신장에 기여한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일 밤 9시쯤 별세했다. 향년 88세.

 

1960년대 군사정권 때부터 다수의 시국사건을 맡아 ‘시국사건 1호 변호사’, ‘인권변호사’로 불린 고인은 자신의 호인 ‘산민(山民)’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1호·2호로 불리는 것은 빵집 이름 같고 “변호사라는 말 속에 이미 인권을 지키는 직분이 들어있다”고 했다. 군사정부의 ‘눈엣가시’로 찍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고인은 1934년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법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지만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1960년부터 5년간 통영지청,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일했다. 그러다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변호사가 됐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본격화하던 때다. “정부가 미워하는 사람을 변호”할 일은 많았는데, 막상 나서는 사람이 적었다. 고인은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시국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처음 맡은 필화사건은 1966년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사건이다.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가 주인공인 소설은 미군 병사의 성폭력 등 만행을 소재로 삼았다. 검찰은 반미 감정을 조성한다며 ‘반미용공’으로 몰았다.

 

고인은 이후로도 언론인, 작가, 교사 등이 연루된 필화사건을 많이 맡았다.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민중교육 사건, <즐거운 사라> 사건 등이다. 대학 때는 학보사 기자였고, 1960년대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이력이 영향을 미쳤다. 검사로 일하던 1961년 첫 시집 <인간귀향>을 냈고, 1967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두번째 시집 <노숙>을 냈다. 고인은 “검사 초임지가 문인들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통영”이라며 “문인들과 많이 친하니까 필화사건 당하거나 하면 그 인연으로 법정에서 변론하고 한 것”이라고 했다.

 

필화사건을 자주 맡다보니 어느새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가 됐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정권은 1974년 봄 유신 반대투쟁을 하던 민청학련을 겨냥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학생의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에도 5년 이상의 징역을 처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들 사건으로 253명이 구속됐다. 197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고인과 조준희(2015년 작고)·홍성우(2022년 작고)·황인철(2010년 작고) 변호사 등이 이 사건을 맡았다. 재판을 맡은 군법회의는 요식 절차였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의 사형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군법회의는 군 검찰관이 구형하는 대로 “한 푼도 안 깎아주고” 판결했다. 당시 고인이 남긴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은 후에 ‘정찰제 판결’이란 말로 회자됐다.

 

고인이 직접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고 사형제를 비판하는 수필 ‘어떤 조사(弔辭)’를 <여성동아>에 기고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129명의 변호인단이 고인을 위해 변론했다. 이 일로 8년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

 

이후 자신의 호를 딴 출판사 ‘산민사’를 차렸다. 고인의 서예 스승인 검여 유희강 선생은 ‘근재산민(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라)’이라며 ‘산민’이라는 호를 내렸다.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의 호 ‘가인(거리의 사람)’과 유사하다. 고인은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시기 주변에 ‘재조(판·검사)도 아니고, 재야(변호사)도 아니니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저작권법을 공부해 국내 최초의 저작권 전문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이른바 ‘1세대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86년 시국사건 변호사들이 모인 정법회(정의실천 법조회)를 만들었고, 2년 뒤 이를 모태로 민변이 발족했다.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 걸린 현판 글씨도 고인이 썼다.

 

고인은 어려운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2007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로스쿨, 국민참여재판 등을 법제화하는 데는 고인의 유머감각이 적지 잖은 역할을 했다. 고인은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국회가 법안 ‘발목’을 잡는다는데, 저는 ‘손목’을 잡고 싶어서 이렇게 왔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산민객담> 등 유머 글을 묶어 출판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냈다. 정년 65세 규정에 묶여 자신은 1년만에 임기를 마치면서, 후임을 위해 정년을 70세까지 연장했다. 감사원 위상과 독립성 확보를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고인은 2014년 10월부터 경향신문에 [의혹과 진실-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5일이다. 유해는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